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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Aug 04. 2024

유럽사 속의 전쟁

마이클 하워드

마이클 하워드, <유럽사 속의 전쟁>, 글항아리, 2015.6.10.



제1장 기사들의 전쟁


'봉건제'는 군사적 필요뿐만 아니라 경제적 필요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역사상 중요한 지중해의 무역지대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토막나면서 경제활동은 쇠락했고, 이는 곧 9세기가 시작될 즈음 유럽에서 正貨specie가 희귀했으며, 토지만이 유일한 부의 근원이었음을 의미했다. 이에 더해 카롤링거 가문이 맞닥뜨린 다종다양한 위협은 무엇보다 바이킹들의 긴 보트 그리고 마자르족의 작고 강한 조랑말에 맞설 기동성을 카롤링거 군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기동성은 말만이 제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8세기에 들어 鐙子가 프랑크족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면서 말은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전쟁의 수단이 되었다. 속도는 충격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더 이상 창을 던질 필요가 없었다... 기병은... 보병과 비교해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그와 같은 우위는 1000년 후 후장식breech-loading 총으로 무장한 이들이... 누렸던 우위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군사적 우세는 종국에 정치적 지배로 이어졌다.


... 866년 샤를마뉴의 손자인 대머리 왕 샤를은 자신의 수봉자들tenants-in-chief을 호출하면서 말을 타고 참석하라고 명했으며, 그러한 관행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한 명의 기사는 마치 거대한 전차의 전차병들처럼 여섯 명으로 구성된 한 팀, 즉 '랜스lance'로 확장되었다. 이 모든 것을 갖추자면 실로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 영주에게는 복종과 '충성'을 맹세한 대가로 하사되었던 토지가 있었다. '봉토fief'라 불린 이 토지는 봉건 사회의 기초였다. 즉 군사적 전문화, 토지 보유권, 개인적 의무의 삼각관계가 설립되었으며, 이로부터 한 해에 정해진 며칠 동안 영주를 위해 말을 타고 봉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의무로부터 면제된 토지를 소유한 전사계급이 탄생했다...


... 신부와 기사는 중세 기독교가 추구했던 이상의 모습으로 똑같이 헌신적이고, 똑같이 성스러웠기 때문에 서로 구분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독특한 게르만 전사와 라틴 '성직자sacerdos'의 융합은 모든 중세 문화의 근저에 놓여있었다...


어쨌든 중세사가들이 애써 되풀이하여 알려주고 있듯이, 봉건제는 균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봉토체제나 봉직 체제에 대해 배타적이지도 않았다...


... 12세기에 경제가 회복되면서 돈은 점점 상인들이나 성직자들로부터 나왔으며, 심지어는 군사적 봉사 대신 현금 지불 - '병역면제세scutage' - 을 선호한, 즉 부르주아 습성을 체득한 일부 귀족들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 이탈리아에서는 도시 공동체들이 농촌 귀족들의 틈에서 살아남았다... 이탈리아에서 무장은 봉토가 아니라 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 관례상 60일 정도였던 그와 같은 봉사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던 반란군을 진압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군대를 소집하고 유럽 대륙으로 보내 전쟁을 치르도록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간단히 말해, 봉건제로는 어림도 없었다...


크레시 전투는 말을 탄 봉건 군대가 보병에 의해 처음 격파된 경우는 아니었다. 1302년 쿠르트레courtrai의 도시민들은 미늘창과 장창으로 아르투아 백작(1250-1302)가 이끄는 기사들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리스 화약Greek fire'이라 막연히 통칭된 가연성 재료는 공성전이나 해전에서 투석기로 발사되는 소이탄의 형태로 오래전부터 비잔틴 군대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발사 과정을 역으로 하여 화약 자체를 발사 무기의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것은 더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를 위해서는 금속 주물에 관한 전문지식이 요구되었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평화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교회의 종 주조를 위해 서양에서 발달되었다. 종에서 대포로 넘어가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으며, 이는 14세기 초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종종 그 첫 실험작들, 예컨대 중세 기능공들에 의해 용과 악마의 형상으로 멋들어지게 주물된 지옥의 무기로, 하루에 단 한 발만 발포 가능했던 거대한 구포 '리볼데퀸ribauldequin'이나 초기 '미트라예즈mitrailleuse'와 같은 관다발은 오래된 출판물들에 종종 매우 공상적으로 묘사되었다. 15세기에 이르면서 이렇게 별나게 생긴 무기들은 사라졌고, 향후 500여 년 동안 전쟁의 수행을 지배할 두 무기인 대포와 총이 오늘날 우리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럽 화약 대포 그림(1326년)

후일 에드워드 3세가 될 에드워드 왕자에게 1326년에 바쳐진 왈터 드 밀램미트의 <왕의 숭고함과 지혜 그리고 분별력Nobilitatibus, sapientiis et prudentiis regum>에 실린 그림(유럽사 속의 전쟁, 44쪽)


미래는 또 다른 종류의 보병들에게 달려 있었다. 기마군에 맞서 보병이 보유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무기는 장창이었다... 마케도니아의 방진은 기록상 최초의 보병 대형이었다... 플랜태저넷 왕가가 웨일스의 산악지대로 자신들의 지배를 확장하고자 했던 13세기에 기사군의 효율성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이는 그로부터 100여 년 후 오스트리아 왕가가 스위스 산악지대에서 똑같은 시도를 감행했을 때 더욱 명백해졌다.


원래 스위스 산악지대 사람들의 무기는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장창이 아니라 단순한 도끼, 즉 창과 도끼를 결합한 8피드 정도 길이의 도끼창halberd이었다. 1315년 오스트리아 기사들을 모르카르텐Morgarten의 협곡에 몰아넣었을 때뿐만 아니라, 1339년 라우펜Laupen에서 그리고 1386년 젬파하Sempach의 평원에서도 스위스인들은 이 도끼창으로 오스트리아 기사들의 갑옷을 찢으며 그들을 도살했다... 장창은 좀 더 지난 1476년과 1477년에 부르고뉴Bourgogne의 기사대에 대적한 스위스의 승리에 맞춰 등장했다...


...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이웃들은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e, lansequenets'라 알려진 그들 나름의 대형을 짜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 귀족계급에게 '창을 세우는 것to trail a pike'은 후일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자연스러운 군사활동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스페인에서는 마초가 부족했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자부심 강한 카스티야 지방의 귀족들을 보병으로 모집하는 데 어떠한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15세기 말에 이르면 '대대battle, battalion'라 통칭되었던 창병들은 중무장한 모든 군대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들 옆에는 점차 총, 특히 '갈고리 모양hooked'의 총인 하켄부트세Hackenbuechse 또는 아퀘부스arquebus로 무장한 분견대가 따라붙었다. 이들 총은 그 후예인 머스킷musket총과 함께 다음 200여 년 동안 보병대의 火器가 되었다. 마침내 보병대infantry가 탄생했다.


마찬가지로 앞서 보았다시피 포병도 탄생했다. 물론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부품들로 만들어진 대포 한 門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최대 40마리의 말이 필요했다. 역설적이게도 보병과 포병이 전장에서 말의 자리를 되살려 놓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병대cavalry'는 봉건 군대의 전통적인 기사단chivalry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후자의 경우 승리보다 개인의 명예에 더 관심을 두었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 돌격했다. 하지만 전자는 다른 병과와 결합되어야만 하는 부대로, 다른 병과와 마찬가지로 지휘하는 장군의 명령에 따라 배치되었다.


... 봉건적 의무를 다하기 위한 사역의 대가에서 오직 돈을 위한 봉사로의 전환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의 안전판 기능은 빠르게 쇠퇴하고 있었으며, 특히 가장 중요한 점은 사용 가능한 봉토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중세 말에는 이들을 수용할 농촌지방이나 이들이 고용될 수 있는 전쟁을 뛰어넘는 규모로 군사계급이 성장했다...


... '자유 기사들feelances'의 존재는 처음에는 군주들의 힘을 증대시켰다... 전쟁자금은 동원될 필요가 없었던 봉신들로부터 대신 거둔 '병역 면제세'나 세금 혹은 교회로부터 받은 교부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전비의 상당 부분은 무역 수입으로부터 거두어져야만 했다... 점차 사회의 비군사적인 계층과 평민 계층을 대표하는 '의회Parliaments'나 '신분제회의Estates' 혹은 '하원assemblies'이 군주의 전쟁능력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갖가지 소규모 분쟁을 낳은 [11-12세기] 서임권 투쟁Wars of Investiture에 의해 신종의 의무가 구제할 길 없이 완전히 분쇄된, 게다가 현금이 언제나 넉넉했던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에 들어 이들과 같은 용병 떼거리들이 활개를 쳤고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프랑스 신분제회의는 그 첫 교부금을 1439년 샤를 7세(1403-1462, 재위 1422-1461)에게 줬다. 1444년에... 용병 떼거리들 중 일부를 영구적으로 왕실에 봉사하는 군대로 수용하도록 칙령을 내렸으며, 그들을 앞세워 나머지 무리들을 강력히 해산시켜 나갔다...


... 마침내 1494년 샤를 8세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을 때, 그는 이제까지 유럽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최상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스위스 창병들이 보병의 핵을 구성하고 있었고, 기병대는 자신감 넘치고 고상했으며, 청동 포병 연대는 공격 목표가 된 모든 성을 폐허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 잘 비축된 국고로부터 급료를 지급받았다...



제2장 용병들의 전쟁


돌이켜보면, 샤를 8세의 군대를 '근대적인modern' 군대의 시초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샤를 8세의 군대는 상호 보완적인 전략상의 조합을 위해 동원된 세 병과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 상당수가 중앙의 국고에서 급료를 지급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가들은 대개 1494년 프랑스의 침공으로 개시되었던 이탈리아 전쟁(1494-1559)을 '근대 유럽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 후기 중세의 자기의식적인 의고주의archaism... 는 16세기 중엽, 최소한 그와 같은 감정을 몸소 체현하고, 유럽의 모든 정치를 양분시켜놓았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1494-1547, 재위 1515-1547)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1500-1558, 재위 1519-1558)의 경쟁이 끝날 때까지 존속되었다...


... 적어도 16세기 전반부에 있어서 전쟁은 상속권을 둘러싼 개별 군주들 사이의 사적인 다툼이었으며, 결코 국익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둘러싼 국가 간의 다툼이 아니었다...


... 유럽의 군주들이 별 문제없이 계속해서 상비군을 유지하고, 장기간 출정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영토 내 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게 된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나 되어서였다...


... 서임권 투쟁에 따른 봉건 구조의 파편화로 인해 이탈리아 귀족계급은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가장 잔인무도한 자들은 1338년에서 1354년까지 15년 동안 활개쳤던 1만여 명에 이르는 강력한 무리로 '위대한 중대Great Company'라 불렸다... 몇 년 후인 1361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방랑 용병들routiers' 떼거지가 이들을 계승했다... 14세기 말에 이르면... '콘도티에리condottieri'는 제도화되었다.

'콘도티에리'는 단순히 '청부업자contractor'를 지칭했다. 이 명칭은... 구체적으로 명시된 병무계약서인 콘도타condotta에서 유래했다...


... 1494년의 포르노보Fornovo 전투와 1525년의 파비아Pavia 전투 사이에 열두어 번 정도의 결정적인 경합이 있었다. 그러나 그후 약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서유럽에서 주요한 전투는 사라졌다... 축성술과 화력의 발전도 그중 하나였다... 이탈리아의 방식에 기초한 군사 기업가정신이 알프스 이북지방에서도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비용이 많이 든 부대를 아끼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망이 커졌다는 데 있다...


중세 후기의 가장 놀라운 혁신이었던 화기가 전쟁에서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472년에 밀라노 공이 자랑스럽게 동원했던 18문의 대포와 대포의 가미架尾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522마리의 황소와 227개의 짐수레가 필요했다...


... 16세기 초 아퀘부스는 더 길고 무거운 머스킷총으로 대체되었다...


...스페인의 테르시오가 16세기부터 17세기 전반부까지 유럽의 전장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 1494년의 포르노보 전투와 1525년의 파비아 전투 사이의 21년 동안 우리는 화력이 단순히 보조적인 역할에서 중심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즉 아퀘부스는 더 이상 창병 방진의 미소한 보조물이 아니었다. 거꾸로 창병 방진의 주된 임무는 이제 총병을 보호하는 것이 되었다...


... 터키 포병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파괴(1453년)는... 한 시대의 마감을 상징했다...

... 화력은 화력에 의해서만 막을 수 있었다. 방어하는 측의 첫 대응은 임기응변식이었다...

15세기의 마지막 10여 년 동안 이탈리아 도시들에 의해 '임시변통으로ad hoc' 처음 이루어졌던 이와 같은 요새화는 다음 50여 년 동안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제3장 상인들의 전쟁


... 총은 '지배자만이 아니라 상인의 마지막 설득 수단이었다ultima ratio mercatorum as well as regnum'


... 해전의 발전에 있어서 대포는 중심적이었다. 15세기까지 해전은 육지에서의 전쟁의 연장이었다... 14세기 상선들이 당시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소형대포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다른 상선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15세기에 거포가 등장했다... 그러나 누각에 올리기에 거포는 매우 무거웠다... 16세기에는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해상에서도 화력이 타격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는 지상에서든 해상에서든 화력이 지배적인 요소가 되었다...


... 그리고 1580년 포르투갈 왕위가 스페인 왕위와 통합되자 서아프리카에서 동인도에 이르는 포르투갈 제국 전체 또한 좋은 사냥감이 되었다.

포르투갈 제국은 우선 네덜란드인들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제4장 전문가들의 전쟁


... 전문화된 군대의 발전을 선도했던 국가는 네덜란드였다. 17세기 초... 네덜란드만이 해외무역을 통해 획득한 부로 자국의 군대를 1년 내내 무장시킬 수 있었다... 굴욕적인 업무라 치부했던 두 가지 일을 시킬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군인들로 하여금 '참호를 파고dig' '반복 훈련drill'을 하도록 만들었다...


... 1631년의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합스부르크군이... 엄청난 패배를 당했을 때...

이듬해 1632년 구스타브 아돌프는 전사했고... 하지만 아돌프는... 전쟁 교시의 전형을 제공했다... 군수품과 병참은 국가의 책무로 인식되었다... 가벼워진 머스킷총과 지속적인 훈련은 이들의 사격과 재장전 속도를 굉장히 빠르게 만들었으며, 그로써 보병대의 깊이는 열 명에서 여섯 명으로, 심지어는 그보다 더 적은 수로 낮추어질 수 있었다...

... 스웨덴 기병대는 우아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던 반회전을 연습하는 대신, 백병전에서 쓸 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잘 훈련된 한 무리로 칼을 들고 돌격할 수 있는지 다시 배웠다... 바로 이것이 올리버 크롬웰의 철기병대Ironsides가 영국 내전 당시 완벽하게 구현해냈던 전술이었다.

... 구스타브 아돌프는 대포가 지닌 기본적인 단점인 '기동의 어려움immobility'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해결책은 대포의 사정거리가 포신의 길이에 비례해서 반드시 증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즉 대포의 파괴력을 전혀 감소시키지 않고도 포신의 길이를 반으로 줄이고, 그럼으로써 대포의 무게를 반으로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구해졌다...


... 아돌프는 어떻게 하면 도적을 병사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지, 또한 어떻게 무질서한 폭력을 일반적 가치체계에 따라 합법이라 인정받은 권위체의 지능적이고 제어된 힘의 사용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17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유럽국가들은 전문 직업군인을 고용할 수 있었고... 절제와 기술을 가지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당시 무기 기술에 있어 두 가지 변화가 더 발생했다... 화승식 발화 장치를 가진 머스킷총이 부싯돌식 발화 장치가 장착된 총으로 교체된 것이었다... 또 다른 변화는 고리형 총검의 발명이었다...



제5장 혁명의 전쟁



제6장 국민들의 전쟁



제7장 기술자들의 전쟁


사실 전함은 국가의 자부심과 특이한 종류의 국력의 상징이었다... 전함은 즉각적으로 국가 전체의 기술적 성취와 전 지구적 행동의 범위를 체화했으며, 전함의 거포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상징했다...


... 전파 탐지와 무선 교신을 엿듣는 첩보기술에 의해... 잠수함 승무원들과 그들을 뒤쫓는 바다위의 군함 및 항공기들은... 죽음을 무릅쓴 숨바꼭질 놀이의 도구였다.


공중전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항공기가 자신의 주된 임무였던 정찰을 자유로이 수행하기 위해 서로 다투게 되면서 지상전의 부가적인 측면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제공권을 장악한 공군은 단순한 포병의 눈이 아니라 포병의 역할마저 대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역할을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후방에서의 모든 이동까지 불가능하게 만들 규모로 수행할 수도 있었다... 항공모함이 제해권 확보의 주력 수단으로서 전함을 대체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은 1941년 이후 태평양에서의 전쟁 경험이 있은 뒤였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내연기관은 수송차량뿐만 아니라 전투 차량을 움직이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쟁 발발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최초의 '전차tank'가 전투에 투입되었다...


... 예컨대 무선통신의 발전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기동전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1934년 첫 기갑사단Panzer Divisions의 창설을 위해서는 히틀러가 몸소 개입해야 했다...

1940년과 1941년에 '전격전blitzkrieg' 전술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먹혀들 까닭은 분명 없었다...



에필로그

유럽시대의 종언(2009)



옮긴이 해제

전쟁과 사회: 마이클 하워드의 전쟁사 연구와 평화의 발명


특히 하워드는 이마누엘 칸트가 1795년에 출판한 짧은 논고 <영구평화론>에서 전개한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하워드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기초하여 근래 유행했던 소위 '민주평화론democratic peace theory'의 기계론적인 해석과 적용에 대해서는 극히 비판적이다... 공화정republic은... 공중public의 의견을 존중하기에 함부로 전쟁에 임할 수 없다고 언명했다. 이에 더해 칸트는 자유무역과 왕래는 공화정을 정부형태로 하는 나라들 사이의 상호교류와 신뢰를 증진시켜 국제 평화의 토대를 더욱 공고히 다질 것이라 예언했다.


... 하워드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도식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역사는 누구보다도 역사학자에게 "섣부른 예측을 삼가야 할 이유를" 되풀이해 가르쳐 준다고 그는 누차 강조한다. 프랑스 대혁명의 정치적 이상의 전파는 상당히 공통된 문화와 전통을 지녔으며 지리적으로 극히 한정된 공간인 유럽 내에서도 폭력으로 점철된 저항과 순응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또한 칸트는 "상업의 정신은 전쟁과 공존할 수 없다"고 낙관했지만, 하워드는 상업혁명에 이어 일어난 산업혁명이 20세기의 '총력전'을 가능케 했으며, 경제성장이 낳은 전지구적인 부의 불평등은 오히려 더 뿌리깊은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하워드는 인간의 "반사회적 사회성unsocial sociability"을 핵으로 하는 칸트의 역사절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즉 "자연이 인간의 모든 능력을 만개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사회 내에서 그들 사이의 대립이다. 단 이 대립이 궁극적으로 사회 내에서 법적 질서의 원인이 되는 한에서 말이다."


... 하워드는 칸트를 따라 "유적 존재로서 인간이 스스로를 깨우칠 능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기를, "지난 전쟁의 역사가 조금이라도 인간을 일깨웠기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배우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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