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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l 28. 2023

연금술에서 화학으로

이종필

동아사이언스, 사이언스N사피엔스, 2020.2.6.-2020.4.2.



[과학혁명의 배경]


과학혁명이란 서유럽에서 근대과학이 태동하여 형성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다. 시기로는 대체로 코페르니쿠스가 《천구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한 1543년부터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한 1687년까지에 해당한다...


먼저, 과학혁명이 일어난 첫째 사회적 배경으로는 종교개혁이 꼽힌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에 있었다. 종교개혁 자체가 유럽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지만 어쨌든 그 결과로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는 등 기독교의 사회적인 위상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시기적으로도 16세기에 접어들면 르네상스도 막바지로 치달을 때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10년 뒤인 1527년에는 신성로마제국군이 로마에 침략해 이른바 ‘로마약탈’을 일삼기도 했었다.


당시 교황이던 클레멘스 7세를 지키기 위해 스위스 근위대가 마지막 1명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구회전에 관하여》가 나온 것이 이로부터 16년 뒤이다...


과학혁명을 잉태한 둘째 배경으로는 인쇄술의 발달을 들 수 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 1450년 무렵이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세상을 바꿀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고려의 활자가 대량인쇄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량인쇄에 적합하지 않은 데에는 종이, 활자의 내구성, 문자 자체의 한계 등이 작용했다. 가령 알파벳은 문장부호를 다 포함하더라도 활자의 종류가 수십 개에 불과하다. 이에 비하면 한자는 확실히 불리하다... 정조 때의 활자인 정유자의 경우 무려 15만 개의 활자가 한 세트를 구성했다고 한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계기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대량으로 찍어서 배포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금속활자를 만들고 난 뒤에는 성경이라고 하는 훨씬 더 큰 사업아이템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남발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을 대량으로 찍어내 살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교회의 면죄부는 최소 두 번 금속활자와 인연을 맺었다. 한 번은 면죄부를 대량으로 팔아먹기 위해서, 다른 한 번은 그 면죄부 장사가 잘못되었음을 반박하기 위해서...


과학혁명의 기준이 되는 1543년이나 1687년이 각각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의 저작이 출판된 해라는 점 자체가 인쇄술의 발달이 과학혁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방증한다. 갈릴레오가 쓴 ≪두 체계의 대화≫는 초판으로 무려 천 부나 찍었다. 요즘도 과학책을 내면 보통 초판으로 2천 부 정도를 찍는데, 한국의 독서시장에서는 초판을 다 소화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과학혁명의 셋째 배경으로 기술 장인을 우대한 점을 꼽을 수 있다... 기술자가 천대받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중세 암흑기 동안 천대받던 기술 장인들을 재평가하게 되고 이들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된다. 기술 장인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들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인 그는 말 그대로 빈치 마을의 어느 공방 출신 레오나르도였다.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수많은 공방출신 천재들이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한 작품으로 수놓으면서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자신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인식도 바뀐다. 그 결과 도구의 개발과 개량, 이를 이용한 관측과 실험이 과학혁명의 토대를 쌓게 된다. 케플러의 법칙이 도출된 것은 앞선 세대였던 브라헤의 훌륭한 천문관측 기구를 활용한 방대하고도 꼼꼼한 관측 자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손재주가 좋아 직접 고배율 망원경을 만들었고 각종 실험기구를 직접 제작해 정량적이고 수학적인 자연의 법칙을 추구하자고 했다. 도구의 개발과 실험은 근대적인 화학이 탄생하는 데에도 (물론 연금술을 거치기는 했으나) 큰 역할을 했다.


기술 장인의 연원은 저 멀리 헬레니즘 시절의 아르키메데스까지 올라간다. 부력의 원리와 ‘유레카’로 유명한 아르키메데스는 최초의 수리물리학자이면서 기계공학자로 꼽힌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수리적 지식을 활용해 기중기와 펌프, 군함 등 실생활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설계하고 만들었다. 르네상스 시기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발견을 통해 다시 조명된 인물 중에는 아르키메데스도 있었다. 아르키메데스의 사례는 르네상스 시대 기술 장인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도 인쇄술은 큰 힘을 발휘했다. 자기들만의 전문지식을 실용서로 펴내기도 하고 이를 교재로 장인들에 대한 전문교육도 가능해졌다.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된 장인들은 자기들만의 교육체계(기술 또는 예술 아카데미)를 만들어 인재를 길러내기도 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일본의 과학사가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르네상스와 과학혁명기 중간의 16세기에 주목해 따로 ‘16세기 문화혁명’이라는 시기를 구분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기술 장인들이 현장에서 축적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로 무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들과 전통적인 지식인들이 상호접근하면서 지식 세계의 새로운 지형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17세기 과학혁명은 16세기 문화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논리이다.


과학혁명의 넷째 배경을 꼽자면 새로운 사유방식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서로 상반된 접근법을 들고 나온 영국의 베이컨과 프랑스의 데카르트가 대표 주자들이다.


갈릴레오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신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비판하며 귀납법이야말로 새로운 지식을 얻는 참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먼저 아무런 편견 없이 중립적인 태도로 관찰과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 다음, 이로부터 귀납적으로 일반화된 법칙을 이끌어낸다. 이로부터 새로운 결과를 예측하고 다시 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근대과학이 성립되는 과정을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대와 중세 2천 년을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를 깨부수는 과정이었다.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거부하며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베이컨의 가르침에 가장 잘 맞는 사례로는 케플러의 행성법칙이 있다.  다만 과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과학은 귀납의 방법으로만 발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납법이 작동한 사례는 극히 드물 정도이다. 또한 베이컨은 경험주의자답게 수학의 가치도 낮게 평가했다.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다고 말했던 동시대의 갈릴레오가 무척 섭섭했을 것이다. 베이컨은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네 가지 나쁜 습관을 네 가지 우상으로 표현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 감각과 이성의 불완전함을, 동굴의 우상은 개인적 편견을, 시장의 우상은 언어의 오남용을, 극장의 우상은 특정 체계(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같은)에 대한 맹신을 뜻한다.


베이컨의 또 다른 저작인 《새로운 아틀란티스》에는 국가가 지원하는 학술기관인 ‘살로몬의 집’이 나온다. 상상 속의 섬인 아틀란티스는 베이컨 식의 이상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살로몬의 집은 말하자면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연구기관으로 훗날 영국의 왕립학회 같은 과학단체의 원형이 되었다.


베이컨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은 베이컨과는 정반대로 연역적이다. 그의 대표저작인 《방법서설》에 드러난 사유방식은 방법론적 회의론으로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철학의 확고한 기초를 세우려면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의심해 나가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한계에 도달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의심하는 자기 자신의 존재이다. 이때 나라는 존재는 물질적인 육체라기보다 사유하는 정신으로서의 나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위대한 명제가 성립한다.


인간의 불확실한 감각경험은 데카르트의 회의를 빠져나갈 수 없다. 감각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 또는 이성의 활동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믿을만한 것은 기하학적 공리 같은 수학적인 지식이다. 즉,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로부터 시작해 수학에 토대를 둔 명징한 지식 체계를 쌓아 올리면 확고한 철학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베이컨과 정반대라 한 쪽의 장점이 다른 쪽의 단점이 되는 그런 상보적인 짝과도 같다. 과학 활동이란 참 복잡 미묘해서 베이컨 식의 귀납주의만으로도 데카르트 식의 연역주의만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후로도 영국은 대체로 경험주의나 귀납주의가 득세를 하고 대륙의 프랑스는 수학 중심의 연역주의가 발전한 것은 흥미롭다. 수학자로서의 데카르트는 좌표계를 도입해 해석기하학을 창시했다. '데카르트 좌표계'는 지금도 가장 흔히 쓰이는 좌표계이다. 그냥 기하학이라고 하면 한 마디로 말해 주로 그림만으로 수학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꼭 이런 방식이다. 해석기하란 도형의 각 요소에 좌표를 부여해 대수적으로 수학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그의 후손들은 18~9세기 프랑스에서 뉴턴역학을 수학적으로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시 정리하기에 이른다. 현실감각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려면 역시나 수학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스승이었던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그랬듯이, 수학의 언어로 우주를 보려고 했었다. 이후의 세상은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년왕국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와중에 아리스토텔레스 체제를 대신할 패러다임으로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대안은 바로 플라톤이었다. 아주 후대인 르네상스 시절에 다시 플라톤주의가 부흥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체제에 대한 반발이었고 수학적 질서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주요한 흐름이었다.


지금 우리가 과학하면 떠올리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실험과 수학이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이 두 심상에 대한 원조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혁명기의 한가운데에 이 둘이 존재했었음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과학혁명과 뉴턴주의]


혁명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의 사변이 있으면 대개 그 사변을 가능하게 만든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을 따지게 마련이다. 과학혁명도 예외는 아니다. 내적 요인이란 과학혁명을 주도했던 주요 과학자들의 천재적인 재능이다. 외적 요인이란 과학혁명기 무렵의 사회적인 배경이다. 먼저 1930년대까지는 외적 요인을 강조하는 견해가 우세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 일본의 오구라 긴노스케, 소련의 보리스 게슨 등이 이런 입장이었다.


... 특히 머튼은 과학사회학의 창시자로서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주의, 항해술, 전쟁 등이 과학혁명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 출신의 과학사학자인 알렉상드르 코이레는 당대 과학자들의 천재성과 지적 태도의 변화를 과학혁명의 주요인으로 꼽았다. 내적 요인이 지배적이라면 사회에 대한 과학의 상대적인 자율성과 독립성이 중요해진다. 나는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 당연히 내적 요인에 더 마음이 끌린다. 물론 천재들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느냐, 천재들만 있으면 다 되는 거냐 라는 물음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당연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배경은 어디까지나 배경일 뿐이다. 과학 자체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지 않고서 과학혁명의 원인이나 성공비결을 따진다면 그것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로 운동법칙을 구축하고 태양계 행성운동 등을 성공적으로 설명하자 뉴턴의 방법론을 따라 다른 분야에도 적용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다. 이를 뉴턴주의라고 부른다. 1784년 발견한 쿨롱의 법칙은 전기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법칙으로서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역제곱의 법칙이다. 전기력이나 자기력도 중력과 마찬가지로 원격작용이므로 당연하게도 만유인력의 법칙을 벤치마킹했을 것이다. 심지어 화학현상에서 물질 간 화학결합의 차이를 화학 친화도의 차이로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 개념 또한 근거리 인력으로서 만유인력에서 차용한 개념이다. 한편 뉴턴은 빛 또한 아주 미세한 입자라고 여길 정도로 입자론의 신봉자였는데 (뉴턴역학의 기본개념은 점입자의 운동이다.) 이런 경향은 열 현상에도 도입되어 칼로릭(caloric)이라는 질량이 없는 입자로 열 현상과 연소 현상을 설명하기에 이른다. 열소라고도 부르는 칼로릭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18세기 화학혁명을 주도했던 프랑스의 라부아지에였다.


뉴턴역학이 프랑스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대략 1730년 무렵으로, 뉴턴의 사망연도(1727년)와 그리 멀지는 않으나 《프린키피아》의 출판연도(1687)를 생각해 보면 아주 빠르다고는 할 수 없다. 뉴턴역학을 프랑스에 소개한 대표적인 인물은 다소 의외로 프랑스 계몽주의의 화신이라 불리는 프랑수아 볼테르였다. 볼테르는 1725년부터 영국으로 망명해 29년까지 영국에서 지냈다. 볼테르는 1727년 뉴턴의 장례식에 참석해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 출신의 산수 좀 잘 하는 교수가 죽었는데 국장을 치르고 온 나라가 애도하며 명사들만 모신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었으니 이방인의 눈에는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볼테르가 수학적 재능은 없었으나 영국에서 직접 뉴턴을 겪었기 때문에 뉴턴이 남긴 과학적 성과와 의미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물론 볼테르는 사상가로서 당시 영국의 정치와 종교, 사회체제 등도 자세히 살펴보았겠지만 전에 없던 과학과 과학자의 역할이 분명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볼테르는 프랑스로 돌아가 《철학적 편지들》, 《뉴턴 철학의 요소들》을 저술해 프랑스에 뉴턴을 소개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뉴턴 과학의 성공이 다른 분야에도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예시와도 같았다. 뉴턴주의에는 가설이나 독단이 배제되고 수학적, 합리적, 경험적, 실험적 방법만이 작동한다. 이와 같은 방법론이 다른 사회분야로 확산돼 철학적이고 공론적이며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배격한다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끝없는 믿음이 깔려 있다. 당시 프랑스에는 볼테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꽤 있었다. 디드로, 달랑베르 등은 《백과전서》 출판을 주도하며 프랑스 계몽주의를 이끌었다. 《백과전서》에는 뉴턴주의와 과학, 기술 등이 많이 소개되었다.


볼테르는 수학에 젬병이었기 때문에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볼테르를 도와줬던 게 그의 연인이었던 에밀 드 샤틀레 부인이었다. 샤틀레는 최초의 근대적인 여성과학자라 꼽을 만한 인물이다. 그의 남편이 백작이어서 신분도 높았고 재산도 많았다. 남편도 바깥으로만 나돌아서 샤틀레도 자기만의 사생활을 즐겼는데 그 연인 중 한 명이 볼테르였다. 샤틀레는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에 능통했고 수학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언어와 수학 모두에서 능력이 출중했기에 샤틀레는 《프린키피아》를 번역하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샤틀레는 《오이디푸스》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볼테르가 뉴턴을 이해하는 데에는 샤틀레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샤틀레는 남편 소유의 지방 성 하나를 통째로 연구실과 도서관으로 꾸며 사교와 과학연구의 장으로 활용했다. 일화에 따르면 장서를 구매할 돈이 떨어지면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십분 발휘해 도박판에서 큰돈을 벌어 책을 구매했다고 한다...



[금대신 약을 만든 파라켈수스, 연금술의 새 장 열다]


연금술이라고 하면 흔히 중세와 중세의 연금술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연금술 연원은 그보다 훨씬 오래됐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의 야금술에까지 연줄이 닿는다. 야금술이란 광석에서 금속을 뽑아내는 기술이다. 바빌로니아의 야금술은 기원전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미 금, 은 구리, 납, 철 등을 다루었다.


연금술은 물론 납이나 구리 같은 흔한 금속으로부터 금, 은 같은 귀금속을 만드는 기술이다. 범위를 좀 더 넓히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하는 영약을 만드는 것도 연금술사들의 목적이었다. 동양의 장생불로초와 거의 똑같다. 금과 영약 제조를 한꺼번에 가능하게 하는 마스터키가 있었으니 바로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이다. 현자의 돌은 형상변화의 능력을 지닌 신비한 돌이다. 한편 금이나 영약에만 매달리는 것은 연금술을 너무 세속적으로만 받아들인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연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정신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인데 이를 비유적으로 금속의 형상변화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연금술의 이론적인 ‘원흉’은 이미 소개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 즉 흙, 물, 불, 공기가 각각 가진 성질이 바뀌면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환된다. 언제나 느끼는 사실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는 시대를 앞서서 너무나 똑똑했다는 점이다. 근대적인 화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연금술은 한 마디로 사이비 유사과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쨌든 구리나 납으로 금을 만들지 못했으니 연금술은 실패한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다.


연금술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선배는 따로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자비르 이븐 하이얀(721~815)이 그 주인공이다. 이슬람 과학에서도 소개했듯이 자비르는 황과 수은의 적절한 조합으로 어떤 금속이든 (금을 포함해서) 만들 수 있다는 황-수은설을 주창했다. 자비르는 이슬람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자비르는 약재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우마이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 세력이 교체되는 시기였다. 자비르의 부친은 페르시아 지역에서 새로이 떠오르는 바르마크 가문과 동맹을 맺었고 결국 새 왕조 건설에 공헌하게 된다.


연금술 자체가 신비주의의 일종이므로 연금술사들이 여타의 신비주의나 마법 등에 관심이 많았다. 자비르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설에 따르면 자비르는 인공의 생명체를 창조하려고 했었다. 이 전통이 훗날 유럽의 파우스트 전설이나 프랑켄슈타인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신비주의의 대표적인 흐름을 수피즘이라고 한다. 수피즘은 외형적인 율법이나 의례보다 금욕주의적인 인간 내면의 변화로 알라와의 합일에 다가갈 수 있다는 신비주의 교리이다. 수피즘의 어원은 양모의 아랍어인 수프이다. 초기 수도자들이 양털옷을 입고 금욕주의적인 고행을 한 데서 유래했다. 인공의 생명체를 만들려는 자비르의 시도도 수피즘의 신비주의적 은유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비르의 신비주의는 자신의 저작에서 암호화 내지 기호화된 표현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자비르가 이단으로 몰리는 걸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여기서 유래한 단어가 ‘gibberish’이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횡설수설”이라는 뜻이다.  


자비르가 신비주의에만 빠져 황과 수은으로 금만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연금술사라고 하면 괴짜 마법술사의 이미지가 강한데, 자비르는 ‘아랍 화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근대과학의 토대와 연결되는 업적도 많이 남겼다. 특히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증류기, 저울 등도 만들었다. 정밀한 저울은 화학반응 전후의 물질의 양을 측정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장비로서 정밀한 정량화학이 확립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자비르는 또한 염산, 질산, 왕수 등도 발견했고 알칼리라는 단어와 개념도 도입했다.


알칼리(alkali), 알코올(alcohol), 연금술(alchemy) 등의 용어들은 모두 아랍어에서 유래한 단어들이다. ‘알(al)’은 아랍어의 정관사이다. 실험을 대하는 자비르의 태도는 다음 글에서 잘 나타나 있다.  


“화학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자신이 직접 실제로 연구와 실험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실질적 연구나 실험을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전문적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실험을 통해 지식을 얻도록 하라. 과학자란 자료의 풍부함에 기뻐할 게 아니라 오직 실험 방법이 우수할 때만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자비르는 일생에 걸쳐 200권이 넘는 책을 썼다. 왕조의 후원을 받으며 눈부신 업적을 남긴 자비르였으나 말년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가택에 연금되었다가 생을 마쳤다. 자비르의 명성이 워낙 자자해서 훗날 14세기 유럽에서는 게버(Geber)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중세 유럽의 교회는 연금술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연금술이 중세 유럽에 소개된 계기는 다른 이슬람 문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12세기 르네상스 때의 대규모 번역작업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의 톨레도 지역을 기독교가 장악하면서 엄청난 양의 이슬람 문명이 중세 유럽으로 흘러들었다. 이 과정에서 라틴어로의 번역은 필수였다. 어쨌든 연금술은 동양으로 치면 도술이나 마법에 가까운 전통이어서 아무래도 유일신 종교와 궁합이 잘 맞지는 않아 보인다. 실제 14세기의 교황 요한 22세는 교령으로 연금술을 금지했고 샤르 5세는 연금술 관련 기구의 소유를 금지했다. 그렇다고 해서 형상 변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금을 만들고 싶은 욕망을 모두 억누를 수는 없었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연금술사를 꼽으라면 16세기에 활동한 파라켈수스(1493~1541)를 빼놓을 수 없다. 파라켈수스(1493~1541). 그의 본명은 필리푸스 아우레올루스 테오프라스투스 봄바스투스 폰 호헨하임(Philippus Aureolus Theophrastus Bombastus von Hohenheim)으로 꽤 길다.


파라켈수스가 당대 가장 위대한 연금술사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연금술의 새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다른 연금술사들이 금을 찾아 헤맬 때 파라켈수스는 ‘약’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파라켈수스는 연금술사이면서 의학자였다. 의학자가 약을 만든 게 뭐 그리 대단할까 싶은데, 파라켈수스는 그 선배들처럼 약초로 약을 만든 게 아니라 합성화합물로 광물성 약을 제조했다. 그래서 파라켈수스를 의약화학이나 치료화학, 또는 독극물학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파라켈수스는 그때까지 유럽 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이슬람의 위대한 학자 이븐 시나(980~1037)가 쓴 《의학정전》을 불사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 따위 책은 개나 줘 버려, 이런 셈이다. 이븐 시나는 따로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슬람의 아리스토텔레스로 불리는 사람이다. 《의학정전》은 17세기까지 유럽의학의 기본서였다. 이븐 시나의 의학도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에서 로마 시절의 갈레노스로 이어지는 전통과 맞닿아 기본적으로 4체액설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여기에 차갑고 덥고 건조하고 습한 한열조습에 따른 체질을 강조했다.


파라켈수스는 4원소설을 깨고 염(소금)의 원리, 황의 원리, 수은의 원리로 구성된 3원리설을 주창했다. 염은 4원소 중의 흙, 황은 불, 수은은 물에 해당한다. 한편 황과 수은은 자비르 이븐 하이얀이 황-수은설에서 즐겨 썼던 소재니까 파라켈수스는 그때까지 유럽에 통용되던 여러 요소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조합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3원리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자신이 말했던 광물성 합성화합물인 ’의약품’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연금술과 근대화학, 의학과 화학의 연결점이 생긴다.  


파라켈수스의 3원리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탈이 나서 설사를 계속하는 환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설사는 세 원리 중 유동적인 수은의 원리에 가깝다. 이런 환자에게 수은의 원리가 많이 들어가 있는 약을 처방하면 안 된다. 안정적이고 고형적인 성질을 가진 염의 원리가 충만한 약을 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는 황의 원리를 멀리해야 할 것이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파라켈수스의 처방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던 여인에게 수은 함유 구토제를 두 번 먹였더니 길이가 2m나 되는 테니암(Theniam)이라는 기생충을 토하고 나았다.” (수은의 원리)


“18세 소년이 이를 뽑고 세 달 후, 이 뽑은 자리에 검은 물집이 생겼는데, 매일 황산을 발라주었더니 물집이 사라지고 새 이가 났다.” (황의 원리)


“수년간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던 사람을 두개골을 열어 치료했다. 뇌떨림은 이 방법과 함께 바질즙에 소금 기름을 넣어 마시게 함으로써 치료하였다.” (염의 원리)



[기체화학과 플로기스톤]


“연금술은 아마도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원 어딘가에 금을 묻어두었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땅을 파서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포도뿌리를 덮고 있던 흙무더기를 헤쳐 놓아 풍성한 포도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금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유용한 발명과 유익한 실험들을 가져다줬다.”


파라켈수스가 사망한지 20년 뒤에 태어난 프랜시스 베이컨이 연금술을 평가하며 비유적으로 했던 말이다. 화학과 연금술의 관계, 또는 연금술이 근대 화학의 발달에 끼친 영향을 가장 적절하게 비유한 말이지 않을까 싶다. 연금술이 근대화학의 탄생에 기여한 바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다양한 물질을 연구하고 다루는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알코올, 아세트산, 에테르, 질산, 황산 등을 알게 되었다. 둘째, 수많은 실험도구를 발명하고 개량했다. 도가니, 천칭, 증류기, 플라스크, 시약병 등이 그 결과물이다. 셋째, 물질을 다루는 실험기술도 좋아졌다. 증발, 증류, 침전 등 화학실험의 기본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연금술과의 결별을 선언한 최초의 과학자는 영국의 로버트 보일(1627-1691)이었다. 보일은 1661년에 쓴 《회의적인 화학자》에서 케미스트리(chemistry)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연금술(alchemy)에서 화학으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보일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파라켈수스를 비판하며 새로이 원소 개념을 도입했다.


원소는 가장 원초적인 물질로서 두 원소가 결합해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고, 이는 다시 원래 원소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근대적인 원소의 개념과 아주 비슷하다. 보일의 아이디어는 화학의 가장 기본인 결합과 분리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보일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기체의 부피와 압력에 관한 보일의 법칙이다. 즉, 온도가 일정할 때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 또는 일정한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와 압력의 곱은 항상 일정하다. 보일의 법칙은 기체의 성질에 관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이 되는 정리이다.


보일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진공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이탈리아의 토리첼리는 수은을 가득 채운 유리관을 수은이 담긴 그릇에 거꾸로 세우는 실험을 했다(1643년). 유리관 속의 수은은 중력 때문에 수은이 담긴 그릇으로 흘러나오지만 대기압이 그릇의 수은에 작용해서 유리관의 모든 수은이 빠져나오지 않고 약 76cm의 높이를 유지한다. 유리관 속의 그 이상의 공간은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다. 즉 진공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독일에서는 게리케가 공기펌프를 만들어 진공실험을 했다. 게리케는 금속으로 만든 지름 40cm의 두 반구를 합친 뒤 공기펌프를 이용해 그 안의 공기를 빼냈다. 이렇게 합쳐진 두 반구를 다시 떼어내기 위해 말 8마리가 서로 양쪽에서 잡아 당겨야만 했다. 보일은 그의 조수였던 유명한 훅과 함께 공기펌프를 만들어서 공기와 진공, 연소, 호흡 등의 문제를 연구했다.  


연금술과 화학의 경계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연소 문제였다. 나무에는 불이 잘 붙는데 돌이나 금속에는 왜 불이 잘 붙지 않을까? 연금술사가 아니라도 일상에서 누구나 궁금증을 가질 만한 문제이다. 보일은 진공 상태에서 동물이 죽고 촛불도 꺼진다는 점에 착안해 호흡과 연소는 같은 반응일 것이라 생각했다.


자비르는 황-수은설을 제기했고 파라켈수스는 3원리설에서 황의 원리를 소개했듯이 연금술에서 불은 황과 관계가 있다. 지옥의 불구덩이하면 유황이 즉시 떠오르듯 황은 불의 원소이다.


독일의 연금술사 베허는 파라켈수스의 3원리설을 4원소 중의 하나인 흙에 적용해 흙을 3원리에 따라 분류했다. 즉, 염의 원리가 작동하는 테라 라피다, 황의 원리가 작동하는 테라 핑귀스, 그리고 수은의 원리가 작동하는 테라 메르쿠리알리스가 있다. 쉽게 말해 딱딱한 흙, 기름기 있는 흙, 유동적인 흙이라는 말이다. 베허는 테라 핑귀스, 즉 기름기 있는 흙이 연소할 때 방출된다고 생각했다.


베허의 제자였던 슈탈은 스승의 이론을 이어받아 좀 더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슈탈은 테라 핑귀스에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아주 멋진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 말로 플록스(phlox)는 불꽃이라는 뜻이다. 이로써 연소에 관한 ‘아주 정교한 잘못된 이론’이 성립되었다.


플로지스톤은 한 마디로 ‘연소 입자’라고 할 수 있다. 플로지스톤으로 연소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떤 물질에 플로지스톤이 많으면 불에 잘 탄다. 왜냐하면 플로지스톤은 연소입자이니까. 나무에는 플로지스톤이 많다. 나무에 불이 붙으면 나무속의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다. 연소, 즉 불에 탄다는 것은 어떤 물질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현상이다. 돌이나 금속에는 플로지스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잘 안 탄다. 그러나 플로지스톤이 많이 함유된 숯을 광석과 함께 넣고 태우면 숯의 플로지스톤이 광석으로 옮겨 가 금속이 생긴다(야금).


플로지스톤 이론에도 약점은 있었다. 나무든 금속이든 뭔가를 태우면 그 속의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다. 그렇다면 연소 이후에는 원래 물질의 질량이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금속을 태우고 남은 재의 질량을 재어봤더니 오히려 질량이 늘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플로지스톤 옹호론자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플로지스톤에 두 가지 종류가 있어서 한 종류는 양의 질량을 가졌고 다른 하나는 음의 질량을 가졌다는 것이다. 금속에 함유된 플로지스톤은 당연히 음의 질량을 가졌을 것이다.


20세기 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폴 디랙이라는 천재적인 물리학자가 자신의 이름이 붙은 ‘디랙 방정식’을 만들었을 때 그 방정식에서 이상한 풀이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디랙은 그 이상한 풀이를 음의 에너지를 가진 입자로 해석했다. 나중에서야 음의 에너지를 가진 입자가 아니라 전기전하가 반대인 입자의 풀이임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반입자의 존재를 예측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음의 질량을 가진 플로지스톤이라는 해석을 마냥 비웃을 일이 아니다. 보일조차도 연소 과정에서 ‘불의 입자’가 금속 안으로 들어가서 질량이 증가했다고 해석했다.


이렇게 플로지스톤 이론은 18세기 말까지 100년을 풍미했다.


여기서 두 가지 주목할 사항이 있다. 첫째, 정량분석의 중요성이다. 반응 전후에 질량이 늘었는지 줄었는지, 그 정도는 얼마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플로지스톤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정밀도의 정량분석이 일찍이 가능했다면 플로지스톤 이론의 수명이 좀 더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둘째, 기체 연구의 필요성이다. 연소반응은 어쨌든 그 과정에서 기체를 수반하므로 기체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증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다양한 기체들이 속속 발견되었고 수상치환법 등 기체를 포집하는 방법들도 개발되었다.


이 두 가지 사항에서 큰 획을 그은 사람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조지프 블랙(1728~1799년)이다. 블랙은 글래스고 대학에서 부친의 뜻에 따라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의사시험을 통과한 뒤에는 에든버러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때 블랙은 석회석(CaCO3)을 가열하면 생석회(CaO)가 만들어지고 질량이 줄어든다는 점에 착안해 석회석에 고정돼 있던 어떤 공기(‘고정공기’)가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이 공기가 바로 이산화탄소이다. 블랙은 개량천칭을 사용해 실험의 모든 단계에서 질량을 측정했다. 질량측정이나 시약의 순도에 무척 엄격했던 블랙은 정량화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다.


과학에서 정량분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량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현상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험결과의 재현과 검증은 과학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블랙은 이산화탄소의 성질을 연구했고 이 모든 성과를 논문으로 작성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블랙은 또한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데에 필요한 열인 잠열과, 특정양의 물질을 특정 온도로 올리는 데에 필요한 열량인 비열의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블랙의 연구 덕분에 엠페도클레스 이래 단일한 물질로 인식되었던 공기가 사실은 다른 여러 기체(또는 여러 종류의 공기)의 혼합물이라는 단서를 확보하게 되었다.


실제로 블랙의 제자였던 다니엘 러더퍼드는 질소를 발견했고(1772년), 헨리 캐번디시는 수소를 발견했다(1766년). 하지만 캐번디시나 러더퍼드도 여전히 플로지스톤의 패러다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발견한 결과물도 플로지스톤의 이론 속에서 이해했다. 특히 수소는 불에 매우 잘 타니까 캐번디시는 자신이 플로지스톤을 추출했다고 여겼다.


조금 긴 호흡으로 보자면 보일의 법칙이 나온 게 1660년인데 각종 기체를 발견하며 기체화학이 번성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18세기였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통제 가능한 열원 때문이었다.


화학반응에는 대체로 열이 필요하다. 특히 정량적인 실험을 하려면 열량을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하고 온도의 변화도 정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 즉, 열과 관련된 기술적 진보가 뒷받침이 돼야 근대과학으로서의 화학이 탄생할 수 있었다. 18세기에는 그럴 여건이 마련되었다. 누구나 잘 알듯이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기였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과에도 불구하고 ‘화학혁명’이라 부를 만한 근본적인 변화는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플로지스톤 이론이 연소와 공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틀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공기, 즉 산소가 필요했다.



[혁명의 기수, 혁명의 제물이 되다]


누군가 기체를 발견했다는 건 어떤 기준으로 정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은 특정 기체를 성공적으로 분리해냈는가 여부이다. 둘째는 그 기체의 화학적 성질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는 그 기체의 화학적 정체성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셋째 기준은 그 기체를 발견자가 새로운 기체로 규정하는가이다...


화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체였던 산소를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분리해낸 것은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1742~1786)였다. 셸레는 어릴 때 약국 견습생으로 일했으며 거의 독학으로 화학을 연구했다. 셸레는 44세의 짧은 생애 동안 타르타르산, 벤조산, 시트르산, 젖산, 요산 등 수많은 산(acid)들을 분리했다.


시안화수소산과 최근 일본의 반도체 관련 수출규제로 유명해진 불화수소(플루오르화수소), 황화수소산 등 독성이 강한 산도 제조했다. 셸레는 자신이 다루던 화학물질을 모두 냄새 맡고 맛보던 습관이 있어서 그 때문에 일찍 사망한 것으로 (결혼한 이틀 뒤에) 추정된다. 셸레가 산소를 분리해 낸 것은 1771~1772년 무렵이다. 그러나 셸레는 산소를 새로운 기체라기보다 공기의 특정한 상태로 이해해 ‘불의 공기’라 불렀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셸레는 산소가 있으면 불이 잘 탄다는 성질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셸레도 기본적으로 플로지스톤의 패러다임 속에서 산소를 이해했다. 즉, 불의 공기는 플로지스톤을 잘 끌어내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불의 공기가 있으면 나무속의 플로지스톤에 더 잘 나온다. 그 결과 불이 더 잘 붙는다.
 
안타깝게도 셸레의 성과는 1777년에야 뒤늦게 발표됐다. 인쇄소의 실수도 한몫을 했다고 한다. 산소 발견자로 더 유명한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1733~1804)가 산소를 발견한 해가 1774년이다. 그러니까 셸레는 산소를 따로 포집하고 기본적인 성질까지 연구했으나 새로운 기체로 인식하지 못했고 또한 공식 발표마저 늦었다.


영국의 프리스틀리는 성직자이면서 영국 왕립학회 소속의 화학자로 당대에 가장 ‘잘 나가던’ 과학자였다. 프리스틀리는 1756년 에든버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주변 과학자들의 권유로 전기현상을 실험했다. 이때 프리스틀리는 전기력도 중력과 마찬가지로 역제곱의 법칙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이 공로로 1766년에 왕립학회 특별회원으로 선출된다.


전기력의 역제곱 법칙을 실험적으로 확인하고 공식화한 것은 1785년 프랑스의 샤를 드 쿨롱이었다. 전기력에 관한 역제곱 법칙은 쿨롱의 이름을 따서 쿨롱의 법칙이라 부른다.


이후 1767년부터 1773년까지 프리스틀리는 리즈에서 예배당 목사로 일했다. 이 ‘리즈 시절’에 기체와 관련된 연구를 시작했다. 마침 근처에 양조장이 있었는데 발효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그 정체는 이미 블랙이 밝힌 바 있다.)를 수상치환법으로 포집해 성질을 연구하던 중 이산화탄소가 녹은 물맛이 청량감을 높여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것이 현대적인 탄산음료의 시초였다.


프리스틀리가 분리한 기체는 10종에 이른다. 일산화탄소, 암모니아, 염화수소, 이산화황, 아산화질소 등이 포함된다. 아산화질소(N2O)는 보통 ‘웃음가스’로 알려져 있다. 흡입할 때 얼굴근육에 경련이 일어 웃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아산화질소는 마취효과가 있어 의료용 마취제로 쓰이기도 한다. 특히 치과에서 어린이용으로 사용된다. 향이 달콤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풍선에 아산화질소를 넣어 ‘해피벌룬’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환각작용 때문이다. 물론 위험한 행동이다. 중추신경마비나 호흡기 이상증세가 올 수 있다. 아산화질소는 휘핑크림을 만들 때도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피벌룬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자 2017년부터 환각물질로 지정해 함부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프리스틀리의 모든 과학 활동의 정점은 역시나 산소의 발견이다. 1774년의 일이다. 프리스틀리는 먼저 수은을 가열해서 붉은 수은재(HgO·산화수은)를 얻었다. 여기에 돋보기로 햇빛을 비추자 수은재가 다시 수은으로 돌아가면서 어떤 기체가 발생했다. 프리스틀리는 이 기체를 모아 그 성질을 연구했다. 이 기체는 양초를 더 잘 태우는 성질이 있었다. 또한 밀폐된 공간의 쥐 같은 동물이 숨을 더 잘 쉬게 해준다. 그러나 프리스틀리는 당대의 대다수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플로지스톤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 기체를 공기의 특정한 상태로 파악해 ‘탈폴로지스톤 공기’라 불렀다. 영어 접두사 ‘de'는 ’없는‘, ’결핍된‘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탈플로지스톤 공기란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라는 뜻이다. 프리스틀리는 왜 자신이 발견한 새 기체에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산소 발견의 마지막 주인공은 프랑스의 앙투안 라부아지에(1743~1793)이다.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소속의 화학자로서 영국의 프리스틀리처럼 수은재(산화수은)로부터 어떤 기체를 분리해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번번이 실험은 실패였다. 그 와중에 바다 건너 프리스틀리가 새로운 기체를 분리(1774)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해에 프리스틀리가 파리를 방문했는데 그때 라부아지에에게 자신의 실험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프리스틀리의 도움으로 라부아지에는 이듬해인 1775년 마침내 산소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라부아지에가 셸레나 프리스틀리와 달랐던 점은 플로지스톤 이론 속에서만 머물지 않고 산소를 완전히 새로운 기체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산소’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라부아지에였다(1779). 산소(oxygen)라는 말 자체가 '산(acid)을 만들어내는(gen) 기체'라는 뜻이다. 당시 라부아지에는 모든 산(acid)에 산소가 포함돼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라부아지에는 공기가 서로 다른 종류의 두 기체가 1대4의 비율로 섞여 있음을 알아냈다. 산소가 공기의 약 20%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정황적으로 헨리 캐번디시 등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캐번디시 또한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산소를 공기의 어떤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기체로 규정했기 때문에 전에 없던 새로운 연소이론이 필요했다. 라부아지에가 플로지스톤 이론에 회의를 품은 것은 그가 당시 정량화학의 정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1772년에 이미 라부아지에는 황의 연소과정에서 반응 뒤 질량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연소 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이든 뭐든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수돼야만 한다. 그 정체가 바로 산소였다. 라부아지에는 또한 연소와 동물의 호흡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규명했다. 석탄을 태우면, 즉 석탄이 산소를 흡수하면 열이 방출된다. 동물이 체온을 유지하는 것도 호흡 과정을 통해 산소를 흡수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서 열을 내는 게 아닐까?


라부아지에는 기니피그를 이용한 실험에서 호흡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조사해, 같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는 숯의 연소과정에서 나오는 열량이 기니피그 호흡 때 나오는 열량과 비슷함을 알아냈다. 이로부터 라부아지에는 호흡이란 반응이 느린 일종의 연소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포함한 동물의 생체작용도 기본적으로는 열기관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화학 원론'에 실린 라부아지에의 실험 장비


1786년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연소이론을 정리한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 이론을 극복하고 연소란 산소와의 결합과정임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던 1789년,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총망라한 《화학원론》을 출판했다. 이 책은 말하자면 라부아지에 생애가 담긴 역작이다. 제목에 ‘원론’을 넣은 이유는 《화학원론》이 저 유명한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원론》과 마찬가지로 화학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학원론》은 화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책이다. 이 책에서 라부아지에는 연소이론을 새로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주기율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원소표를 제시했고 우리에게 익숙한 화합물의 명명법을 창안했다. (화합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이름을 이용한 명명법은 이미 1787년 라부아지에가 동료 화학자들과 함께 과학아카데미에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또한 화학반응 전후의 질량보존의 법칙을 명확하게 정의했고 물리학에서처럼 방정식을 도입해 화학반응을 표기했다.


라부아지에의 한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그의 원소표에는 훗날 화합물로 밝혀진 물질들도 있었고 빛과 열의 원소에 해당하는 광소와 열소(caloric)도 포함돼 있었다. 열소는 질량이 없는 입자로서 열소의 흡수와 방출로 열 현상을 설명한다. 이처럼 조그만 입자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태도는 뉴턴의 유산이라 볼 수 있다. 19세기에 고전역학이 완성되면서 빛의 본질은 전자기 파동이고 열은 분자의 운동에너지임이 밝혀진다. 광소나 열소는 없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라부아지에는 《화학연보》라는 학술지를 창간하는 등 하나의 독립적이고 체계화된 분야로서의 근대적인 화학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로 과학혁명을 완성했듯이 라부아지에는 《화학원론》으로 화학혁명을 완성했다.


라부아지에는 1768년에 징세청부조합의 지분을 3분의 1이나 인수해 조합의 중책을 맡았다. 중책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일을 하지는 않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화학연구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라부아지에는 별 생각 없이 재산증식을 위해 재테크 수단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1794년 5월 8일 28명의 세금 징수관이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조세프 루이 라그랑주는 절친한 사이였던 라부아지에를 구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허사였다. 라그랑주가 들을 수 있었던 말은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였다고 한다.


절망에 빠진 라그랑주가 라부아지에 처형 다음날 남긴 유명한 말도 아직 전해지고 있다.

“그의 머리가 잘린 것은 한순간이지만 저런 똑똑한 머리를 만드는 데에는 100년이 걸려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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