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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Aug 15. 2023

균형의 가르침

조영필

세상은 균형의 세계이다. 질량보존의 법칙과 이를 이어받은 에너지보존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화학식에서 좌변과 우변의 등위이다. 화학반응 전과 후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 함무라비법전에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적혀있다. 우리의 윤리감각도 균형지향이다. 권선징악의 서사는 선행과 악행에 대한 적절한 균형감각의 상벌을 요구한다. 경기의 관중이 약자를 응원하는 것도 균형감각이다. 균형이 안맞으면 삼계육도*를 윤회(輪廻)해야 한다.


세상사에서 균형을 깨트리는 것은 주로 악인들의 욕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영웅이 나타나서 균형을 회복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이렇게 우리 본능에서 나오는 선과 악의 웅장한 서사이다. 그러나 선과 악이 끝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익숙한 레파토리를 깨려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새로운 가치관이 출현해야 했다. 개인적인 가치관의 새로운 전략은 ‘업(業)’을 쌓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BC 6세기에 인도에서 출현했다.


영웅이 없으면, 악인도 없다. 영웅적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악행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건을 일으키는 힘에서 가급적으로 멀어지자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오늘날에도 유력한 사고유형이다. 일례로 '묵비권'을 들 수 있다. 괜히 말을 해서 자꾸 실토를 하게 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낫다. 수행자들은 '묵언(默言)' 수행으로 이를 실천한다. 그러나 원인을 제거하려는 이러한 전략은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수준에서는 성공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므로 원인에서부터뿐만 아니라 결과에서도 불균형을 새로운 균형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은 주로 악행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AD 1세기에 지중해 동안(東岸) 레반트지역 가나안에서 출현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어주라'는 이 가르침은 그러나 따르기가 쉽지 않았다. 수많은 희생자가 산과 들을 다 덮고서야 사람들은 따르게 되었다. 쉽게 이해되고 논리적으로 따르기 쉬운 것은 생명력이 짧다. 이 가르침은 쉽게 따르기 힘들 뿐만 아니라 너무나 무수한 희생을 치루었기에 그 반대급부로 오늘날의 지배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저항에도 활용되었다. 간디의 비폭력무저항 운동은 기독교의 나라인 지배자 영국에 기독교의 해법을 역으로 적용한 것이었기에 더욱 영향력이 컸다.


중국의 사상인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중용(中庸) 또한 일종의 균형적 사고이다. 무위자연은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것 같지만, 불교에서 보는 인간 불행에 대한 체계적 원인 탐구가 없다. 우주의 조화라는 검증되지 않은 이상형을 제시하고 현실과 대조하여 그 격차를 좁히고자 하였다. 자연과의 합일은 달성하기 어려운 삶의 태도이므로 언제나 반反문명적 참신함을 보여주는 대신, 역사적 인간 문명의 새로운 시도는 시작부터 봉쇄된다. 무위자연을 하면, 모든 인공적 문명이 의미가 없어진다. 중국이 과학을 하지 못한 원인 중의 하나가 무위자연일 것이다.


중용은 가치관의 기준점이 분명치 않다. 잘 될 때는 탕평책으로 일시적 균형을 달성할 수 있지만, 그것의 원칙이 분명치 않아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울뿐인 균형이다. 오늘날 중용을 따르는 제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양비론(兩非論)'일 것이다. 옳은 곳에 공정히 힘을 보태지 못하고, 항상 양쪽을 함께 거들고 또 시비건다. 세상살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양다리 걸치기'의 질긴 몸부림을 중용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장자>외편 20 산목편(山木編)에는 '빈배(虛舟)'의 고사가 있다. 장자가 강에서 작은 배를 띄우고 쉬고 있는데 어떤 배가 부딪쳐왔다. 장자가 화가 나서 부딪쳐 온 배에 소리를 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배는 비어 있었다. 장자가 훗날 이야기한다. '그 배가 비어 있다면 아무도 그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이 고사(古事)는 무위자연과 결이 다르게 느껴지며, 불교의 '업'을 지으려 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왜 '업'을 지으려 하지 않는지 그 이유에서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벗어나 해탈을 하려는 분명한 인과적 목적이 있으나, 장자의 경우에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현세적 처신뿐이라는 것이 그 차이이다. 이러한 ‘내’가 사라진 처신주의는 이익을 다투는 사회생활에서는 지키기 힘든 생활자세이다.


그러므로 현대사회는 자연에 대해서는 과학을,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는 법치라는 합리성의 이념을 발달시켜왔다. 때로 이러한 일련의 사회적 조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기독교가 왼뺨을 내밀어 균형을 회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원망이 다 해소되지 않는 곳에서는 불교가 억겁의 윤회로써 위로해준다. 이러한 모든 정신적 물질적 세상에서 자유롭다면, 호젓한 곳에 '빈배'를 띄워놓고 풍경 속에 잠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리라.


Note:

*수레 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를 그치지 않고 돌고 도는 것이 윤회이다. 삼계육도에서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이며, 육도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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