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12
어느 날 사무실에 여성 한 명이 찾아왔다. 구 대표가 데리고 온 여자였다. 누구냐는 눈짓을 보냈더니 Bi Ci를 만들어줄 디자이너라고 했다. 받은 명함에는 <파랑 클리닉> 전속 디자이너 & 일러스트레이터 김윤서, 라고 적혀 있었다.
- 파랑클리닉이 뭐죠?
- 심리상담클리닉인데요, 치료기관은 아니고요, 예술체험과 놀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심리분석이 이루어지도록 해서 병원에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도 부담스럽지 않게 상담에 임하실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크게 낮춘 교육 프로그램 회사입니다.
곱상하게 생긴 여자가 설명을 똑 부러지게 하는 것이었다.
- 그림으로 심리분석을 해서 원하는 사람에게만 의사나 상담사에게서 상담을 받을 수 있게끔 프로그램을 짜놓은 것인가요?
- 어떻게 딱 듣고 바로 아시네요? 네, 그게 다인 건 아니지만 맞습니다.
얘기를 듣자마자 피드백하는 것을 보면 꼬이거나 부정적인 류는 아니었다.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이제 시작하는 회사라니까 원래 삼백만 원쯤 한다는 디자인비를 백칠십만 원으로 깎아주었다. 너무 깎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예술인을 위한 사업인데 나머지는 기부금 조로 생각해달라고 했다. 얼굴이 작고 하얬다.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때마다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회의는 금방 끝났다. 한글 로고, 영문 로고, 회사 소개서, 명함을 모두 만들어주기로 했다. 다 좋았는데, 여행을 가기로 해서 이 주일 안에 작업을 끝마쳐야 하니 피드백을 빨리 주셔야 한다고 했다. 명 실장님이 물었다.
- 어디로 가시는데요? 외국?
- 네, 발리요.
이번에는 구 대표가 물었다.
- 남친이랑요?
- 엥? 어떻게 아셨어요?
- 얼마나 됐는데요?
- 일곱 달이요.
- 에이, 일곱 달이면 뭐, 모르는 거네요.
- 네?
구 대표는 디자이너가 돌아가고 명이 잠깐 나간 사이 말했다.
- 노 작가님 스타일 맞죠?
- 뭐가요?
- 김윤서 디자이너. 길쭉하고 마른 여자 좋아하잖아요. 맞죠?
- 어, 어떻게 알았어요?
- 내가 평소에 다 또…. 딱 이 여자다 싶어서 데려왔는데, 남친이 있다니 안타깝네요. 하지만 뭐, 알고 지내다 나중에 기회 되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예전 같으면 거부감을 느꼈을 말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언제 한 번 보자거나, 소주 한 잔 마시자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을 경멸하는 편이었다. 진심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딱 열 번, 먼저 연락해보았다. 열 명 중 셋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고, 여섯은 핑계를 댔다. 한 번 핑계를 댄 여섯 중 다섯이 또다시 핑계를 댔다.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친구는 대단하다고 했다. 뭐가? 내가 다 연락해본 게?
- 아니.
- 그럼.
- 열 명이 다 답장을 했다는 게.
지금은 아니었다. 헤어질까 봐 지방대 교수를 마다해도, 헤어지고 나서도 육 개월씩 일 년씩 의리 지킨답시고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아도, 돌아오는 것은 배신이요 남는 것은 외로움뿐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어렵겠다고 말하면 다시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지조도 없고 믿음도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한 곳에 두 발목을 모두 담그면, 그럼 그렇지, 네놈이 여기 아니면 어딜 갈래? 따위의 소리나 듣기 딱 좋았다. 말이건 마음이건 지키는 놈이 병신이요, 신경 쓰는 놈이 오지랖이었다.
양다리가 뭐야, 문어발로도 충분치 않았다. 머리카락을 발이라고 속여서라도 일단은 모두 걸어두는 게 중요했다. 그중에 어떤 게 진짜 기회가 될지 모르니까. 풀(pool)이 넓어야 기회를 창출할 수 있으니까.
인생은 확률이니까.
장 선생님의 영입으로 자신들이 사실상 사업의 중심에서 배제되었음을 알게 된 현지와 밤비는 점차 달아오르고 있었으나 구의 조치로 금세 가라앉았다. 구가 현지와 밤비를 상대로 소개팅 프로젝트 시작한 거였다. 무한리필처럼 무턱대고 해준 것은 아니었다.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을 때에나, 두 사람의 관심을 딴 데로 돌려야 할 무렵에 소개팅을 주선하거나 남자가 잔뜩 있는 술자리를 개최(?) 했다. 사실 그런대로 괜찮은 애가 한 명씩 나왔을 뿐 나머지는 죄다 쭈구리들이었지만 구의 페북 친구 콜렉션이 광활하고 화려하기까지 하여 앞으로 어떤 남자가 걸려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 심리가 생기자 현지와 밤비는 구에게 거꾸로 잘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내가 구였다면 어땠을까. 가장 괜찮은 남자 몇 명을 골라 힘겹게 설득해서 소개했겠지. 걔들은 보나 마나 애프터를 하지 않을 게고, 현지와 밤비는 앞으로는 그런 남자애들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임을 빤히 눈치채고 더는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겠지.
연애도 확률이니까.
확률은 생존이니까.
전여친은 나를 두 번 떠났다. 한 번은 육 개월, 또 한 번은 십 개월. 하필 그 기간마다 내 생일이 포함돼 있는데다 마지막에는 생일을 이주 앞두고 헤어져서 나는 그녀와 오 년을 사귀는 동안 생일을 같이 한 날이 하루뿐이었다.
나는 그녀는 결코 모를 그녀의 몸짓이나 행동을 사랑했는데 어느 날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그녀의 무의식을 보고야 말았다. 그런 행동을 볼 때마다 나는 밤새 울어버려서 육 개월 뒤 그녀와 헤어질 때는 한 방울의 눈물도 더는 흘리지 않았다. 헤어지기 두 달 전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 나는 네가 떠났을 때에도 너와 의리를 지켰다고 말하자 그녀는 쏘아붙였다.
- 정말 나 때문에 그런 거 맞아? 너를 맘에 들어 하는 여자가 없던 거 아니고?
당장 헤어졌어야 했다. 화를 내거나, 직접적으로 요구하기라도 해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냈어야만 했다. 나를 좋다고 했던 여자들에게 전화해서 더블 데이트건 트리플 데이트건, 바람이라도 실컷 피웠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렇게 당당하게 나를 떠나지는 못 했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한 말에 후회라도 하면서 떠났을 거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이나 짓보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을 몸짓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여력이 없었다. 그녀의 무의식에 비하면, 그런 것들쯤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삼 년이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말이나 행동은 제때 사과받으면 잊을 수 있지만, 순간적인 표정이나 몸짓 같은 것은 어차피 평생 잊지 못한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잠버릇이 보고 싶어서 잠들지 못하던 사내가 혼자가 되어서도 잠들지 못하는 것처럼. 언제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불면증 같은 기억들.
앞으로는 다르게 사는 거다.
아쉽게도 김윤서 씨는 남친이 있지만, 이 사업을 하는 동안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이곳을 거쳐갈 테고, 그렇다면 나에게도 좋은 여자를 만날 기회가 많아지는 것일 테지.
운명 같은 게 어딨어.
다 우연의 집적이지.
한 사람만 바라보며 훌륭한 사랑을 하겠다고 덤비는 건,
전재산을 들고 큰돈을 벌겠다고 설치는 개미투자자와 다를 게 없지.
반만 사랑한 사람은 반만 잃지만,
완전히 사랑한 사람은 모두 다 잃는 거지. 그리고 아바(ABBA)의 노래처럼,
Winner takes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