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11. 겪어보기 전에는 누구도
미팅지옥이 시작되었다.
삼촌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과 약속을 했다. 요즘 잘나가는 슈퍼 강연자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B to B 업체 대표와 만나 조언을 듣고, 저녁때는 신문사, 방송사, PR 회사 등의 이사들과 만찬을 한 다음 야밤에는 투자에 관심이 있는 지인들을 불러 술을 마시는 식이었다. 거의 모든 자리에 구와 내가 동석했다.
강의할 때를 제외하곤 내내 작업실에 처박혀 있다가 일주일에 한번 정도만 사람을 만나는 나로서는 현기증 나는 스케줄이었다. 한 달간 절밥을 먹다 내려와서 하루종일 라면만 먹는 날의 기분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주에는 또 누구를 만날까, 사는 건 끈질긴 외로움이로구나, 라고만 생각했지, 만남의 홍수에 익사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판단력이 공기인형처럼 흔들렸다. 하루종일 속이 메슥거렸다. 술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회사의 상호를 정했다.
삼촌과 구가 <문화발전소>를 밀었다. 나는 씨플랜트(C-plant)가 어떻겠냐고 했다. 삼촌이 너는 소설 쓰는 아이가 왜 영어를 좋아하냐고 타박했다. 구와 명이 메인은 문화발전소로 하되, 씨플랜트를 병기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구가 말했다.
- 이제 BI CI를 만들어야지.
나는 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바로 물었다.
- 그게 뭔데.
- 일종의 회사 로고?
나는 민망함을 무마하기 위해 다시 물었다.
- 스펠링이 뭔데?
전혀 민망해하지 않는 답변이 돌아왔다.
- 뭔지만 알면 되는 거 아니야? 인터넷에 찾아보시든지.
삼촌과 구가 왜 친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경험형, 직관형이었다. 자신이 직접 본 것으로 판단하고, 그때그때의 직감을 신뢰하는 스타일.
책과 자료를 근거로 판단하는 나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 남의 말만 듣고 어떻게 사업을 해요.
- 나는 평생 그렇게 사업했는데?
- 판단의 풀(Pool)이 자신의 경험치에 한정되잖아요.
- 그럼 뭐 너처럼 책벌레 하라고? 항상 한발 늦는 게 책이야. 상대는 이미 강 저쪽에 가 있는데 이제 뛰어들면 뭐하나? 옷만 적시지.
삼촌은 내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나이 지긋한 학자를 영입했다. 장도선이라는 사회학자로, 최근 여행과 관련된 인문학 강좌를 하고 있었지만 스타강사는 아니었다. 나는 삼촌이 담배를 피러나간 김에 따라 나가 따졌다.
- 저 사람이 왜 등기이사를 해요?
- 인문학이 대세잖아.
- 저 사람 인문학만큼은 저도 할 수 있어요.
- 좋은 형이야.
- 좋은 거랑 사업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삼촌은 나를 보고 허허 웃더니 말했다.
- 발이 넓어. 정경계에 아는 사람이 많아.
- 그게 인문학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나도 말해놓고 이게 무슨 병신 같은 말이지 싶었다.
- 정경계 조찬회에서 인문학 강좌를 해보려고 해. 그러려면 네트워크가 필요하잖아? 네가 네트워크 끌어다줄래?
- 그럼 진작 그렇게 얘기하셨어야죠.
그렇게 해서 씨플랜트는 네명의 이사로 시작됐다. 구가 이십대, 내가 삼십대, 삼촌이 오십대, 장선생님이 육십 대로, 나이가 골고루 배분된 점은 마음에 들었다. 구태의연한 조직은 싫었다. 다양성이 확보되고 위계가 없는 조직이었으면 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표를 구에게 맡기기로 했다.
장 선생님이 회사의 인삿말을 썼다.
[ 새로운 별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내면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혼돈이야말로 문화발전소의 에너지입니다. 문화는 안정적이고 편안한 그 무엇으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갈등하고 긴장하고 격투하는 혼돈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문화는 왔습니다. 저 혼돈의 이탈리아가 인류의 문화창고에 가장 많은 작품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평화롭고 안정적인 스위스는 인류의 문화창고에 시계 이외에는 특별한 문화예술작품을 추가하지 못했습니다.
당인리에는 화력발전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당인리 화력발전소는 전기발전의 운명을 다하였습니다. 문화발전소 씨플랜트는 인간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문화를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하는 회사로 출발하였습니다. 문화발전소는 현대의 불안, 인간 내면의 흔들림, 미래의 불확실 등으로 중첩된 혼돈을 모든 가능성의 에너지로 바꾸는 발전소입니다. ]
스위스처럼 행복한 나라에는 독창적인 예술이 없다니, 생각해보지 못한 점이었다. 나는 장 선생님을 무시했던 것을 반성했다. 혼돈이 창조의 밑거름이라는 직관에서부터 한국의 위기를 예술의 기회로 바라보는 시대인식에 이르기까지, 역시 사람은 섣불리 판단할 게 아니었다. 장선생님의 인사말에서 나는 C-plant를 단적으로 설명할 제목 하나를 얻었다.
Chaos-plant
즉, 혼돈의 기획.
똑같은 방식으로 C-plant를 조금씩 변형하여 소개글을 써보았다. 마치 예전에 한번 써봤던 것처럼 글이 술술 써졌다.
C-plant는 인문과 예술과 문화가 함께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입니다.
Culture plant(문화 발전소)는, Consilence plug(통섭의 플러그)입니다.
다음의 네 가지 소제목이 금세 딸려나왔다.
Creative Play (창조적으로 놀자)
Contents Plant (콘텐츠 공장)
씨(seeds) plant (종자 연구소)
C Pedagogy (대안의 대안으로서의 교육)
내가 그렇게 씨플랜트의 소개글과 경영철학과 기본이념 등등을 써내려가는 동안, 명 실장님은 내 옆자리에 앉아 법인을 등록하고, 네이버와 다음과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 씨플랜트의 계정을 신청하고, 유선전화를 개설하고, 각종 파일책들을 만들었다. 나는 오후에 오지 않으면 미팅 중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명 실장님은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혼자이건 말건, 매일매일 업무보고서를 썼다.
어찌나 공들여 쓰는지, 어쩌면 업무 보고서 쓰기가 명실장님의 가장 중요한 업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매일매일 썼다.
전화 받을 일조차 없는데도 명 실장님의 업무 보고서는 늘 빽빽했다. 무슨 거대프로젝트라도 꾸리고 있나 해서 읽어보면, 새로 산 비품의 목록, 사무실 청소, 화장실 청소, 다기 세트 완비, 보일러 점등 소등, 법인카드사용내역 및 영수증 파일책 제작 등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일을 혼자 결정해서 혼자 진행했지만 가끔씩 판단이 필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상임이사인 나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이를테면,
- 작가님? 호치키스를 구입해야 하는데, 3호가 좋을까요, 5호가 좋을까요?
그러면 나는 다른 대답을 하여 결정을 유보하곤 했다.
- 호치키스는 일본의 문구회사 상표 이름이니 스테이플러라고 하시든지 소형 거멀못 발사기라고 부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때로는 도무지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는 질문도 있었다.
- 작가님?
- 네?
- 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회사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복제불가능한 상품을 만들려면 어떤 점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대답은 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때만 해도 땅에 엎드려 보는 것과 하늘에서 날며 조망하는 것을 둘 다 할 수 있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할 회사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제대로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