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선생
그리스 암흑시대는 미케네 문명의 붕괴로 인해 국제 무역 네트워크가 단절되고 경제가 침체된 시기였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이 에게해 지역과 그리스와의 활발한 해상 교역을 재개한 것은 대략 기원전 10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부터입니다. 특히 에우보이아 섬의 레프칸디(Lefkandi) 유적지에서 발견된 동방 유물들이 이 시기부터 그리스와 근동 간의 중요한 문화적, 무역적 연결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핵심 증거 중 하나입니다. 이때부터 키프로스를 비롯한 근동 지역에서 온 고급 도자기와 금속 세공품 등이 그리스 유적지에서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그리스에 동방의 사치품(금, 은, 상아, 향신료 등), 야금 기술, 그리고 중요한 원자재를 공급했습니다.
물품 교환: 페니키아 선박들은 그리스의 도자기, 올리브유, 와인 등을 서방의 시장으로 운반했고, 그 대가로 근동 지역의 상품들을 그리스로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교역은 그리스의 경제적 활력을 되찾는 데 기여했으며, 잃어버렸던 해상 기술과 항해 지식을 다시 습득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교역 거점 형성: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곳곳에 교역 거점과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그리스인들은 이들과 접촉하면서 상업적인 경험과 새로운 시장에 대한 이해를 넓혔습니다. 이는 훗날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지중해 전역으로 팽창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그리스 암흑시대 동안 지중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다른 청동기 시대 문명들이 붕괴하는 동안, 페니키아 해안 중심지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혼란을 겪으며 지속성을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이 시기에 지중해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하여, 붕괴로 인해 생긴 공백을 메웠습니다.
페니키아 문명이 그리스에 미친 주요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무역 및 상업 네트워크 재활성화
페니키아인들은 뛰어난 항해술과 무역 기술로 유명했으며, 지중해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식민지와 무역 중심지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이들의 주요 무역로는 그리스 섬들, 남유럽,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심지어 영국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구리, 은, 철, 금, 주석, 납과 같은 금속을 수입하고 목재, 직물(특히 유명한 자주색 염료), 유리 등을 수출했습니다. 그리스의 장거리 무역이 제한적이었던 암흑시대에 이러한 무역 활동은 에게해 지역에 필수적인 연결고리를 제공했습니다.
2. 알파벳의 전파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 중 하나는 문자 체계의 재도입이었습니다. 기원전 11세기경 페니키아인들은 22개의 자음으로 구성된 아브자드(자음 문자) 알파벳을 개발했으며, 이는 그리스 알파벳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950년에서 750년 사이에 페니키아 알파벳을 차용하여 모음을 추가하는 혁신을 통해 자신들의 문자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미케네 문명의 선형 문자 B가 사라진 후 수세기 동안 문맹 상태였던 그리스에 이 새로운 문자 체계의 도입은 문학(호메로스 서사시 등)과 기록 보관의 부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3. 예술 및 문화적 영향
페니키아인들은 고대 그리스 예술, 특히 기원전 6세기와 5세기 초 그리스 예술과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오리엔탈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등의 미술 양식은 페니키아 상품(금속 세공품, 상아 조각품, 직물 등)을 통해 그리스에 유입되었고, 이는 그리스의 초기 아르카익 미술(특히 도자기, 금속 공예)에 "동방화 양식(Orientalizing style)"으로 나타났습니다.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들이 서부 지중해(예: 에우보이아의 피테쿠사이)와 크레타와 같은 지역에서 상호 교류한 증거가 있습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와 같은 그리스 신화는 근동의 창조 신화(예: 쿠마르비 이야기)와 유사성을 보이는데, 이는 페니키아 무역 식민지를 통한 문화적 차용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또한, 페니키아의 기둥 숭배와 같은 일부 문화적 요소는 초기 미케네 숭배와 유사점을 보였습니다.
4. 이주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와 그리스 폴리스에 이민자로 정착하기도 했습니다.
산쿠니아톤의 사상은 직접적인 저술이 남아있지 않고, 주로 서기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의 필로 오브 비블로스(Philo of Byblos)가 인용한 '페니키아 역사(Phoenician History)'라는 단편들을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산쿠니아톤의 사상으로 간주되는 내용은 실제 페니키아의 고대 전통과 필로 자신의 해석,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들은 페니키아인들의 우주론, 신화, 그리고 초기 형태의 자연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산쿠니아톤의 사상(필로의 기록에 기반하여)의 주요 특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주생성론: 물질주의적이고 점진적인 진화
산쿠니아톤의 우주생성론은 신화적 요소를 포함하지만, 동시에 원시적인 형태의 물질주의적이고 점진적인 진화론적 관점을 보여줍니다.
가. 태초의 혼돈과 물
산쿠니아톤의 우주론은 태초에 **어둡고 바람이 가득한 혼돈(dark and windy chaos)**과 **어둡고 무한한 물(dark and infinite water)**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그리스의 '카오스'나 '원시의 바다' 개념과 유사하지만, 단순한 신들의 창조 이전에 물질적 요소들이 존재했음을 강조합니다.
나. '모트(Mot)'의 생성과 진화
이 혼돈과 바람의 결합으로 '포토스(Pothos, 열망 또는 욕망)'라는 정신적인 요소가 발생하고, 이것이 원초적인 물과 섞여 **'모트(Mot)'**라는 끈적한 진흙 또는 진흙 같은 물질이 형성됩니다. 이 '모트'가 바로 우주 만물의 씨앗이자 기원이 됩니다.
다. 별과 생명체의 기원
'모트'로부터 태양, 달, 별들이 생겨나고, 나중에는 지적인 생명체, 즉 인간이 탄생합니다. 인간은 물과 흙에서 유래한 '진흙'으로부터 발생하며, 바람과 물의 상호작용으로 움직이는 '진흙의 알(mud-eggs)'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됩니다. 이는 신의 직접적인 창조보다는 자연적 요소들의 상호작용과 진화를 통해 생명체가 발생했다는 원시적인 생물학적 관점을 시사합니다.
2. 신들의 의인화와 자연 현상과의 연결
산쿠니아톤의 신들은 전통적인 가나안 신들과 유사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 현상 및 인간 사회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 창조자 신들
엘리온(Elioun, 지고한 자), 베루트(Beruth, 도시 베이루트의 여신), 크로노스(Kronos, 엘) 등 다양한 신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단순히 신화적 존재를 넘어 농업, 기술, 법률 등 인간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문화 영웅의 성격을 띠기도 합니다.
나. 신들의 계보와 자연 현상
신들의 계보는 종종 태양, 달, 바람, 바다와 같은 자연 요소들과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바람의 신, 바다의 신 등이 등장하여 자연의 힘을 의인화하지만, 이는 동시에 자연의 특정 측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3. 문화와 기술의 기원 설명
산쿠니아톤의 이야기는 단순한 우주론을 넘어 인류 문명과 기술의 기원에 대한 설명도 포함합니다.
가. 최초의 발견과 발명
그는 인간이 불을 발견하고, 사냥과 낚시를 시작하며, 집을 짓고 농업을 발전시키는 과정, 그리고 언어와 글자가 발명되는 과정을 신화적 인물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이는 신들이 단순히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지혜를 얻고 기술을 발전시켜 문명을 이루었다는 관점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나. 인간 중심적 사고의 단초
신들이 직접 세상을 주조하기보다는, 원초적인 물질에서 만물이 진화하고 인간이 스스로 문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의 역할과 이성을 중시하는 초기 형태의 사고를 엿볼 수 있습니다.
4. 합리적 해석의 가능성
비록 산쿠니아톤의 사상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신화적이고 단편적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가. 신화적 서술 속의 물질적 원리
신들의 행위나 창조 과정을 넘어선, 물(원초적 요소), 흙(모트), 바람 등의 물질적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가 형성되고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개념은 자연 현상을 초자연적 힘이 아닌 내재된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나. 점진적인 발전 개념
만물이 한순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상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점진적으로 진화했다는 생각은 훗날 다윈의 진화론과는 다르지만, 자연의 변화를 단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사고방식의 초기 형태입니다.
다. 인과관계의 추구
비록 단순할지라도, '원시의 혼돈과 물 -> 모트 생성 -> 생명체 발생'이라는 흐름은 자연 현상 간의 원시적인 인과관계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산쿠니아톤의 사상(필로를 통해 전해진)은 엄밀한 의미의 '자연철학'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신화와 원시적인 물질주의적, 진화론적 사고가 혼합된 형태입니다. 하지만 이는 자연을 단순히 신들의 변덕스러운 영역으로만 보지 않고, 물질적인 기원과 내재된 과정을 통해 설명하려는 초기적인 시도를 담고 있으며, 이는 훗날 그리스 철학에서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탐구하는 데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산쿠니아톤(Sanchuniathon)은 고대 페니키아의 현자, 제사장, 혹은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정확한 생몰 연대는 불분명하며, 실제로 그가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이라고 알려진 **'페니키아 역사(Phoenician History)'**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서기 2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필로 오브 비블로스(Philo of Byblos)**가 고대 페니키아 자료를 바탕으로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요약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산쿠니아톤의 작품으로 알려진 내용은 필로 오브 비블로스를 통해 전해진 것입니다.
필로 오브 비블로스는 산쿠니아톤이 트로이 전쟁(기원전 12세기경) 이전, 또는 아시리아의 여왕 세미라미스(Semiramis, 전통적으로 기원전 14세기경)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산쿠니아톤의 저작이 실제로는 헬레니즘 시대(알렉산더 대왕 시대부터 기원전 1세기 사이)에 쓰인 페니키아 자료의 편집본이거나, 혹은 필로 오브 비블로스 자신이 창작한 것일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1929년 이후 시리아의 우가리트(Ugarit)에서 발굴된 기원전 1400년~1200년경의 점토판 문서들과 필로의 기록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발견되면서, 필로가 인용한 자료들이 실제 고대 페니키아의 전통과 신화를 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현대 학계의 중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