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나의 데미안, M

by 기하

누구에게나 한번쯤 데미안이 가고, 누구나 한번쯤 데미안이 된다.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 제제에게는 뽀르뚜가, 해리포터에게는 시리우스, 그리고 내겐 M이 있다.


모두가 M을 좋아한다. 나도 그렇다. 철학자이자 딴따라인 그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기 위해선 부지런한 음주가무가 필수라 말한다. 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의 중심에 있다. 길을 걷다 갑자기 춤을 추고, 춤을 추다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다. 그에게 질문은 일상이다. 머릿속에 맴도는 이야기들을 쉽게 꺼내놓고, 무겁게 고민한다. 무거운 고민이 그를 짓누를 때 그는 '뇌가 물 속에 잠겼다'고 표현한다.


내 뇌가 물 속에 잠길 때, 그는 나를 구원한다. 물 속에서 버둥거리는 내게 밧줄을 내려주는데, 참 친절하지 못하다. 올이 풀린 밧줄을 내려주고, 그 올은 니가 알아서 잘 엮어서 올라오렴, 하는 식이다. 그는 어떤 것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조언하지 않으며, 듣는 것은 나의 몫이지만 선택은 너의 몫이라 이야기한다. 맞다. M은 대체로 재수가 없고 얄밉다.


그런 M이 '물 속의 뇌'상태가 될 때마다 나를 찾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툭툭 던져내며 입버릇처럼 내게 말했다. 언젠가 자신의 실패를 엮은 책을 쓰겠노라고. (내가 볼 때는 '실패'보다는 '미끄러짐' 정도인 것 같지만, 어쨌든) '실패'할 때마다 그는 말한다. 와, 대체 얼마나 더 잘되려고 이렇게 힘들지? 지금의 힘듦이 나중의 자산으로 남을 것을 그는 믿는다. 그리고 그의 그런 믿음과 말들은 내게로 다가온다. 위로를 할 줄도, 위로를 받을 줄도 안다. 감정을 주고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대개 멋있다.


나는 멋이 없었다. 감정을 주고받으며 살기에 내 하루는 너무 짧았다. 적당한 관계 맺기, 적당히 친하게, 뭐 그런 건 잘했다 자부한다. 하지만 그 이상을 해내기에 내 스케줄은 늘 빡빡했다. ‘해야 하는 일’을 외면하기엔 겁이 많았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래서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일만 선택했다. 스스로를 ‘완벽주의자’라 지칭했지만, 그건 사실 재미없고 용기 없는 삶을 사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변명에 불과했다.


M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치댔던' 이유다. 부러움은 묘한 경쟁심으로 변모했다. ‘M도 하는데, 난 왜 못해?’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감정을 모두 담아 그의 방식을 따라가 보았다. 길 한복판에서 세상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노래를 부르고, 정신 놓고 술을 먹고, 춤도 추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놀아봤다.


재밌게 살고 싶어졌다. 가만히 앉아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규율에 갇힌 나를 위로하며 사는 삶은 지금까지 해온 것으로 충분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내가 먼저 조금 더 다가가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한번쯤 데미안이 가고, 누구나 한번쯤 데미안이 된다. 내 세상을 파괴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M들은 내게 알을 깨고 나와야 새로운 세계가 등장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나는 알았다. 갈라지는 것은 처음만 두려울 뿐, 막상 알을 깨고 나온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