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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l 14. 2023

30년 전쟁

C. V. 웨지우드

옮긴이(남경태)의 글


12-13/... 중세 해체기에 들어서는 르네상스, 발견의 시대, 종교개혁이라는 세 가지 매머드급 격변이 거의 동시적으로 폭발했고...


중세후기의 교회와 그 정점인 로마교황은 말하자면 오늘날의 UN과 같았다...


실제로는 강력한 통제력을 갖지 못했으면서도 최소한의 통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중세의 교황과 교회, 그리고 현대의 UN이라면 그런 조정자가 부재할 때... 17세기초 30년전쟁으로 시작되었고, 20세기 중반 2차세계대전으로 현대의 교황, UN이 탄생하면서 종결되었다..


14/ ... 그 진통 속에서 유럽 문명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조합이라는 체제상의 정답을 찾아냈고, 그 정치적 표현으로 의회민주주의와 경제적 표현으로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 30년전쟁은 그 거대한 변혁의 첫 단추에 해당한다.


17세기초는 종교개혁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시절이었으므로 30년 전쟁은 종교 전쟁으로 시작해서 영토 전쟁으로 끝난다. 그런 점에서 이 전쟁은 중세 전쟁에서 근대 전쟁으로의 연결고리가 된다...


15/ 종교개혁의 열풍이 일단락되면서 독일에서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를 통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루터파에만 국한되고 칼뱅파를 비롯한 다른 신교 종파는 제외되었는데, 이 불씨가 결국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예수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가톨릭 세력이 재무장하고 나서자 불안을 느낀 칼뱅파는 1608년 팔츠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를 중심으로 신교연합을 결성한다... 일촉즉발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1617년에 보헤미아의 왕이 된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도를 탄압하자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그를 거부하고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한다. 이것이 30년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30/ 당시 유럽의 외교 속도는 통신과 교통의 중요한 수단인 말이 달리는 속도와 같았다...


정보의 전달이 여의치 않은 탓에 여론이 지배세력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32/... 민족의식을 가진 집단은 존재했으나 민족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결합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를테면 프랑스 군인이 프랑스에 맞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 유럽 외교에서는 민족과 국가보다 왕조가 더 중요했다. 국제정책의 중추는 왕실간의 통혼이었고, 그 동력은 군주 개인의 의지나 왕실의 이해관계였다...


33/... 정치권력을 장악한 소수는 그 권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부를 갖지 못한 반면, 상인계급은 재력을 갖추었으나 권력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양측의 대립은 점차 빈번해졌다.


34-35/ ... 세금제도는 주로 예전의 군역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대중들의 인식에는 화폐에 대한 수요가 전쟁이라는 비상사태와 불가분하게 결부되었다. 공공사업을 위한 조세관념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지배자들은 분별없이 세수입을 예견하고, 왕실토지를 팔거나 특권을 저당잡혔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의 힘은 더욱 약화되었다.


... 과도기는 언제나 부실하게 마련이다. 그 시대의 지배적인 요구는 효율성이었다...


... 보헤미아의 대의 정부가 실패한 이유는 타도한 전제정치보다 행정에 크게 서툴렀기 때문이다...


38/ ... 세속 지배자들이 그의 교의를 환영한 이유는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3/... 가톨릭이 재통합에 실패한 것은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원인은 있다. 교회의 운명이 오스트리아 왕실과 긴밀하게 얽히면서 왕실의 영토 욕심이 가톨릭교회를 옹호했어야 할 세력들을 분열시켰던 것이다.


68/... 자기편이 아니면 전부 적이라고 공언하는 데다 황제의 칙령까지 무시하는 칼뱅파의 태도는 가톨릭만이 아니라 루터파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87/ 슈타이어마르크의 페르디난트는 차기 황제 후보였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독일의 자유세력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101/... 1609년 황제 루돌프 2세(Rudof II, 1552-1612)가 신교에 대한 관용을 취소하려 하자 신교 세력만이 아니라 가톨릭 귀족들도 특권의 침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105/ 원래 보헤미아의 지배자를 선출하는 문제는 보헤미아인들만의 관심사여야 했다... 보헤미아인들은 국내정치에 관심을 둔 반면, 다른 나라들은 황제를 선출할 한 표가 누구에게로 가는가에 관심을 보였다.


139/...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보헤미아 왕위를 수락한 일일 것이다. 보헤미아 왕위를 수락함으로써... 신교 독일의 이해관계에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적대적인 유럽세력들의 이해관계를 결합시켰다...


Note:

아주 자세하게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지치지도 않게 적어놓은 책이다. 예전에 밑줄 그은 것을 보니, 내가 어떻게 이 책을 다 읽었는지 신기하다. 밑줄 그은 것을 옮겨적는 것도 지루해서 본문 끝이 642쪽까지인데, 예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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