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어릴 때 읽었던 이 책을 다시 펼쳤다. 어릴 때는 이 소설이 실험적 시도를 적용하여 세계일주 모험을 그린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 소설의 작가가 <15소년 표류기>나 <해저 2만리>와 같은 웅혼한 모험소설의 작가와 동일인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19세기 후반의 세계상을 살펴보기 위해 짬을 내어 읽어보았는데, 역시 잘 ‘만들어진’ 소설이었다.
소설적 관점에서는 픽스Fix 형사의 등장이 꽤 그럴싸하다. 그 형사가 주인공의 계획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하여 독자들은 바삐 소설의 다음장을 넘기게 된다. 이러한 악역을 <별에서 온 그대> 등의 한국 드라마에서 많이 보아온 터라 이제 이러한 줄거리를 흔드는 악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익숙하게 되었다. 이 픽스 형사는 여행의 마지막 순간에도 주인공인 포그Fogg를 영국의 감방에 처넣음으로써 독자들을 한숨짓게 만든다.
그러나 마치 포그를 닮은 듯 작가는 무미건조하게 '날짜변경선'의 히든카드를 은폐한 채 악어처럼 기다린다. 포그 입장에서는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구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80일간 일주하였기 때문에 하루에 18분씩 단축한 셈이 되어 출발지인 런던 기준으로는 하루를 벌었다. 그로 인해 포그는 픽스의 무수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약속장소에 정확히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짜변경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을 19세기 독자들에게는 기상천외한 과학적 반전으로 각광을 받았을 듯하다.
독자도 마찬가지이지만 포그와 그의 일행은 그렇게 하루를 벌게 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기한내 세계일주’ 게임에서 진 것으로 생각하고 낙담하였다. 그러나 포그의 담담함, 아우다Aouda의 사랑, 그리고 장 파스파르투Jean Passepartout의 민첩함 등이 어우러져 그들은 결국 앞당겨진 하루를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의 우연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80일간의 여정 속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한 서로에 대한 믿음이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또한 인간승리의 미담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내가 발견한 가장 깊은 감명은 절체절명의 위기시 드러난 포그의 기지이다.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대서양 횡단 정기선을 놓친 다음날 포그는 범선과 증기선이 결합된 작은 배를 찾아 탑승에 성공한다. 마침 그 배는 원래 프랑스의 보르도로 가는 배였는데, 선상 반란을 일으켜 영국의 리버풀로 항로를 변경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출항 후 기착지를 가까운 곳(보르도)에서 더 먼 곳(리버풀)으로 변경한 까닭에 도착지까지 소요되는 연료(석탄)가 충분히 적재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보고받았을 때, 포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배의 속도를 유지하도록 지시한다. 모든 연료(석탄)가 완전히 소진되었을 때, 그는 배에서 쇠로 된 필수 선체를 제외한 모든 목재(돛대, 돛 등을 포함)를 연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는 주어진 문제 상황 속 감추어진 잠재자원을 발견하여 활용하는 아시트ASIT 창의력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포그의 성격은 매우 건조하다.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하고 그외의 것들은 사소하게 처리한다. 그리하여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지구상의 그 많은 아름다운 세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 따라서 소설에서도 행선 중 세계 도처의 뛰어난 유적과 풍광에 대한 묘사는 비교적 부족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그는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다. 정의감이 있고, 의리가 있으며, 명예를 중시한다. 그리고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서도 침착하게 다음 돌파구를 생각할 정도로 낙관적이다. 영국신사에 실험정신이 결합된 듯하다.
이밖에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19세기 후반의 과학기술과 운송 인프라의 발전 및 세계 여러 지역의 독특한 종교와 풍습에 대한 인상은 다음 기회를 위해 남겨둔다. 그러나 기다림이 지루한 사람들은 직접 이 책을 읽어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는 너무도 단순하고 손쉬운 해결책이다. (2024.9.5)
Note:
이 소설은 1872년에 연재했고, 1873년에 발표했다. 소설 속에는 인도 횡단시 수티suttee(남편의 장례때, 아내를 화장하여 순장하는 힌두교의 의식, 사티sati라고도 함)의 대상이 되어 원치 않는 죽음을 앞둔 여인 아우다를 구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영국과 이슬람>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 111쪽에 나온다. 1827년부터 1835년까지 인도의 총독으로 재임한 Lord William Bentinck가 수티의 폐지 등의 인도주의적 개혁을 단행하였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수티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프랑스 하인인 파스파르투가 일본에서 무일푼이 되어 서커스단의 일원이 되는데 그 서커스는 텐구서커스이다. 소설에서는 텐구서커스 단원들이 긴 코를 달고 서커스를 공연하는 정도로만 나오는데, 여기에는 배경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텐구(天狗)는 일본의 전설 속 괴물이다. 붉은 얼굴에 큰 코가 특징이고 날개가 있으며 높은 게다를 신고 있다. 텐구란 이름은 벼락이 칠 때 하늘에서 떨어진 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쿠라마산의 카라스텐구가 일본의 카마쿠라 막부의 영웅 미야모토노 요시츠네(源義經, 아명 우시와까마루牛若丸)에게 검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일본의 개항시기 서양인을 흉내내어 큰 코를 달고 하는 서커스가 그들 전설 속의 텐구에 빗대어 텐구서커스로 불리우며 유행했을 법도 하다.(2024.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