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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명진 Aug 04. 2022

방황의 끝, 혼자만의 여행

사십춘기에 얻은 것들(4)

방황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혼자 떠나야 했다. 몇 해 전만해도 틈만 나면 서해 앞바다에 있는 섬을 찾아다녔다. 마흔을 앞두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섬마을 아침, 짙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사라진다. 서른아홉의 나는 물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에 떨며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창업한 회사에서 내부 갈등이 심할 때였다. 귀촌해서 만나 협동조합을 함께 창업한 동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고, 우리를 믿고 입사한 후배들은 불안해했다. 결국 협동조합은 주식회사로 바뀌었고, 주식회사 전환을 주도했던 다른 창업 멤버가 새로운 대표가 됐다(나는 협동조합 이사장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주식회사 이사 직책을 맡았다). 조직 변경으로 논란이 마무리될 줄 알았으나, 회사는 더욱 시끄러워졌다. 서로 비난하고 증오했으며 때로는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의욕과 활기가 넘쳤던 사무실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 공간에 있으면 질식할 것만 같았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혼자 떠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여행은 영원한 도피처가 될 수 없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답답한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창업을 위해 4년간 쏟았던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지 못했다. 미래에 대한 막막하고 두려운 감정도 있었다.


조용히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욕심과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어느 순간 내 손으로 창업한 회사를 떠날 수 있는 용기와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마흔 살에 두 번째 창업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혼자만의 여행의 진수는 템플스테이다. 당시 충남 당진에 있는 영랑사에 자주 갔었다. 아담한 절이지만 유서 깊은 대웅전과 키가 크고 잎이 풍성한 고목이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오히려 작은 절이라 방문객이 거의 없어 조용했다. 절에는 주지스님과 선방스님 두 분과 절일을 돕는 불자 몇 분만 계셨다. 간혹 젊은 사람들과 마주칠 때도 있었는데, 대부분 고요히 혼자 있는 시간을 마주하기 위해 템플스테이 하러 온 손님들이었다.


짧으면 2박 3일, 여유가 있으면 4박 5일 동안 절에 머물렀다. 깔끔하게 새 단장한 숙소에서 혼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했다. 심심하면 뒷산으로 산책을 하거나, 아무도 없는 법당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했다.


어느 날 선방에 계시는 스님께서 차 한 잔 하러 오라고 하셨다. 스님이 내려준 차를 마시며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회사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보다 열 살쯤 많아 보이는 스님은 오랫동안 방황을 하다 늦은 나이에 출가하셨다고 했다.


“선(禪)에서 무심으로 관(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님이 말씀하셨다. 분별하지 않는 텅 빈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라는 이야기였다. 불교에서 나에게 부딪히는 온갖 상황을 ‘경계’라고 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순경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역경계’라고 하는데, 선의 입장에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원래 없다. 경계가 닥치면 마음공부를 위한 재료로 삼는다.


“제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회사 문제도 그저 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템플스테이에 온 이유를 설명하면서 스님의 말씀에 답했다.

“사업은 관하면 안 될 텐데요.”

스님은 나의 대답에 적잖게 당황하셨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 사업을 망치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템플스테이는 나름의 수행이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을 때는 섬으로 향했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보령여객터미널로 곧장 향했다. 홍성읍에서 차로 40분만 달리면 도착할 수 있어, 거기서 마지막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당시 차량 트렁크에는 낚싯대가 항상 실려 있었다. 먹을 것도 집에 김치 정도만 챙기고 편의점에서 햇반 몇 개와 캔맥주만 샀다. 낚시로 잡은 생선으로 회를 떠먹거나 갯벌에서 캔 바지락과 함께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하루 3끼를 모두 내 손으로 잡은 식재료로 요리해먹으면 먼 옛날 수렵채취 생활하던 원시적인 본능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밤에는 혼자 어두운 바다를 응시하며 낚시를 하고, 평일 낮에는 아무도 없는 민박집 평상 위에서 글을 썼다. 글쓰기는 혼자만의 여행에서 가장 좋은 친구다. 언제든 마음먹으면 불러낼 수 있고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조용히 들어준다. 그런 시간을 통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여행 중에 누군가 말을 걸면 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는 느낌이 든다. 밤낚시를 하다보면 50~60대 외로운 아저씨들이 “나도 혼자 왔으니 술 한 잔 같이 하자”며 말을 건다. 가끔씩 그런 인연도 열어두지만, 가급적 정중히 거절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 매번 타인에게 의존하면 빈자리가 생길 때마다 외로움은 반복된다.


사십춘기를 거치면서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 혼자 떠났다.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혼란스러운 일상을 떠난 조용한 공간과 노트북, 그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책 한 권이면 충분했다. 사실 요즘은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온전한 느낌을 받는다. 혼자서 노는 법을 터득했으니 나의 노후는 외롭지 않을 수 있겠다.


* 메인이미지 출처 : Photo by Julian Hanslmai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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