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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Oct 03. 2024

크라바트 발견의 우연

조영필

유럽의 3대 종족은 라틴, 게르만, 슬라브이다. 라틴족은 로마와 지중해 문명을 꽃피워 유럽 문명의 주춧돌을 세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게르만의 대이동으로 일약 유럽의 주인공이 된 게르만이 있다. 지금 세계의 주요 강대국은 대부분이 게르만의 후예로서 그들의 성공을 대변한다.


그에 반해 슬라브는 게르만과 같은 강렬함이 없다. 우선 슬라브Slav라는 종족명 자체가 노예를 뜻하는 영어 단어 slave의 어원이 되는데, 이는 슬라브족이 지중해 세계에서 중요 교역품목이었던 노예의 주요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슬라브족은 왜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슬라브족이라고 명명하는 것일까 하고 가끔 의아해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Slav라는 단어는 원시 슬라브어 slovo에서 유래되었는데, 그것은 '말' 또는 ‘언어’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에 반해 그들은 이웃 게르만의 나라들을 '벙어리'를 뜻하는 Niemch계 단어로 부르고 있다. 즉 slovo란 단어는 말이 통하지 않는 벙어리 같은 이방인이 아닌, 같은 언어를 쓰고 말이 통하는 동족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또 안타까운 것은 슬라브인들의 나라를 슬라브인이 아닌 게르만인 바이킹(노르만, 북쪽 게르만)이 세웠다는 사실이다. 현재 슬라브의 대국인 러시아는 루스Rus라고 불리우는 스웨덴계 바이킹의 주도로 건설된 키예프 공국과 그를 잇는 모스크바 공국에 역사적 연원을 두고 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폴란드 또한 그 서부 경계에 있던 브란덴부르크의 확장과 튜턴기사단의 식민 개척 대상 지역이 되어 그들의 영토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폴란드 왕과 귀족들이 모두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 덕택에 그들은 로마 교황의 비호하에 그들의 영역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유럽사 전반에 걸쳐 게르만에 대해 많이 위축되고 피동적인 슬라브인데, 이 슬라브족이 동부유럽과 남부유럽에서 엄청난 세력권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또한 경이로운 일이다. 그런데, 슬라브족에 소르브인(Sorben)이라고 하는 서슬라브계* 민족이 있는데, 독일에서는 브란덴부르크주와 작센주에 거주하고 있다. 왜 갑자기 소르브인일까?


흑해 북쪽의 교역사를 읽다 보면 벤트족(Wends)이라는 생경한 민족명이 나온다. 검색해보니 소르브인이었다. 그러나 소르브인은 독일과 폴란드의 경계에 걸쳐 루사티아(Lusatia)라고 일컫는 지방에 한정되어 살고 있어, 흑해 인근의 벤트족에는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벤트라는 종족명은 게르만인들이 슬라브계 부족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였으므로 굳이 소르브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르브인에 거듭 주목하는 것은 다음의 이야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일의 소설가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가 1971년에 발표한 <크라바트Krabat>라는 판타지소설이다. 이 소설은 소르브인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흑마술 마법사 민담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18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여 고아 소년 크라바트가 검은 물레방앗간에서 겪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영향을 준 작품이라는 것이다. 마법사에게 속박당한 소년을 사랑하는 소녀가 구해준다는 동일한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치히로가 마지막에 치르는 12마리 돼지 알아맞히기 시험이 크라바트에 나오는 12마리 까마귀 알아맞히기 시험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 거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크라바트에서 '검은 물레방앗간'이 가지는 초기 자본주의 공장의 이미지와 마법사를 조종하는 최종 보스(빨간 닭날개를 모자에 단 대두목) 그리고 기독교를 뒤집은 상징들 또한 충분히 음미해볼 만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전에 독일인들과 어울려 사는 작은 서슬라브의 흑마술 민담이 가장 일본적인 신들의 이야기 속에 그렇게 기막히게 녹아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우연히 알게 된 ‘크라바트’와 ‘소르브’가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써둔다.



Note:

주요 내용은 구글 검색 및 나무위키와 위키백과 참조 (2024.10.3)

*서슬라브계이면서 독일동부에 정착한 슬라브족들이 사용하던 언어로 '폴라브어'가 또 있다. 이 언어는 그들이 독일인으로 동화되기 전에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소멸되었다. 그러나 이 언어의 유산이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베를린이다. Berlin이라는 이름은 과거 이 지역에 살던 폴라브인의 언어로 '물기가 많은 땅'을 가리키는 'Birlin' 또는 'Berlin'에서 유래했다 (나무위키,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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