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에 대한 단상
타투를 했다, 고 글을 시작하면 좀 멋있을 것 같지만, 아직 타투를 하지 못했다. 타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무엇을 몸에 새길지 결정하지 못해서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의미를 두고 타투를 하면 금방 질려버린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무언가를 새기고 싶어 계속 고민 중이다. 내게 ‘꽤 괜찮은 무언가’가 대체 뭔지 계속 고민하고 있는 까닭은 하나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내가 평생 품고 살아가야 할 ‘무언가’가 대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흐릿한 사람이 되기 싫단 생각을 자주 한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뚜렷한 색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난 늘 무언가를 꼽는 것이 어렵고 어색하다. 누군가 내게 제일 좋아하는 영화, 최고의 책, 사랑하는 음식, 즐기는 취미 등을 물어올 때면 무엇을 말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고3 때 무슨무슨 기자단 같은 전국구 활동을 했던 적이 있다. 난생 처음으로 혼자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어느 어느 건물로 오라고 했는데, 나는 심각한 길치였고, 서울은 너무 낯설었다.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겨우 도착했지만 이미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늦은 뒤였다. 허겁지겁 올라가니 사람들은 이미 다 모여 있었고, 막 자기소개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딱 그때 도착했다는 이유로 1번으로 자기소개를 하게 됐는데, 나는 내가 늦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 사실 제가 오늘 처음 서울에 와서, 길을 헤맨다고 조금 늦었는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담당자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괜찮다고, 지금은 '자기소개'시간이니 늦은 이유가 아니라 본인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된다고.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나에 대해서 뭘 이야기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해진 물음 없는 '자유형식의 구술 자기소개'에 나는 간신히 출신 고등학교와 학년, 그리고 이름만 말하고 자리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뭔가 놀라웠다. 어떤 친구는 외국 밴드 이름을 대며 그들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친구는 특정한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가수, 작가, 영화 같은 것들을 들었고, 학교나 학년으로 자신을 수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꽤 이상한 느낌이었다. 저들은 다 뚜렷한 색을 지니고 있는데 나만 흐린 느낌이었다. 내가 뚜렷한 색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꼽는 것이 어색하다. 더이상 낯선 길을 헤매는 고3이 아닌데도 말이다. 취향이나 가치마저 정답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그런걸까? 아니면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무언가를 대답해야 한다고 스스로가 느껴서일까? 가끔 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흐릿하게 물들이며 살아간다고 느꼈다. 소확행이나 가심비 같은 단어들, '트렌드'에 몸을 끼워맞추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볼 때면 더 그랬다. 취향이나 가치도 유행을 타는 것을 보며 뚜렷함에 대한 열망은 그저 닿지 못할 이상처럼 여겨졌다.
그런 생각이 극에 달할 때쯤 본 영화가 '소공녀'였다. '미소'는 남들과는 달랐다. 나랑 비슷한 또래처럼 보이는 미소는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일당 4만5천원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산다. 그는 노숙인과 여행자 그 어디쯤으로 묘사된다. 고졸, 여자, 돈 없고 집 없고 ‘제대로 된’ 직장 없음의 3박자를 고루 갖춘 ‘약자’인 미소는 뚜렷한 색을 지닌다. 위스키 한 잔, 담배, 남자친구 한솔이라는 세 가지만 있으면 미소는 행복하다. 그 세 가지가 미소가 지닌 색을 빛나게 해주는 물감이다.
3원색만 있으면 무슨 색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미소는 자신만의 3원색을 꼭 붙들고 있다. 부러웠다. 부러움, 이 영화를 보고 내가 가장 강력하게 든 감정이었다. 나는 미소가 부럽다. 나도 미소처럼 돈도 없고 집도 없다. 근데 미소는 남자친구는 있다. 나는 남자친구가 없는데, 젠장. 미소는 다 가졌다. 남자친구도 있고 위스키도 있고 담배도 있다. 머리는 하얗게 셌지만 미소에게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는 흰머리마저 멋짐으로 탈바꿈시킨다. 미소는 자신이 품은 세 가지의 가치를 평생 지켜나갈 것이다. 그 가치를 지켜내려 치열하게 투쟁할 것이다. 평생을 투쟁하며 지켜낼 가치를 가진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그건 정말 엄청난 투쟁이다. 미소는 그 길을 외롭게 걸어간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걷던, 유일한 안식처였던 남자친구 한솔마저 ‘현실’에 벽에 부딪혀 떠나갈 때, 미소는 한솔에게 “배신자!”라 외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솔과 같은 선택을 한다. 현실을 선택한다 자위하며, 꿈꿔왔던 많은 것을 ‘배신’한다. 사실 그 '현실'도 잘 꾸며진 환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남들의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내 환상을 지켜내는 것도, 쉬운 건 하나도 없다.
이것도 저것도 쉽지 않다면, 그냥 계속 뚜렷한 사람이 되겠단 열망을 가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미소처럼 나도 3원색을 찾고 싶다. 미소는 내게 말해줬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치열하게 힘든 거고, 분명한 색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면 견디는 과정은 꼭 필요한거라고. 견디면서 평생을 품고 갈 '무언가'를 찾아내는거라고. 나는 여전히 그걸 찾는 과정 속에 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힘들 때 듣는 노래, 많이 돌려봤던 드라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성별이나 나이 따위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나를 정의하는 방법 같은 것들을 찾는 과정 말이다.
아, 이제 하나의 답은 찾았다. 누군가 내게 가장 위로받은 영화가 무엇이냐 믈으면, 나는 이제 대답할 수 있다. '소공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