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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군나르 시르베크 & 닐스 길리에

by 조영필 Zho YP

시르베크 & 길리에, <서양철학사>, 제1장~제7장.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14/ ... 그리스 도시국가polis는... 인구와 면적 면에서 모두 작은 사회였다... 기원전 400년경 아테네의 인구는 대략 30만 명이었다... 대략 10만 명이 노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유인 남성은 대략 4만 명 정도였다.(아테네로 이주한 외국인들은 비록 그들(혹은 그들의 부모)이 아테네에서 출생했다고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아테네 시민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통상 지리적으로 산과 바다에 의해 서로 떨어져 있었다. 도시국가는 도시와 그 주변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공업과 교역 외에 농업이 중요한 경제활동이었다. 주변지역과 도시 사이의 거리는 통상 하룻길을 넘지 않았다... 정치 영역에서 대등한 자들 간의 조화와 법의 지배 그리고 자유가 그것이다. 이때 자유란 공동의 법 아래 단결하여 사는 것을 의미하였다. 자유의 상실은 무법의 상태에서 살거나 독재자의 지배 하에 사는 것을 뜻하였다...


15/ 자연과 사회 모두에 있어서 조화와 질서라는 이념은 일반적으로 최초의 철학자들이 등장한 기원전 5세기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철학의 근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이론은 고립된 개인이나 개인에 대한 보편적 법 혹은 국가의 우위가 아니라 "공동체 속의 인간"을 근본 개념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타고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권리는 한 개인이 사회 안에서 가지고 있는 기능이나 역할과 결부되어 있었다. 도덕적 덕성arete은 일차적으로 일정한 보편적 도덕적 규칙에 따라 사는 것으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진 목적을 수행하는 것으로, 즉 사회 속에서 제 위치를 찾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들에게... 노예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시스템이 그렇듯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6/ ... 기원전 9세기경 이주의 시대가 끝난 후에 도시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도시의 주변지역은 통상 황무지였기 때문에 도시의 인구는 각 도시국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늘어났다. 그래서 8세기부터 그리스 사람들은 (이탈리아 남부와 같은) 주변 지역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교역이 늘어나자 도량형의 표준화가 이루어졌고, 동전도 주조되기 시작하였다... 일부 사람은 부유해진 반면 다른 많은 사람은 빚더미에 빠졌다. 기원전 7세기에 이 사회적 긴장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사람들은 경제적 정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500년경 그리스 사람들은 법과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7/ ... 탈레스(B.C. 624~546)는 하루 중 자신의 그림자가 자신의 키와 똑같아졌을 때 피라미드의 그림자를 측정했다고 한다.


... 이밖에 탈레스는 밀레토스의 정치에 참여하였고, 기하학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항해 장비의 개선에 기여하였으며, 해시계로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가뭄을 예견하고서 올리브유에 투자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8/ 그리스철학의 기원은 솔론Solon(B.C. 640?~560?)이 살던 시절 이오니아 지방의 식민도시 밀레토스에 살았던 탈레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19/ ... 하나의 답변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물론 그 답변이 어떤 문제에 대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답변을 뒷받침하는 이유나 논변argument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0/ ... 철학적 답변은 무슨 용도로 쓰일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철학적 답변의 의미는 무언가를 위해 "이용"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21/ ... 네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1. 질문

2. 논변(들)

3. 답변

4. 함축(들)


23/ ... 넓은 의미에서 철학은 네 가지 다른 활동, 즉 창조적 글쓰기, 실험과학, 형식과학fomal science, 그리고 신학과 구분될 수 있다... 창조적 글쓰기와는 달리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든) 참 혹은 거짓일 수 있는 주장들을 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철학은 (물리학이나 심리학 같은) 실험과학이 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형식과학과는 달리 철학은 스스로 전제하고 있는 가정들(원리들)에 대해 성찰하고 그것들에 대해 논의하고 정당화해야 한다. 신학과 달리 철학은, 비록 언제나 일정한 종류의 가정들을 갖고서 작업하기는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계시에 근거한 교리와 같은) 일단의 고정된 가정들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 그의 답변과 그의 논변들 간에 괴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그의 답변은 그가 제시하는 논변들에 비해 "너무 크다". 즉 탈레스는 우리가 언급한 그의 논변들로 뒷받침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변과 주장 간의 괴리는 초창기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5/ ... 다양한 형태의 물이라면 일어나는 모든 것, 즉 변화는 물에 적용되는 법칙들을 통해서 설명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물은 결코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다... 관찰 가능한 현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물이 어떤 상태가 될지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과연 그런지를 시험해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이러한 철학으로 경험과학적 탐구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우주 속의 모든 것이 예외없이 인간의 사유에 의해 이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6/ ... 그리스인들이 합리적 증명 개념과 증명의 매개체로서 이론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이론은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고 이 진리는 공개적 검증에서의 반대 논변에 맞서 스스로를 입증해야 한다.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지식은 단지 - 통상 신화의 틀 안에서 제시되었던 - 파편적인 개별 지식들의 수집이 아니었다. 이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이 보편적 증명을 통해 뒷받침되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추구하였다.


27/ 1. 질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2. 논변: 물의 관찰들

3. 답변: 물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불변적 요소이다.

4. 함축: 모든 것은 이해 가능하다.


29/ ... 아낙시메네스는 그가 우어슈토프Urstoff(원소, 세상을 구성하는 원재료)라고 생각했던 공기가 차가워지면 물로 응축되고, 더 차가워지면 얼음과 흙으로 변형된다고 주장했다. (얼음에서 다른 고체들로 비약하는 것은 초기 그리스철학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일반화의 한 예이다.) 공기는 가열되면 희석되어 불이 된다... 나중에 4원소라 불리는 흙, 공기, 불 그리고 물이라는 네 가지 실체 모두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34/ ... 헤라클레이토스는 불pyr에 대해서...

"마치 물건들이 금의 교환물이고 금은 물건들의 교환물이 것처럼 모든 것은 불의 교환물이고 불은 모든 것의 교환물이다."(단편 78[DK90])...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단편 87[DK53])... 전쟁 혹은 갈등polemos은 이 우주론적 갈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을 다 휘감고 있는 불 때문에 세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소멸했다 다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스토아학파에게서 다시 볼 것이다.


42/ ... 아낙사고라스(기원전 498~428)는... 생애의 초반을 클라조메나이에서 보낸 후 성인이 되자 아테네로 가서 곧 그곳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페리클레스와 교분을 맺었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는 그의 비정통적 견해가 정통적 신념과 충돌하자 아테네를 떠나야만 했다. 예를 들어 그는 태양이 신이 아니라 커다란 불덩어리라고 주장했다...


제2장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54/ ... 기원적 600년에서 450년까지의 그리스철학 제1기를 "자연철학적 시기"라 부른다. 그런데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싹튼 시기와 같은 때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는 한편으로는 초창기 그리스철학의 내적 동력에서 기인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먼저 내적 발전부터 고찰해보자... 우리는 이미 150년이나 되는 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상호모순되지만, 모두가 진리라고 주장한다...


55/ 사람들이 점차 회의적이 되어간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관심의 대상이 자연에서 인간과 그의 생각으로 바뀐다. 확실한 지식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이로써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만 종종 잘못 논증된 자연철학적 사변에서 지식에 대한 회의적 비판과 지식이론theory of knowledge으로의 변화가, "존재로ontology"에서 "인식론epistemology"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56/ ... 이러한 인식론적 반응 외에... 윤리적-정치적 물음들이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인간은 이제 사유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행위하는 존재로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57/ ... 식민지 건설은 그리스 사람들을 낯선 풍습과 관습을 가진 종족들과 접촉하게 만들었다. 많은 다른 종족도 비슷한 것들을 경험하였지만 윤리적-정치적 토론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제기했고, 이 문제를 명료하고도 객관적인 방식으로 토론하였다.


다른 종족들과의 대면이 이루어진 것은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지만, 합리적 토론 능력은 150년된 철학적 전통의 유산이었다... 최초의 그리스철학자들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하나의 요소에 대해서,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성에 대하여 물음을 제기하였던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이제 서로 다른 풍습들과 관습들의 모든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의 보편타당한 도덕성과 정치적 이상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였다... 특히 인간 중심적 시기의 말기에 이르렀을 때(기원전 400년경), 이런 물음들에 대해서는 각 개인의 개인적 의견 이외의 다른 판결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도덕성은 단지 상대적일 뿐이라는 주장이, 즉 도덕성은 취향처럼 다양한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이 되었다.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종종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런 견해가 사회의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지배자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논쟁을 이끈 것은 소피스트들sophistes이었다...


60/ ... 직접민주주의는 높은 수준의 일반교육을 요구한다... 소피스트들은 "인민의 계몽"을 이끌었다. 그들은 정치 활동 참여에 필수적인 주제들, 논증술과 수사학, 시민론과 인성론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자연철학은 정치 참여에 필요한 필수 요건이 아니었다. 소피스트들은 교사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였으며 지식인이었다... 소피스트들이 스스로 연구활동에 종사하는 경우 그들이 탐구한 것은 인식론적 문제들과 윤리적-정치적 문제들이었다... 많은 후기 소피스트가 인식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론("확실한 지식은 없다")에, 윤리적-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보편타당한 도덕성이나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61/ ... 일부 소피스트는 우리가 좋은 도덕성이라고 칭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은폐된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도덕성도 여러 다른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62/ 이러한 상대주의 때문에 소피스트들은 점차 사람들의 신망을 잃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논변하고 설득하는 법을 가르치고 돈을 벌었다. 고객들은 많은 문제에 있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소피스트들은 법정의 법률가처럼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찬반의 논변을 해야 했다. 고객의 목적은 승소에 있었지 올바른 해답을 얻는 데 있지 않았다... 소피스트들은 종종 합리적 노증의 기술보다는 논쟁의 요령과 속임수를 가르쳤다...


고르기아스Gorgias(기원전 약 483-374)는 본래 시칠리아 출신으로 펠로폰네소스전쟁 중(427)에 아테네에 왔다. 그는 뛰어난 웅변가로 유명하다... 원래 자연철학을 공부했으나 엘레아학파의 철학을 접하고 난 뒤 철학적 회의론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63/ ... 고르기아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까지 나아갔다고 전해진다.

1.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 무언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알 수 없다.

3. 앎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다.


71/ 신들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기원전 약 481~411)의 주장은 두 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 즉 신적인 것은 지각을 넘어선다는 것과 인생은 짧다는 것이 그것이다...


72/ 여기서 우리는 법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 견해들 간의 대립과 마주한다. 첫번째 견해는 타당한 법은 주어진 시점에 현존하는 법, 즉 "실정"법이라고 주장한다. 두번째 견해는 타당한 법은 현존하는 법과는 다르며, 타당한 법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법의 이념에 호소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의 논쟁에서는 법실증주의와 자연권 철학이 대립하고 있다...


73/ 600 BC 자연철학 시기 - 450 BC 인간 중심적 시기 - 400 BC 체계의 시기

탈레스 624-546

아낙시만드로스 610-546

아낙시메네스 585-525

피타고라스 580?-500?

헤라클레이토스 540?-480?

파르메니데스 515?-?

엠페도클레스 492-432

아낙사고라스 498-428

데모크리토스 460-370

고르기아스 483-374

트라쉬마코스 470?-410?

프로타고라스 481?-411?

소크라테스 470?-399

플라톤 427-347

아리스토텔레스 384-322


74/ 소크라테스Socrates(기원전 470-399)... 그의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산파였다... 한 인간으로서 소크라테스가 가졌던 특출한 장점은 그의 윤리적 태도와 정의롭고 욕심 없는 삶, 번득이는 재치, 그리고 정직함과 유머이다...


제3장 플라톤 - 이데아론과 이상국가

87/ 플라톤Platon은 기원전 427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나 347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입법가인 솔론과 외가쪽으로 친척 관계였다... 민주정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패한 뒤 "30인의 참주"가 권력을 잡았으나, 곧 다시 민주정이 회복되었는데 바로 이 정부가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정부이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플라톤은 아테네 정치와 그 폐해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정치의 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를 정치적 타락의 일부로 보았기에, 이들의 상대주의를 이론적으로 논박하는 소크라테스의 시도를 계승하였다...


88/ 플라톤은 세 번에 걸쳐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려고 시도했다. 이 시도들은 그가 시칠리아 쉬라쿠사이의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와 만난 후, 그리고 훗날 그의 아들 디오뉘시오스 2세의 치하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도들은 모두 대실패로 끝났고, 플라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아테네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후에 그는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면서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과 만났는데,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과 피타고라스학파 간의 주요 공통점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수학이 모든 것의 본질이라는 견해

2. 이원론적 세계관 - 진정으로 존재하는 세계(이데아들)와 가시적인 그림자들의 세계

3. 영혼의 윤회와 불멸성

4. 이론과학에 대한 관심

5. 종교적 신비주의와 금욕주의적 도뎍관


기원전 388년경 플라톤은 아테네에 학교를 세운다. 바로 아카데메이아Academeia이다. 이 학교가 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학교가 위치한 숲이 반신반인인 아카데모스에게 바쳐진 숲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는 철학만이 아니라 기하학, 천문학, 지리학, 동물학 그리고 식물학도 가르쳤다. 게다가 정치교육도 핵심적이었다. 그리고 매일 체육을 했다. 수업은 강의와 토론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아카데메이아는 900년 이상 존속되다가, 서기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92/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윤리적-정치적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 다소 자신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플라톤은 하나의 이데아eidos로서의 좋음에 대한 이론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이데아 이론은 객관주의 윤리학의 근본적 방어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보완한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스스로가 실제로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에 동의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실제로 그는 이 이론에 반하는 몇 가지 강력한 논증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플라톤주의자라기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자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플라톤은 첫번째 시기에서는 소크라테스에 가까운 입장을 견지하여(소크라테스적 대화편들), 개념 분석과 개념적 통찰을 가지고 작업하였다. 중간 시기에 플라톤은 이데아가 독립적 존재를 가진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즉 (<국가>와 같은 대화편에서) 이데아론을 펼쳤다. 그리고 마지막 시기에 그는 개념과 보편자 문제의 해결이라는 내적 동학에 이끌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대화편에서) 변증법적 인식론을 입론하였다.


93/ <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은 당시 유행하던 형태의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을 토론의 대상으로 삼는다...


제4장 아리스토텔레스 - 자연 질서와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131/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기원전 384년 마케도니아의 해안에 위치한 이오니아의 도시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의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학에 관심을 가지는 데에는 아버지의 직업이 일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경우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플라톤의 사상이 수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많은 면에서 생물학의 영향을 받았다.


17세 혹은 18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와서 아카데메이아의 학생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플라톤이 347년 죽을 때까지 약 20년 동안 머물렀다.


132/ 알렉산더가 권좌에 오른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이주하여 자신의 학원인 뤼케이온Lykeion을 설립하였다(기원전 335년). 이 학원은 860년도 넘게 존속했는데, 현재의 거의 모든 유럽 대학보다도 더 오랜 기간 존속한 것이다...


133/ ... 그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158개의 서로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 정부 형태들에 대한 체계적 기록들을 수집하였다. 이 거대한 작업 중 우리에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테네 헌정사 중 일부만이다. 뤼케이온에서는 철학, 역사학, 국가학, 자연과학(생물학), 수사학, 문학과 시작법 등의 강좌가 개설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대부분 그의 강의 노트들로 추정된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었을 때 아테네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와 얽힌 아리스토텔레스의 과거 때문에 그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났고, 이듬해(기원전 322년) 62세를 일기로 죽었다.


제5장 후기 고대 철학

189/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ism란 용어는 에피쿠로스Epikouros(기원전 341-271)로부터 기원한다. 그가 세운 학교인 "정원Kepos"은 상냥하고 교양 있는 분위기로 유명했으며 그곳에서는 여성과 노예도 환영받았는데 이것은 고대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206/ ...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플로티노스Plotinos(205-270)는 이원론적 이데아론을 버리는 대신 우주를 빛과 어둠의 위계적 상호작용으로 보는 플라톤주의의 해석을 전개했다... 일자一者는 우주의 최종적 토대(우어그룬트Urgrund)이다. 일자는 마치 주위를 밝히는 광원처럼 - 이 광원으로부터 나오는 빛줄기가 주위로 방사되면서 점차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그라지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 존재하는 모든 것에 존재를 방사한다. 이 방사 혹은 유출emanation 이론은 영적인 우어그룬트가 최상의 능력을 가진 존재이고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힘의 중심인 반면 물질은 비존재라고 본다.


208/ 퓌론Pyrrhon(기원전 약 360-270), 카르네아데스Carneades(기원전 약 213-128) 그리고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기원후 약 200)와 같은 고대 회의주의자들은 주로 인식론적 문제들에 몰두하였다.


감각은 우리에게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211/ 귀납법은 타당한 추론이 아니다


연역법은 새로운 지식을 주지 못한다


212/ 연역법은 그 자체의 전제들을 증명하지 못한다


213/ 상충하는 의견들의 근거는 똑같이 좋다


221/ ... 법의 원천과 정당화...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구속력 있는 법의 토대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법은 궁극적으로 단지 권력과 전통의 표현에 불과한가?


... 법에 대한 또 다른 이론적 성찰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경우와 같은 유용성 계산이 속하는데, 이 방법은 법적 결정의 효과를 논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벤담과 밀과 같은 공리주의적 전통의 사상가들이 연구하게 된다. 이들은 사회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법이 원래 의도했던 대로 기능하는지를 알아내려고 시도했다. 나아가 고대에 행해진 법에 관한 이론적 성찰로는 어떤 상황 조건들이 한 사회의 쇠퇴를 초래하는가에 대한 여러 토론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대체로 생물학에서 영감을 받아 국가의 발생, 성장, 성숙, 퇴보 및 해체에 대한 이론의 형태를 띠었다...


222/ ... 로마법이 그렇게 잘 발달된 이유는 그 이론적 유산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적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서로 다른 많은 종족 집단과 문화 집단을 가진 제국에 맞는 공통된 법체계를 만들어내야 했다...


224/ 이렇게 그리스인들은 경험적인 근대 자연과학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많은 개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지금 사후적 시각에서 돌이켜보자면 그리스인들에게 결여되었던 것은 실험적 방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르키메데스Archimedes(기원전 287-212)는 과학적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 쉬라쿠사이에서 출생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했다...


226/ ... 기원전 270년경에 살았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하는 천구라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 이론은 데모크리투스의 원자론과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즉 당시에 이 이론은 너무나 사변적으로 여겨졌다...


제6장 중세

240/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기독교도였으나 아버지는 아니었다. 청년 시절 그는 카르타고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였다. 처음에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종교적 운동의 하나인 마니교에 기울었다...


241/ ... 그는 수사학 교사로 밀라노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강론을 듣고 매료되었다. 그리고 30세가 되었을 즈음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로 돌아와 주교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30년에 죽었는데 바로 반달족이 서로마제국을 짓밟아 들어오던 때였다.


247/ ... 기독교적 계시와 그리스 사상 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약 160-222)는 철학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크레도 쿠이아 압수르둠credo quia absurdum("나는 그것이 터무니없기 때문에 믿는다")이라는 말은 그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또 하나의 입장은 신앙과 이성의 일정한 공동 영역을 고취한 입장이다. 초기 신학자들 가운데 이 입장을 표현한 통상적 진술은 신앙이 인식론적 의미에서 "통행권[우선권]"을 갖는다는 견해였다. 신앙과 사상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면 신앙이 옳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가 취한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이 두번째 입장 내에 무얼 강조하느냐에 따라 견해차가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사유가 가능한 것은 바로 신앙 덕분이라는 의미에서 신앙이 우선권을 갖는다는 견해이다. 크레도 우트 인텔리감credo ut intelligam("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이 말은 계시와 신앙이 없다면 사람들은 인생의 본질적 측면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견해에 동조했다. 다른 또 하나의 견해는 신앙이 우선권를 갖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직 가장 최근에 받아들인 기독교적 계시들과 관련해서만 그렇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대부분 신앙과 이성은 독립적이며 동등한 위상을 갖는다. 그것들에는 각기 고유한 측면도 있고 공통되는 측면도 있으며, 이 공통의 영역에서는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룬다.


248/ 회의주의자들은 우리에게 확실한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제5장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확실한 지식이 가능함을 보임으로써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확실한 지식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네 영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1. ... 내가 의심하기 때문에 바로 의심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 방식은 약 1200년 수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란 유명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제9장 참조). 자아에 대한 주체의 직접적 확실성을 확실한 지식의 토대로 보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근대적" 특징이다.


249/ 2. ... 외부의 사물과 사건에 대한 감각 경험과는 반대로 내성內省은 우리를 확실한 지식으로 이끈다.


250/ ... 기억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언어적 표현은 원칙적으로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이끌 수 있다...


3. 아우구스티누스가 확실한 지식을 발견함으로써 회의주의를 논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세번째 영역은 수학이다...


4. ... 일정한 논리적 원칙들은 의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회의주의자들은 지식이 동시에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확실하기도 하고 불확실하기도 할 수는 없다고 전제하였다. 이것은 회의주의자들이 소위 모순율을 전제하였다는 것을 뜻한다(제4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과 실천 참조)...


251/ 이러한 논증들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성찰과 내성, 수학 및 논리적 원칙과 관련하여 확실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회의주의를 논박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감각과 외부 세계보다 내적 삶과 논리적 형식이 인식론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점도 강조하고자 했다...


255/ 의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의지가 우리의 정신적 삶에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본다. 물론 이성과 지식은, 가령 선택을 하는 경우에서처럼, 일정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의지가 이성보다 우선한다...


256/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동시에 의지를 이성이 좋은 것이라고 인식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동원되는 힘으로 보는 일반적인 그리스적 의지 개념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스인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이 의지에 우선한다는) 지성주의적 인간관을 가졌던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가 이성에 우선한다는) 주의주의적voluntaristic 인간관을 가졌다... 그는 사실상 감정이 많은 지성주의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의 삶에서 더 큰 역할을 하며, 나아가 많은 감정이 윤리적으로 큰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는 절대적 자유의지가 있음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57/ 그러나 만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과는 거의 정반대되는 학설을 제시하였다. 의지의 자유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이다...


266/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1225년 나폴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아퀴노 근처에서 태어났다... 20세 무렵 학업을 위해 파리로 갔는데 여기서 그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났고, 이후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밑에서 공부한 뒤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308/ ... 우리는 중세에 세 곳의 지성적인 문화중심지가 존재하였음을 알고 있다... 비잔티움과 라틴어권 수도원들 그리고 아랍의 문화중심지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서유럽에서 고대 지혜의 유산의 일부는 수도원에서 "동면"하고 있었다... 오직 교회의 시설들 안에서만 읽고 쓰는 기술이 보존되었다...


309/ 이 수도원 문화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문화였다...


... 교양과목 중에서는 주로 첫번째 그룹(트리비움 - "통속문학trivial literature"[이라는 개념이 이 밀로부터 유래함])에 중점이 주어졌다. 콰드리비움이라 불렸던 두번째 그룹의 과목들은 중세 초기에는 중요한 위상을 갖지 못하였다. 또한 고대의 과학 연구 문헌 대부분도 수도승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310/ 사회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대학은 12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창조물이었다. 이 시스템에서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란 말은 학생이나 교수의 길드guild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니베르시타스란 용어가 근대적 의미의 대학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에 들어서였다. 초기 대학들은 중요한 특징 하나를 공유한다 - 즉 그것들은 모두 크든 작든 도시에 위해 있었던 것이다. 시골에 위치한 수도원 학교들은 "폭발적인 교육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초기 대학들에서 이미 전문화의 흐름이 나타났다. 살레르노와 몽펠리에에서는 학생들이 의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였다. 볼로냐는 법학의 초기 중심지가 되었다.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는 샤르트르의 대성당 학교가 아르테스 리베랄레스 학습의 중심지가 되었다. 12세기 말 파리는 신학 연구의 중요한 거점으로 부상하였다. 옥스퍼드대학교는 초기부터 과학 연구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311/ ... 예를 들어 법학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스투디움 게네랄레studium generale[대학을 의미하는 중세의 명칭]는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전문화는 또한 많은 학생으로 하여금 모자란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대학으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주교가 되기 위해 파리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신학 외에 일반 법학과 교회법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볼로냐로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유랑학생들vagrants"은 중세 사회의 한 중요한 특징이다. 그들은 수 개월, 아니 심지어 수 년이 걸리는 고된 도보 여행을 감수해야 했다.


중세도시의 삶에서 대학은 곧 중심적 위상을 획득하였다. 1200년경 파리의 인구는 대략 5만 명 정도였다. 이들 중 약 10%가 학생이었다... 학생들의 봉기와 쟁의가 수년간 빈발한 후에 나온 1231년의 교황 칙서 파렌스 스키엔티아룸Parens scientiarum[학문의 부모]은 파리대학교의 "마그나카르타"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대학은 자체의 정관과 학칙, 교육과정과 학위 규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동시에 여러 대학의 학위 증서는 상호 동등하거나 적어도 "전환 가능"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313/ ... 볼로냐 대학교에서 행해진 4년 과정의 의학 수업 계획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매일 4개의 강의가 진행되었다. 1년차에는 아랍의 철학자 이븐 시나(아비켄나)와 그의 의학책을 공부했다. 2년차와 3년차에는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를 공부했다. 4년차에는 주로 그동안 배운 것을 복습했다. 인체 해부가 처음으로 행해진 것은 1300년경 볼로냐에서였다. 1396년 프랑스 왕은 몽펠리에 대학교에 사체 해부를 허용했다...


316/ ... 아바스 왕조의 제5대 칼리프인 하룬 알 라시드Harun al-Rashid(786-809)의 치세는 아랍 세계 최초의 광범위한 헬레니즘 르네상스의 출발점을 이룬다. 이것은 방대한 번역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초기에 대부분의 작업은 시리아어를 문화어로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317/ 번역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아랍어의 어휘를 확장하고 그리스의 개념들에 상응하는 철학 및 과학의 개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수사학과 시, 연극과 역사는 제외되었다. 아랍인들의 관심은 철학(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신플라톤주의), 의학, 광학, 수학, 천문학 그리고 연금술과 마법 같은 신비술에 집중되었다... 아랍인들이 습득한 것은 헬레니즘 문화만이 아니었다... 이미 9세기에 수학자 알 콰리즈미Al-Khwarizmi(약 800-847)는 산술 계산에서 인도의 부호들, 이른바 아라비아 숫자들을 사용하였다.


318/ ... 아랍인들은 8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종이 만드는 법을 배웠다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유럽에서 종이가 처음 생산된 것은 1150년경인데, 종이 생산에서도 역시 스페인에 살던 아랍인들이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319/ ... 위대한 이슬람 신비주의자이자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알 가잘리Al-Ghazali(1058-1111)는 여러 저작에서 이븐 시나의 신플라톤주의자를 공격하였다...


알 가잘리의 도전에 응전한 것은 이븐 루시드Ibn-Rushd(Averroes, 1126-1198)였다... 이븐 루시드는 코르도바에서 출생하였으며... 세르비아와 코르도바에서 법관으로 일했고, 말년에는 마라케시의 칼리프의 궁정 의사로 봉직했다...


320/ ... 그는 코란 속의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321/ ... 6세기 이상 아랍인들은 기술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서구보다 앞서 있었다. 그렇다면 왜 아랍 과학은 근대과학을 낳지 못하였는가?...


... 아랍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모두 이슬람교도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에 기초하여 작업을 하면서 문제들과 결과들을 "이슬람화"하지 않았다. 이것은 처음에는 용인되었지만 점차 종교 지도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12세기와 13세기에 종교적 압력은 더욱 증가되었다. 소위 외국의 학문은 종교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나 종교적 기능을 수행할 경우에만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정확한 기도 시간과 메카의 방향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천문학, 기하학과 산술학은 중요했다. 그러나 종교적 측면에서 볼 때 많은 학문 분야가 쓸모가 없거나 코란의 세계관의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스 학문의 이슬람화가 진전되면서 연구 분야의 제한이 초래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이슬람화가 15세기에 정체와 쇠퇴를 초래한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한다.


322/ ... 아랍인들의 핵심 교육제도는 마드라사였다. 11세기에 번성하기 시작한 이 학교들은 이슬람의 주요한 문화적 기관들이었다...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가 마드라사에서 교수로 일하였지만 그리스철학과 과학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독립적인 아랍의 과학이 아랍의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 및 정치 엘리트에 의해 제도화되고 인가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세 이슬람은 수공업자 조합과 상인 조합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제7장 자연과학의 발흥

331/ ... 귀납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반박될 수는 있지만 결코 완전히 확증될 수는 없다.


... 순전히 논리적 연역으로는 (논리적으로) 새로운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이미 전제들 속에 내포되어 있다...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은 가설과 연역적 추론과 관찰의 역동적인 결합에 놓여 있었다. 이 새로운 조합이 바로 가설연역법hypothetico-deductive method이다.


337/ ... 네 가지 유형의 선입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1. 종족의 우상idola tribus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선입견으로서 희망 사항을 쉽사리 실제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성향, 즉 추상물을 실재 사물이라고 생각하고, 사물들이 어떤지 깊이 궁구하지도 않은 채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그냥 믿는 성향이 그것이다.

2. 동굴의 우상idola specus은 각 개인의 독특한 성향과 교육과 배경으로부터 비롯된 선입견이다. 우리 모두는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 자신의 시각에서 해석한다!

3. 시장의 우상idola fori은 언어로부터 비롯된 왜곡들이다. 우리는 "운명"이나 "제1의 원동자"와 같은 표현들을 마치 그것들이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가리키는 말인 양 사용한다.

4.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은 철학적 전통에서 비롯되는 선입견들이다.


346/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뉴턴이 태어난 해인 1642년에 죽었다... 1589년 25세 때... 피사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2년 후 그는 보다 권위 있는 파도바 대학교의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1609년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새로 만든 한 발명품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에 자극을 받아 갈릴레이는 자신의 망원경을 만들었다...


352/ 왜 교회가 갈릴레이의 입장을 수용할 수 없었는지를 파악하는 일은 쉽다. 첫째, 그것은 성서해석에 관한 신학자들의 권위에 대한 암묵적인 공격이었다. 둘째, 갈릴레이는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셋째, 갈릴레이는 과학자가 우주에 대한 성서적 견해의 올바른 해석을 결정할 수 있다는 해석학적 입장을 대변하였다...


368/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생기론자들인 반면 갈리레이-뉴턴적 과학관의 추종자들은 생물학적 환원주의자들이다.


371/ 그렇다면 지구 중심적 세계관에서 태양 중심적 세계관으로의 이행 중에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


... 세상이 더욱더 "제집 같지" 않아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이러한 과학적이고 실존적인 경험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제9장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