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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정 Mar 31. 2016

자기로부터의 여행

그곳이 그리운 날, 나는 여행노트로 여행을 떠난다



기록이 선물한 여행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_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인도가 선물한 천국 

분홍색으로 채워진 카페라니, 한가로운 오후에 포근한 햇살 한 줄기라니! 인도에선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포카라에서의 아주 보통의 하루 (2008, Pokhara)


네팔과 인도 여행을 함께 계획하고 있다면 먼저 인도로 들어간 뒤 네팔로 가라, 인도 여행에서 지친다면 인도 북부에 위치한 맥그로드 간즈(맥간)로 잠시 다녀오라. 이 두 곳은 인도가 '먼저' 이기에, 더욱 천국같이 느껴질 불변의 명제 같은 여행지이다. 먼저 다녀간 여행자들의 그 조언은 참말이었다. 국경만 넘었을 뿐인데, 네팔은 모든 것이 관대하여 그동안 달걀로 겨우 단백질을 보충하던 여행자에게 비로소 진정한 단백질이라 칭할 수 있는 단백스테이크를, 잠시도 편안하지 못했던 시선이 먼 설산을 바라보는 여유도 허락해주었다. 맥간은 또 어떤가, 밤새 버스로 몇 고개 넘었을 뿐인데.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자신의 손주 간식을 챙겨주듯 주섬주섬 공양 자루에서 과자를 꺼내 주고, 따뜻하게 손을 꼭 잡아주던 노승과 같은 친절한 티베트인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이 두 곳은 내가 만난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되리라, 여기에 나의 한 가지 명제를 덧붙인다. 그 천국 같은 네팔 여행을 끝내고서 나는 다시 인도를 향하는 국경을 넘었고, 맥간에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서 다시 망설임 없이 델리로 향했다. 내심 그 카오스 같은 인도가, 득달같이 달려들던 인도인들이. 네팔 여행을 다녀오고, 맥간을 다녀오고 나니 더욱 지옥같이 느껴지더라. 그래서 나는 스스로 향하는   '인도만의' 그 지옥이 그렇게 즐겁더라.고.  

    


여행노트로 떠나는 여행_ 네팔 히말라야&인도 맥그로드 간즈 여행노트(2008)

*당시 여행 노트를 가감 없이 옮겨본다. 



1. 히말라야 트레킹(Himalaya, Nepal) 2008. 3.17~3.21 

네팔이 내게 준 선물은 너무 많다, 트레킹 내내 의지가 되준 셰르파에게 약속했다. 다시 돌아와 당신과 히말라야를 걷겠다고, 그 약속을 꼭 지키고싶다(2008, Himalaya)  


히말라야. 꿈에서나 늘 꿈꿔왔던 안나푸르나에서 이제 마지막 밤을 보낸다. 너무 기대를 해 와서인지. 첫날 평이한 언덕들도, 누구나 힘들어한다는 난코스도 그저, 걷는 것에만 집중하여 스치듯 느껴졌다. only 캔들 하나에 의지한 밤들을 보냈고, 첫 밤을 보내고서야 천천히 그리고, 즐겁게 산을 즐길 수 있는 방법들을 하나씩 알아갔다. 오르는 것에 대한 막연한 원초적인 감정들이 이제까지 나의 산을 대하는 방법이었다면. 이곳은 하루에도 몇 차례 높은 급경사를 오르고, 무색하게 곧장 내리막을 향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곳에 그저 한 부분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할 것도 없었다. 해발 2,750m에서 내내 쏟아지던 눈이 갑자기 멈추고, 문득 개인 하늘 위로 고맙게도 안나푸르나 남쪽 봉우리를 볼 수 있었다. 또한 내내 지독히 추운 밤을 보냈지만 이것이 산에 들기 위한 당연한 입문이라 여기며 이곳에 있다는 그대로를 느낄 수 있어 기뻤다. 마지막 날,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다소 욕심을 부려 2일 코스를 하루 만에 다녀오는 호기로운 강행으로 지금 난 꼼짝도 할 수 없게 아프지만 안락한 전구 아래에서 이제는 웃을 수 있어 좋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곳과 가까이.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나를 어지럽게 하지만 난 식상하게도 이제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낮은 기온에 그만 카메라가 방전되어 사진을 남길 수 없었던 나는 더욱 히말라야 그대로의 모습에 집중할 수 있었고, 더욱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그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고맙다.      


(사진) 네팔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많고 많은 이유 중에 한 가지인 네팔 전통술인 뚱바. 발효된 붉은 좁쌀을 가득 채운 나무 컵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보글보글 술이 올라오는데, 배가 부를 정도로 먹고 또 우려 먹어도 그 진한 향은 여전하다. 코끝이 시린 날이 되면 더욱 떠오르는 그리운 시간이 있다. (2008, Kathmandu)



2. 맥간 트리운드 트레킹(Triund, Mcleod Ganj) 2008. 4.4  

(사진) '인도 속 작은 티베트'로 불리는 맥간은 인도 북서부 쪽에 위치한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해발 1,800m에 위치한 마을은 사계절 내내 설산을 마주하고 있다. 만국기 같은 색색의 타르초는 깃발에 새겨진 불경이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나가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2008, McLeod Ganj)



홀로 트레킹을 계획한 오늘. 이틀간 흐렸던 구름이 말끔히 걷히고, 그래서 더욱 선명해진 눈부신 설산을 볼 수 있었던 아침. 이렇게 축복받은 나는 풍부한 새소리에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나 거뜬한 아침을 먹고 트리운드 트레킹을 시작했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오르며 인적이 드문 두 갈래 길에서는 다행히 그때마다 도움을 받아 헤매지 않았고, 오르는 길은 너무나 평탄하여 조금씩 숨을 고르며 기분 좋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늦은 봄을 맞아 막 부화한 흰나비 떼가 햇살에 빛나 몽롱한 아름다움을 자아냈고, 붉게 핀 랄리구라스는 더욱 영롱하게 길을 밝혀주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아마, 나는 못하겠지만 그것보다 난 나만의 속도로. 내 의지의 시간으로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언뜻 정리할 수 있었고, 겨울을 준비하며 내내 일하는 동화 속 개미가 과연 추운 겨울 집 밖을 나갈 수도 없는 그 쓸쓸함을 어렵게 모은 그 식량만으로 위안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덧붙였다. 너무나 멋졌던 정상, 늘 아득하기만 했던 설산을 가까이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던 순간. 혼자서 트레킹을 왔다는 여행자를 둘러싸고 연신 'amazing' 극찬을 해주었던 정상에서 만난 인도인들. 유쾌한 그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 이제 막 트레킹을 시작한 사람들에게까지 'just five minute'를 외치며 내 방식으로 격려를 보냈다.  

(사진) 이 같은 환대를 받아본 적이 있었는가. 산으로 들어가는 지천이 붉은 꽃의 향연이다. 설산의 봄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랄리구라스. 새빨간 꽃이 군락을 이뤄 듬성듬성 산의 온기를 더해줬다 (2008, Triund)


(사진) 맥간에 머무른 동안 날씨에 따라 보이기도 이내 사라지기도 해 매일매일 궁금했던 설산. 그 곳을 바로 마주하던 순간, 그 동안 궁금했던 마음 따윈 덧없이 느껴졌다 (2008, Triund)



나를 만나는 여행


아주 가깝고도 먼 여행을 덮었다. 기억으로 남아있던 그곳과, 다시 기록으로 남아있던 그곳으로 떠나는 여행. 문득 그곳이 그리운 날, 나는 여행노트로 여행을 떠난다.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시간에도 여전한 그곳 모습에 반갑기도, 내심 고맙기도 하다. 내가 만난 사람들, 여정에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이 아직 색이 바래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이제 막 배낭여행을 시작한, 겁 많고 겁 많은 한 여행자가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어린 짐승마냥 잔뜩 웅크린 채 본인의 여정을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음마를 떼듯 배워나가고 있다. 내가 낯설다. 그래서 20대의 내가 반갑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 여행노트로 떠나는 여행은 내게 매우 특별하다. 비록 현재의 그곳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그리고 나 또한 많이 변하고 말았겠지만. 가끔 장소를 떠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여행이 있다. 그 여행은 아마 자기로부터의 여행, 나를 향한 여행이 되겠다. 

여행노트로 여행을 떠나며 다시금 그때의 마음을 더듬어 본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언제고 다시 이어지기를 바란다 (2018, 여행노트)




사람들의 게으름과는 대조적으로 망각은 탐욕스러워서 추억을 조금씩, 그러나 용서 없이 파먹는다 _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역 『백 년 동안의 고독』 문학사상,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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