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연
황종연, 신없는 자연 - 초기 이광수 문학에서의 과학, NRF-2011-32A-A00091.
145/ "동양의 유교주의와 서양의 문명주의를 비교해보니 동양에 없는 것이 유형의 것으로는 수리학, 무형의 것으로는 독립심, 이 두가지이다."(후쿠자와 유키치, 허호역,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이산, 2006, 239~240쪽; 鹿野政直, <福澤諭吉>, 淸水書院, 1967, 206쪽)
수학적 자연학이라고 하면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의 언어로 씌어져 있다는 갈릴레오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수학적 자연학은 수학적 수단으로 자연의 근원적 성질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철저화한 형태이자 서양과학에 있어서 전근대와 근대의 분수령을 만든 자연학의 혁신적 형태다. 근대 서양에서 자연을 수학적으로 기술한 최고의 과학 걸작은 물론 뉴튼의 물리학 저작이다.
146/ 유교에서 과학으로, 윤리에서 물리로 - 이것은 1910년대 이광수가 문명의 이름으로 희구한 조선문화의 변혁을 얼마간 설명해주는 공식이기도 하다.
153/ 조선이 일본 및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서양과학의 힘은 조선인에게 빠르게 인지되었다. 서양이 비서양에 대하여 보유한 지배력의 근원이 과학이라는 것, 조선의 부와 힘의 증대에 과학 연구와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갈수록 명백했다. 과학의 정신적, 물질적 결과를 접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에게 과학은 바로 문명이었다. 1910년대의 이광수는 뉴튼의 물리학과 다윈의 생물학을 증기기관 발명 등의 기술적 진보와 함께 당대 문명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학설에 친숙했다.(이광수, '문학의 가치', <이광수전집>1, 삼중당, 1963, 506쪽)
159/ 이광수는 산업 진흥을 조선의 긴급한 과제로 여겼고 산업 인력 육성을 위한 교육 혁신을 촉구했다. 하지만 과학의 산업적 효용은 그가 과학을 중시한 주요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물질생활의 측면보다 정신생활의 측면에서 과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과학의 진정한 의의는 "과학과 인생과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고 "과학정신"에 기초한 인생관을 가지도록 권고했다.('八字說을 기초로 한 조선인의 인생관', <이광수전집>17, 167쪽)
그에게 과학은 인간과 세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인간 생활을 합리적으로 영위하는 현대적 방식을 의미했다. 과학은 현대의 종교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과학관의 핵심을 찌른 표현일지 모른다. 인간 문화에서 과거에 종교가 차지하던 위치를 현재는 과학이 차지한다고 그는 보고 있었다. 그의 <신생활론>에는 "동양 구문화를 대표한 유교사상과 서양 구문화를 대표한 耶蘇敎사상과 서양 及 일본의 신문화를 대표한 과학사상"이라는 문구가 나온다.('신생활론', <이광수전집> 17, 544쪽) 유교, 기독교, 과학 삼자의 각축으로 인한 혼란은 그가 20세기 초엽에 관찰한 조선사상의 현실이었다.
160/ 이광수에게 생물학은 과학 중의 과학이었다.
161/ 나는 다아윈의 진화론이 마땅히 성경을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헤에겔의 <알 수 없는 우주>라는 책을 읽을 때에는 비로소 진리에 접한 것처럼 기뻐하였다.
'Struggle for life(살려는 싸움).'
'Survival of the best(잘난 자는 산다).' ('그의 자서전', <이광수전집>9, 432쪽)
이광수가 진리의 서(書)처럼 언급한 "헤에겔의 <알 수 없는 우주>"란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1834~1919)의 <우주의 수수께끼Die Weltraetsel>(독일어원본 1895~1899, 영역본 1902, 일역본 1917)를 말한다.
162/ 이 전체론적이고 진화론적인 우주론에서 헤켈이 강하게 펼친 주장의 하나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 관념은 과학적인 자연 이해와 양립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전능한 천지창조자는 천문학, 지질학, 물리학, 화학의 영역, 즉 비유기체적 자연의 全 영역을 통해 유효한 관념이 아니며, 생물학의 영역, 즉 유기체적 자연의 전 영역을 통해서도 역시 유효하지 않은 관념이다. 그 사려깊은 세계의 건축가이자 주재자라는 神人同形論적 관념은 자연의 영원한 철칙으로 대체되었다.
167/ 헤켈은 기독교적 형이상학이 이성과 과학에 대한 최대의 적이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헤겔이 "유기체 세계의 뉴튼"이라고 칭송한 다윈은 바로 유기체 세계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질서의 연원을 목적론적이고 초자연적인 세력들이 아니라 기계론적이고 자연적인 원인들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결정적으로 진전시킨 인물이다.
169/ 지연주의적, 기계론적 과학은 자연으로부터 신인동형론적 이미지들을 추방하고 모든 자연현상을 일정한 법칙에 따르는 물질의 특성과 운동으로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세계로부터 신성한 것과 신비한 것이 사라진다. 베버가 말한 의미에서 세계의 탈마법화disenchantment가 이루어진 것이다.(Weber, "Science as a Vocation", From Max Weber: Essays in Sociolgy, trans. and ed. H.H. Girth and C. Wright Mills,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46, p.139. Charles Taylors, 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Cambridge, Mass.: Harvard Univ. Press, 1989, pp.148~149)
172/ 1910년대 이광수는 당시 조선의 청년 엘리트에게 서양 근대과학이 가한 충격이 얼마나 심대했던가를 명확하게 예증한다.
176/ 문학은 뉴튼적, 다윈적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 생존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 세계에 대해 소원한 인간의 마음을 기록한다. 초기 이광수의 작품을 기점으로 한국 문학은 과학에 대하여 충정과 반심을 함께 가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