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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영교 Feb 02. 2021

사습하기

#0 언어생물도감

Aloys Zötl, <호화로운 동물 un somptueux bestiaire réalisé>, 1881



1

무수히 많은 동물들 가운데 나를 사로잡은 동물은 사슴이었다.

단단히 벌어진 어깨,

나비도 날아와 낮잠을 잘 것 같은 얌전한 콧날,

바람의 귓속말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쫑긋한 귀.

사자와 호랑이 앞에서도 서두르지 않는 침착함까지.


2

일곱 살 때였다.

백합유치원 벽면에 낱말카드들이 줄지어 붙어있었다.

수많은 낱말카드들 중에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카드는 사슴,이었다.

몇 번씩 사슴을 옮겨 적으면서 사슴, 이라는 글자와 사슴의 모양이 얼마나 닮아있는지 놀라곤 했다.

그 무렵에 나는 글자에 매혹되었다.

글자는 빛깔을 품고, 체취를 풍기고, 표정을 가진 신비한 동물처럼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그 글자라는 새로운 종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지냈다.


받아쓰기 시험이 있는 날이면 사슴을 기다렸다.

사슴이 낱말로 나오기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리고 어느 날. 1번 코끼리. 2번 호랑이. 3번 다람쥐. 4번 사슴. 손에 쥔 연필을 있는 힘껏 쥐었다.

'ㅅ'을 쓰고 'ㅏ'를 썼다. 'ㅅ'을 쓰고 'ㅡ'를 썼다. 그리고 'ㅁ'에 두 개의 귀를 그렸다.

사습. 


3

사슴이 문제로 나올 때마다 나는 100점을 받지 못했다.

사슴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에게만큼은 사습이었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사습.

두 뿔을 세우고 있는 사습.

그 뒤로 나는 나만의 낱말들을 채집해나갔다.  

인중은 인즁이었고,  흰색은 휜 색이었다.

커나가면서 나의 단어들을 모아두는 단어장을 만들어 온갖 낱말들을 채집했다.

커나갈수록 단어장 안에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언어 생물들은 기묘한 생태계를 이루었다.


4

이런 나의 낱말 채집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두터워져 갔다.

고등학생 때 당시 학교 교장선생님이 번역한

<미학의 기초와 그 이론의 변천>라는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손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형이상학, 존재, 유물론, 관념론, 이성과 같은 낱말들을 처음 만났다.

어떤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밤늦게까지 사전을 뒤져 새로운 종을 만났다는 흥분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페니스 파시즘>이라는 책도 그러했다.

가부장제, 남근 중심주의, 강간 문화, 파시즘, 가사노동과 같은 낱말들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단어장에는 새롭게 추가된 신비한 낱말들로 가득했다.

처음 만나는 낱말들은 나를 온종일 떨리게 했다.  


나는 일기 쓰기를 그만두고 낱말 채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세계에 널려있는 온갖 낱말들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책 속에 살고 있는 신비로운 생물들을 채집하기 위해 온갖 책들을 뒤졌다.

그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책들은 시집과 철학책이었다.

시인들이 돌보고 있는 낱말들의 숲 속에서 각죽거리다, 굴신스럽다, 무람없이, 봉분, 야멸찬, 아름드리 같은 생물들을 채집했다.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현존, 기관 없는 신체, 에티카, 헤테로토피아, 잔존과 같은 생물들을 채집했다.

그리고 밤이면 채집해놓은 생물들이 빼곡한 단어장을 펼쳐 어떤 낱말은 필사적으로 외웠고, 어떤 낱말은 그저 감상하기도 했다.  


5

그랬던 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낱말을 받아쓰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채집한 낱말들 중에 가장 생기로웠고 다채로웠다.

아이의 말을 받아 적고, 옮겨 적으면서 언어에 대한 생각에 더욱 골똘했다.

인간이 어떻게 언어를 익히는지.

언어가 어떻게 삶을 이끌고 가는지.

언어가 어떻게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이 글은 내가 채집한 아이 입에서 갓 튀어나온 언어 생물들의 기록이다.

내가 보살피고 있는 언어-생물 도감쯤 되겠다.

내 마음껏 착각하고, 착오하고, 착시하고, 착청하며

내 최초의 언어 생물인 사습과 함께 썼다.


언젠가 사습을 만나게 될 아이,

그 아이를 위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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