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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l 14. 2023

과학사의 뒷얘기

썻클리프 & 썻클리프

I 화학


1. 유리를 만드는 기술


페니키아인의 유리 발견의 전설


유리의 우연한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플리니우스가 <박물지Natural History> 속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천연소다를 실은 한 척의 배가 페니키아로 돌아와서 선원들은 베르스강 근처의 좁고 긴 사주에 상륙하여 식사준비에 들어갔는데 이 해안은 모래뿐이어서 냄비를 걸어놓을 돌이 하나도 없었다. 선원들은 할수없이 배에서 소다 덩어리를 몇 개 가져와서 그 위에 냄비를 걸었다. 냄비 밑에 모닥불을 활활 피우고 있는 동안 그들은 이상한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본 일조차 없었던 투명한 액체가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의 열기가 소다와 모래에 작용해서 생긴 것이었다. 이 투명한 액체는 녹은 유리인 것이다.'


4. 수도승과 화약


베르톨트 슈바르츠Berthold Schwartz는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승으로서 14세기경 독일의 뉘른베르크 또는 프라이부르크에 살고 있었다... 베르톨트는 수도원 부근에 사는 주민들을 위해서 언제나 환자들의 약을 조제해주고 있었다.


어느때 황과 초석硝石(질산칼륨)과 숯을 섞은 약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 그는 이것들을 모르타르(약절구)에 차례차례로 넣어서 가루로 빻은 다음 조심스럽게 섞었을 것이다. 그는 모르타르에 그것을 넣은 채 커다란 둥근 돌을 뚜껑 대신 그 위에 얹어두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조금 지나서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등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부싯돌을 탁탁 쳤더니 불꽃이 몇 개 튕겨서 모르타르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 있던 것에 불이 당겨져 순식간에 쾅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돌은 무서운 힘으로 튕겨 올라가 지붕을 뚫고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베르톨트가 심한 충격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모르타르 속은 텅 비었고 머리 위의 지붕에는 돌이 꿰뚫고 나간 둥그런 큰 구멍이 뻐끔 뚫어져 있었다.


구트만이라는 포학砲學의 전문가는 1354년 5월 17일자 프랑스 조폐국의 공보를 인용하고 있다. 이것에 의하면 프랑스 국왕은 대포가 독일에서 베르톨트 슈바르츠라는 수도승에 의해서 발명되었다고 명백히 언급한 다음 조폐국장에게 대포를 만드는 데 어떤 금속이 필요한가를 조사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II 물리학


4. 자침磁針의 뜻밖의 동작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금요일에 인도를 향해서 출발을 했는데... 그는 먼저 카나리아제도(Canarias)를 향해서 항해했었으며... 카나리아에서 3주 동안 머물고서 9월 6일에는 이곳을 출범出帆하여 아직 누구도 들어가 보지 않은 광대한 대양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3일째 육지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육지의 끝이 보이지 않게 되자 선원들은 기가 푹 죽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바다의 사나이들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큰소리로 엉엉 울어대는 것이었다...'


카나리아제도를 출발해서 어느듯 1주일이 경과했을 때 콜럼버스는 나침반의 자침이 예상하지 않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아침에는 바늘이 여느때보다 더욱 편위偏位된 것을 보고 더욱 놀라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들은 자침의 이상을 보고 극도로 화를 냈다. 동시에 겁도 났으므로 콜럼버스를 배 밖으로 던져버릴까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반항적이 되어 몇 번이고 에스파냐로 되돌아가자고 외쳤다.'


'9월 13일 저녁때 그(콜럼버스)는 자침이 북동쪽으로 반눈금 편위한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새벽에는 또 반눈금 편위한 것을 보았다... 그로부터 3일후 배가 또 100리그(league, 약 3마일) 정도 전진했을 때 다시 놀랐다. 그 까닭은 밤에는 자침이 북동쪽으로 약 한 눈금 편위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바로 북극성쪽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5. 갈릴레오와 사탑斜塔


1590년 당시 25세의 청년으로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피사 대학 수학강사로 있던 갈릴레오는 물체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속도에 관해서 공개실험을 하기로 작정했다.


갈릴레오와 사탑의 이야기는 과학사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여러가지 이유에서 이것이 조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 갈릴레오 이전에 몇 사람이 물체는 무게에 비례하는 속도로 낙하한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공격한 적이 있음이 명백히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또 갈릴레오가 했다고 하는 실험과 꼭같은 실험을 1590년보다 앞서 브루헤스(Bruges)의 시몬 스테빈(Simon Stevin, 1548-1620)이란 사람이 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스테빈은 뛰어난 군사기술자로서 네덜란드 육군경리감이 되었다...

스테빈은 그 유명한 실험을 할 적에 동료였던 데 그로트Johan Cornets de Groot(1554-1640)의 도움을 받았다. 둘은 두 개의 납공(한 쪽이 다른 것보다 10배나 무거운 것)을 2층 창문에서 동시에 따에 깔아둔 두꺼운 나무판자를 향해서 떨어뜨렸다... 두 개가 창 밑 판자에 <꼭같이> 동시에 떨어져서 소리가 단 한 번 들렸다.


이 실험이 행해진 것은 1587년이지만 갈릴레오가 그것을 알고 있었던 증거는 없는 것 같다...



III. 생물학/의학


6. 뚜껑 달린 위


... 1750년쯤 어떤 프랑스사람이 새를 가지고 실험하였을 때였다. 그는 새의 위에서 액을 조금 취해서 시험관에 넣었다. 여기에 여러가지 종류의 음식을 넣어 보았더니 위액이 그 대부분을 녹이고 말았다. 그후 이탈리아의 과학자는 다른 실험을 해서 위액이 위 자체로부터 분비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1822년에 무서운 사고가 일어나 이것이 후에 소화과정에 관한 지식을 훨씬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사고가 일어난 곳은 미시건호Lake Michigan와 휴런호Lake Huron의 두 큰 호수에서의 수로가 연결되는 곳에 있는 매키낵Mackinac이라는 마을이었다. 매키낵은 당시 <어메리컨모피회사American Fur Company>의 거래소였다...

1822년 6월 이 마을에는 겨울 동안에 잡은 동물의 생피生皮, 모피 등을 거래하려는 포수나 덫사냥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산탄총散彈銃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잘못 발사되엇 재어있던 탄환이 모조리 알렉시스 쌩 마르탱의 몸속으로 박혔다...'


... 어쨌든 1발의 대형산탄은 근육을 긁어내고 어른의 머리보다 더 큰 구멍을 만들었다. 이것은 제6근골의 일부를 날려보내고 다른 늑골에도 금을 가게 하였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죽지 않았다. 1년 동안이나 계속된 길고도 신중한 치료를 받고 그는 기적적으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총구멍은 막히지 않았고, 둘레 약 6cm나 되는 구멍을 남겼다. 붕대나 압박대로 덮지 않으면 위속에 들어가 있는 음식이 이 구멍에서 스며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자연의 자비로운 도움에 의해서' 위의 내면의 막이 성장하여 구멍의 윗면을 덮어 일종의 뚜껑을 만들었다. 이 뚜꺼은 위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였는데 한편 손가락으로 누르면 간단히 안쪽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뚜껑을 밀어넣었을 때 보먼트 박사는 위胃의 내부를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7. 석유 - 옛날에는 약, 지금은 연료


... 인디언들은 원유를 모아 류머티즘 치료용의 바르는 약으로 사용하였다... 19세기 초에는 일부 미국사람들도 이것을 약으로 사용하였고 세네카Seneca유油라고 불렀다. 이 이름이 쓰인 것은 아마도 세네카족 인디언이 그것을 사용하였든가 혹은 세네카호Laek Seneca 근처의 물에서 산출되었기 때문이리라.

  

15. 도살장과 전장에서 비료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우연한 관찰이 뼈를 비료로 사용하게 한 실마리가 됐다고 한다. 18세기에 셰필드Sheffield에서 칼을 만드는 공업이 번창해서 칼자루를 만들기 위해 뼈, 뿔, 상아 따위가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뼈나 뿔을 세공할 때에 생기는 부스러기들과 불규칙하게 생긴 뼈나 뿔의 조각들이 어느 사이에 세공사의 가게 부근에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생각이 깊은 어느 관찰자는 이러한 뼈 부스러기의 산더미 부근에서는 다른 데와 비교해서 잡초가 지나칠 만큼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는 데 주목하였다... 그래서 이 버려진 뼈를 약간 가지고 가서 자기 밭에 뿌려 봤다. 과연 작물들은 뼈가 섞이지 않은 땅에서 자라는 것보다 훨씬 무성하게 성장하였다.



IV 과학적 발견


13. 정부를 위해 고무의 씨앗을 훔쳐내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두번째 항해를 할 때까지는 구세계는 고무를 알지 못했다. 서인도제도 중의 한 섬 아이티Haiti에서 콜럼버스의 부하가 원주민들이 나무의 진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 공은 실을 감아서 만든 카스티야Castile의 공보다 컸으나 더 가볍고 더 높게 튀었다.


공의 원료가 되는 나무진은... 뒤에 '라텍스lartex'라 불리우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라텍스를 원시적인 외과수술이나 내복약 또는 주술의 의식이며 마술에도 사용하였다. 진 즉 생고무는 유럽에 수입되었으나 18세기말이 되어서도 거의 상품가치가 없었다. 그중 극히 희소한 용도의 하나를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y(1773-1804)가 진술하고 있다. 그는 이 물질은 '종이에 연필로 쓴 검은 자국을 지워버리는 목적에 매우 적합하다'고 하고 한 변이 약 3cm의 입방체가 '값은 3실링shilling인데 몇 해 동안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1823년에 스코틀랜드의 화학공업가 찰즈 매킨토시Charles Macintosh(1766-1843)는 염료제조용으로 대량의 암모니아가 필요하게 되어 가스공장에 살 수 있는가 어떤가를 문의하였다. 그 즈음 석탄을 건류乾溜하였을 때 가스와 코크스 외에 다음 세 가지의 물질이 얻어졌다. 암모니아의 수용액, 타르, 물과 타르 표면에 뜨는 석탄유coal oil이다.


글라스고우Glasgow가스공장 지배인은 타르와 석탄유를 함께 인수한다면 암모니아를 매킨토시에게 팔겠다고 했다. 이러한 부산물은 대량으로 나오지만 그즈음에는 소량의 타르를 조선소에서 목재에 방부제로 칠하는 외에는 사실상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보다 몇 해 전에 화학자들이 라텍스를 써서 실험하여 그것이 몇 가지 액체로 용해되는 것을 발견했다. 사들인 석탄유를 버리기 아까왔기 때문에 매킨토시는 라텍스가 여기에 용해되는 것인가 어떤가를 생각했는데 그 결과 용해되었다. 그 용액을 접시에 담아두었더니 곧 증발해버리고 접시바닥에 엷은 고무의 막이 남았다...


그는 천의 한쪽 면에 라텍스를 석탄유에 엷게 용해시킨 것을 발라서 방치하여 석탄유를 증발시켰다. 표면에 엷은 고무의 막이 남았다. 이것으로 천은 물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즉 방수성을 얻었다.


고무가 끈적끈적 붙는 것을 방지하려고 헤이워드Hayward라는 영국 사람은 가루 황을 고무층 위에 놓아보았다. 그는 먼저 황을 텔레핀유油에 녹여 그 용액을 고무막 위에 발랐다. 텔레핀유가 증발하자 고운 황가루가 층으로 되어 남아 고무의 표면을 덮었다.


1838년에 미국인 찰즈 굿이어Charles Goodyear(1800-1860)가 같은 혼합물을 써서 꼭같은 실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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