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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영교 Mar 25. 2021

식인의 형이상학, 1~4장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후마니타스, 2018

1

옆집에 개가 산다. 옆집에 어떤 생물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건 개-소리다. 낑낑거리고, 문을 긁고, 짖는다. 나에게 옆집의 생물들은 오직 '기척'으로 존재한다. 


2

기척으로 존재하는 ‘희미한 존재자’는 금방 잊혀진다. ‘그것’은 나에게 실감나는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유의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는다. 기척의 존재자들은 “침묵 속에 가두”(95쪽)어져 있다. 이러한 기척으로 남아있는 존재자는 나의 도착적pervers 극장(15쪽) 위에서 “불쌍한 개가 오늘도 주인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구나.” 생각된다.  


3

<식인의 형이상학>을 읽으면서 ‘나’라고 가정된 ‘나’는 다르게 감각하고 사유해보자 마음 먹었다. 까스뜨루가 전해준 "강도적으로 인격이며, 잠재적으로 인격"인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가득 찬 실감나는/활기찬animate 세계를 떠올렸다. 기척의 존재자-개를 떠올렸다. 변증법적 중력을 거스르고 떠오르는 기분으로. 창문이 열리고 “얼굴을 파먹어들어가는 우주의 바람”(이진경)을 맞는 기분으로. 


4


옆집의 주소로 

하얀 가발과 

제2의 얼굴이 왔다.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온 

초대였다. 


-신해욱, 방명록 中에서 


5

존재-기척을 인식하는 것. 옆집 개를 대상(사물)으로서 외부화/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화하기. 즉, 인식되어야 하는 것의 시점을 취하기. 탈주체화하기. 누군가의 시점 취하기. (49쪽)  다른 유기체가 가진 관점에 대한 세심한 주시attentiveness 하기. (에두아르도 콘) 손끝을 주시하듯, 호흡을 주시하듯, 발끝을 주시하듯, 요가하듯.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온 “하얀가발”(다양체)과 “제2의 얼굴”(탈주체화)의 초대를 믿기. 그러고 보니, 옆집 개가 보내온 선물은 무척 흥미로웠다.    


6

3층 계단을 올라가면서 옆집 개의 기척 주시하기.(개-자기의 문앞으로 다가오는 소리) 방에서 음악을 틀어놓았을 때 옆집 개의 기척 주시하기.(벽을 긁는 소리) 키보드를 두드릴 떄 기척을 주시하기.(소리없음)  생각은 이어진다. 내 방에 틀어놓은 존 루이스의 바흐 평균율 연주를 즐기는 나와 바흐적 진동으로 마사지를 받는 개.  나-자기의 키보드 소리에 맞춰 방바닥을 걷는 개-자기의 소리를 나란히 두고 움직이는 개. 


7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나는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저 개와 나를 여전히 갈라놓는 “심연의 균열”(데리다)는 어쩌나. 알아들을 수 없는 “절대적 타자들”로서의 “사자”는 어쩌나. (비트겐슈타인) 통약불가능하다고 여겨지게 만드는 생각의 습관들은 어쩌나. 느낌의 질서는 어쩌나. 


8


제 2의 얼굴에 

하얀 가발을 쓰고 

난색을 표한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야." 


-신해욱, 방명록 中에서 



9

감각적 혁명, 이해했지만 그것이 나의 신체를 어떻게 바꿔어놓는지 겪지 못했다. “사실 다른 사람이야.”를 말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지 못했다. 길을 걷다 가로수들을 봄. 저 나무-인간들은 나를 어떻게 표상하고 있을까. 모르겠다. 표상을 매개하는 이미지/신화/서사/샤먼적/애니미적/토템적 기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굳이 한다. 훈련. 감각연습. 사유연습. 나는 연습 중. 빌 에반스도 평생 연(구-학)습에 연습했음. 재규어가 될 때 까지. 


10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방식은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방식과 같지 않았다.”

  -와그너(wagner, 1981, 20)


11

참과 거짓의 구분을 지을 수 없는 모호함. 모든 의미들이 다양체로서 접속되어있는 동의적 애매함. 까스투르는 이 “애매함은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수립하고 추동하는 것”이라면서 “애매함은 (결여라는 의미에서) “해석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력 해석의 “과잉”이“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우주론에서 상이한 종들의 실재적 세계는 그들의 시점에 의존“한다고 한다. ”그 세계 일반은 그런 시점으로서의 종들이 서로 갈라지는 추상적 공간이기 때문“에 사이에 있다,(inter esse)고 한다. (88~95쪽)


11

애매함은 오류, 오해, 거짓이 아니라 관계의 기초 그 자체인데, 이 관계는 언제나 외부성과의 관계이고, 자신의 기초 자체를 (자기 내에) 함축한다.(...) 여기서 핵심은 몰이해라는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양쪽의 몰이해가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초월론적 사실”이다“.(...) 애매함은 전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제를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애매함은 변증법적 모순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애매함의 종합은 분리접속적이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96~97쪽) 

-->‘감응’ 개념과 유사. 


13

개가 긁고 짖는 소리가 개-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들려주고 있다는 것.  이것은 하나의 살아-있는 기술. 살아-있는 기호. 살아-있는 생각. 작은 차이들을 생산하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연속적 변이의 안티 나르시시즘. 무수한 자기들. 윤곽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주름 지우고 조밀하게 만들고 무지갯빛으로 반짝이게 만들고 회절시키는 것.(22~29쪽) 다종적/동물적 전회.(헤러웨이) 



14


우리 집에 가자 

우리 집에는 

이름이 아주 많아. 


-신해욱, 방명록 中에서 


15

옆집의 개는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라고 강요한다. 다른 자기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보라고 다그친다. 가능세계. 우주론적 정치학, 다종적 윤리학, 그리고 역사적으로 우연‘할’ 미학. 


16


세수를 한 얼굴로서 

나는 옆집을 찾는다. 


-신해욱, 방명록 中에서 



17

똑, 똑, 똑 


거기에 계시죠? 



18

초험적 경험: 어둠의 경험.(들뢰즈) 없는 얼굴에 세수하는 경험.(신해욱) 감응의 응결물로서 예술작품들은 초험적 경험을 통해 주어진 감각과 생각을 넘어서게 하며, 이는 다른 삶을 향해 난 문을 (이진경) 여는 경험.  


19

바로 뒤에서 

얼굴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해욱, 방명록 中에서 






20 

<쪽 요약>


5~16

-관대한 가부장주의적 주체로서의 서구

인류학 이론들이 도입한 개념, 문제, 개별체, 행위자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들은 그 이론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사회들 (또는 인간집단들이나 집단들)이 가진 풍부한 상상적 힘poivoir에서 자기 원천을 찾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관점으로 이동할 수는 없을까? 인류학의 독착성은 “주체”의 세계와 “대상”의 세계에서 유래하는 개념화와 실천 사이의 동맹, 언제나 애매하지만 많은 경우에 풍요로운 결실을 안겨 주는, 그러한 동맹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

그래서 <안티 나르시스>의 질문은 인식론적, 즉 정치적이다. 

(…)인류학은 자신의 새로운 임무, 즉 사유를 영속적으로 탈식민화하는 실천-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임무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태생부터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것을 선호하는 인류학은 도착적pervers 극장일 수 밖에 없다는 주장(…) 그 도착적 극장에서 “타자”는 언제나 서구의 추악한 이해관계에 따라 “재현”되거나 “발명”된다. 어떤 역사학이나 사회학도 이러한 주장이 관대한 가부장주의라는 것을 은폐할 수 없다. (언뜻 보기에 서구의 강력한 자기비판인 것 처럼 보이지만, 서구 주체와 비서구 대상 사이의 가부장적 위계구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식의 자기비판이 관심을 갖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가면 아래” 숨겨진 서구인 자신일 뿐이다, 주석 5) 

비유럽적 전통을 가진 인간집단에 대한 모든 “유럽적” 담론이 마치 “타자에 대한 우리의 재현”을 밝혀 주는데에만 쓰이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이는 이론적 탈식민주의라는 것을 궁극적 수준의 자기종족중심주의로 만드는 일이다. 언네자 ‘타자’ 속에서 ‘동일자’를 보았던 나머지(타자의 가면 아래서, 우리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바로 “우리”라고 말했던 나머지) 사람들은 결국 우리를 목적지로 곧장 인도해주는 경로를 단축시키는 것에만 만족하게 되었고,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 즉 우리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 


16~20

-외부 인류학과 나르시스 

반대로 참된 인류학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미지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다른 문화에 대한 모든 경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문화를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상적 변이를 넘어, 우리의 상상력을 변이시키는 일이다. 인류학적 연구로부터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론들이 정식화되는데, 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회들과 문화들이 그 이론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 더 명확히 말하자면 그 이론들을 함께 생산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한다. (.....)

우리가 지지하는 입장은 인류학이 자유로운 바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학은 이성의 외부화라는 기획에 계속해서 충실해야만 한다. 외부 인류학 exo-anthropologie이란 “현지의 과학”이다. (.....)

인류학이란 자신이 연구하는 집단들이 가진 종족 인류학이 담론적으로 일그러진 한 가지 형태 anamorphose discursive라는 것. 관점주의와 다자연주의라는 아마존의 일반개념을 사례로 들면서 우리가 연구하는 집단의 고유한 사유 스타일이 인류가의 원동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오이디푸스가 정신분석학의 기원 신화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한다면, 우리 책은 인류학의 수호성인이나 후견 정령의 열할을 할 후보로 나르시스를 제안. 


21

-고유함없음의 고유함으로서의 인간

배제 행동은 인간종을 인류학적 서구의 생물학적 유사성으로 만들고, 서구와 다른 종 및 인간집단을 모두 결핍을 나타내는 공통적 타자성 속에서 뒤섞어 버린다. 실제로 무엇이 타자와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지 자문하는 것은 (다른 종과 자른 문화들에 속하는 “그들”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니까) 이마 하나의 대답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거부하며 “인간”의 본질이란 없고, 그의 실존은 그의 본질에 앞서며, ‘인간’의 존재는 자유와 비규정성이라고 말할 필요는 결코 없다. 오히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 이유들 때문에 시치미를 떼지 않고서는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한 질문이 되어버렸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용어로 말하자면, 고유한 것을 전혀 갖지 않음이 ‘인간’의 고유함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지 않고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22~29

-소수 인류학에 관하여 

서구 형이상학은 진정으로 모든 식민주의의 원천이자 기원 fons et origo 이다. 문제가 바뀌자마자, 그것에 대답하는 방식도 바뀐다. 즉, 소수 인류학은 거대 분할자들에 맞서 작은 다양체들을 증식시킬 것이다. 이 작은 다양체들이란 작은 차이들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연속적인 변이의 안티 나르시시즘이다. 또한 소수 인류학은 목적 지향적이거나 완전한 인간주의들에 맞서, 인간성을 별도의 질서로 구성하길 거부하는 “종결 불가능한 인간주의”를 증식시킬 것이다. 내가 더욱 강조하려는 것은 다양체를 증식시키기다. (…)  윤곽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주름지우고 조밀하게 만들고 무지갯빛으로 반짝이게 만들고 회절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

내 세대는 이국적인 인간집단에게 우리의 철학이 스스로 해체되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그 대신 지금 무대의 전면을 차지하는 것은) 경이로운 귀환을 통해 나타난 그들의 철학이다. (레비 스트로스) (…..) 목적지도 이중적이다. 첫째 사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를 실행하는 것으로서의 인류학이라는 이상에 접근하는 것, 둘째 철학적 방식과는 다른 개념 창조의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

종 사이에 (성립하는) 관점주의, 존재론적 다자연주의, 식인의 타자성은 원주민적 타인류학alter-anrtho-pologie의 세가지 측면을 형성한다. (…) 우리 연구는 아마존의 세계시민주의에 관한 것으로서, 실재적인 것에 내속되어 있는 관점적 다양체라는 일반개념을 겨냥한다. 


32~35

-레비 스트로스의 예시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몇 년이 지난 후, 대 안티야스 제도에서 스페인인들이 원주민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탐색하려고 조사단을 파견하는 동안, 원주민들은 백인의 시체도 썩는지를 오랜 관찰을 통해 검증하려고 백인포로들을 물에 빠트리는 데 열중했다. (레비 스트로스, 1943/1952, 384. 인종과 역사) 


바로크적 알레고리(…) 자기종족중심주의(…)타자의 인간성을 손상시켜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우위에 둔다는 사실은 그렇게 하찮게 여겨지던 타자와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즉, ‘동일자’(유럽인)의 타자는 자신이 ‘타자’(원주민)의 타자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므로, 그 ‘동일자’는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타자’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 유럽인들은 원주민이 동물이라고 선언한 반면, 원주민은 유럽인이 신이 아닐까 의심하며 만족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양쪽 모두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원주민의 태도가 확실히 인간에게 더 마땅한 것이었다.”고 결론내린다. 

어쨌든 우리는 (서구와 원주민 인류학의) 이러한 비평형에 관한 성찰을 통해 다음과 같은 가설에 이르게 되었다. 즉, 신체와 영혼에 부여된 기호학적 기능이 전도되어 있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론적 체제들은 서구에서 가장 널리 펴져 있는 존재론적 체제들과 갈라진다는 것이다. 안티야스 제도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스페인인들은 영혼의 차원에, 원주민들은 신체의 차원에 주목했다. 유럽인이 원주민도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은 결코 없었다. (동물도 역시 신체를 가지고 있다.) 원주민은 유럽인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결코 없었다(죽은자의 유령과 동물도 역시 영혼을 가지고 있다). 유럽인의 자기종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도 자기의 신체에 살고 있는 영혼과 형식적으로 유사한 영혼을 포함하는지 의심하는 데서 성립했다. 

(…) 유럽적 프락시스는 주어진 물질-신체적 바탕(자연)에서 출발해 “영혼을 만드는” 데에서 (그리고 문화들을 차이 나게 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원주민적 프락시스는 주어진 사회 정신적 연속체에서 출발해 “신체를 만드는” 데에서 (그리고 종들을 차이 나게 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그 연속체는 바로 신화 속에서 주어진다. 


39~40

-시점들의 다양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미지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바로 이러한 물질주의적이고 사변적인 이중의 비틀림이 우리가 “관점주의”라고 부른 것이고, 그런 비틀림은 애니미즘에 관한 통상적 재현(.....) 

세계는 시점들의 다양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들이 지향성의 중심들이며, 각자의 특징과 역량에 따라 다른 존재자들을 파악한다. 이러한 관념의 전제와 결론은 얼핏 연상되는 상대주의라는 통상적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실, 그 전제와 결론은 상대주의와 보편주의의 대립에 수직하는 평면 위에 배열되어 있다. 


41-42

-수행적 영혼의 유사성 

우리는 근대의 “다문화주의적” 우주론들과 비교해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유가 가지는 변별적 특징 가운데 하나를 지시하기 위해 “다자연주의”라는 표현의 사용을 제안하게 되었다. 즉, 다문화주의적 우주론들은 자연의 유일성과 문화들의 다양체 사이의 상호함축에 의지하는 반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개념화는 정신의 단일성과 신체들의 다양성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또는 주체가 보편적인 것의 형식을, “자연” 또는 대상이 특수한 것의 형식을 재현할 것이다. (...)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포함하는 다양한 유형의 주관적인 행위주나 행위자들(신, 동물, 죽은 자, 식물, 기상현상, 대부분의 경우 대상과 인공물 역시)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들 모두는 지각적/욕구적/인지적 자질들의 동일한 일반 집합, 달리 말해 유사한 영혼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이를테면 수행적이라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동일한 통각방식을 포함한다. 즉, 영혼이 있는 동물 및 다른 비인간들은 “자신을 인격personne처럼 보며”, 따라서 그들은 “인격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지향성을 갖춘 대상들, 혹은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대상들이다. 이 대상들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되고, 반성적인 것과 상호적인 것이라는 이중의 대명사적 양태, 다시 말해 집단적인 것이라는 양태 아래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격들이 무엇을 바라보는지가 바로 원주민 사유에 의해, 또한 그 사유에 대해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를 구성한다. 


43~46

-강도적, 잠재적 인격

동물과 정신들은 우리를 비인간처럼 보면서, 그들 자신을 (각자의 동종집단을) 인간처럼 본(...)다. 즉, 그들은 자기 집이나 마을에 있을 때 자신들을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자처럼 지각하며(또는 그런 존재자가 되며), 자신의 행동 방식과 특징들을 문화적 외양을 가진 것으로 파악한다. (...) 그들의 사회 체계는 인간 제도의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

우주의 모든 동물과 다른 구성 성분들은 강도적으로 인격이며, 잠재적으로 인격이다.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든 자신이 하나의 인격임을 드러낼 수 있기(하나의 인격으로 변형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잠재능력이다. (...) 그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인격의 개념(내적 잠재력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지향성의 중심)이 인간 개념에 앞서고, 논리적으로도 우월하다는 것이다. (...) 다른 인격적 다양체들을 관점적 타자성이라는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다. (...) 인간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지시하는 용어다. 


49 

-객관화된 타자

서구 근대성의 경우, 대상이라는 범주는 목적telos을 제공한다. 즉, 인식하는 것은 “객관화하기”다. 이것은 대상 내에서 대상에 내속된 것과 인식하는 주체에 속하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다. 주체에 속하는 그것은 그 자체로 부당하게 혹은 불가피하게 대상에 투사되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인식하기는 탈주체화하기다. (...) 주체들도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객관화 과정의 결과처럼 보인다. 즉, 주체는 자신이 생산하는 대상들 안에서 구성되거나, 자기 자신을 식별한다. 그리고 주체가 “이것”ca을 볼 때처럼 자기 자신을 “외부로부터”보는 데 성공할 경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인식론적 놀이는 객관화라고 불린다. 객관화되지 않았던 것은 비실재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에 머문다. ‘타자’의 형식은 곧 사물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샤머니즘을 인도하는 것은 전도된 이상이다. 즉, 인식한다는 것은 “인격화하기”이고, 이는 인식되어야 하는 것의 시점을 취하는 것이다. 혹은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점을 취하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조어웅 기마랑이스 호자). 그것을 모르고서 “왜”라는 질문에 지적인 방식으로 대답할 수 는 없을 것이다. ‘타자’의 형식은 곧 인격이다. 


48-52 

-샤머니즘의 정치적 기술 

관점들의 마주침 또는 교환은 위험한 과정이며 정치의 기술, 즉 외교적 수완이다. 서구의 상대주의에 공적 정치로서의 다문화주의가 있다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샤머니즘적 관점주의에는 우주적 정치로서의 다자연주의가 있다. (...)

좋은 샤머니즘적 해석이란 각각의 사건을 바라 볼 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의 행위인 것처럼, 어떤 행위자의 지향적 상태들이나 술어들의 한가지 표현인 것처럼 바라보는데 성공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인식하는 자와 맺는 사회적 관계의 현실화에 동의하지 않는 사물들의 상태 혹은 개별체는 샤머니즘적으로 무의미하다. (...) 근대성의 자연주의적 세계에서 주체란 불충분하게 분석된 어떤 대상인 반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식론적 관습은 그것의 전도된 원리를 따라간다. 즉, 대상이란 불완전하게 해석된 어떤 주체다. 여기서 인격화를 할 줄 알아야만 하는데, 알기 위해서는 인격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석의 대상은 대상의 역해석이다. 


54

그곳에서는 모든 사물이 인간이며, 인간이란 또 다른 사물이다. (...) 이러한 다우주multivers에서는 모든 관계가 사회적이므로, 모든 차이는 정치적이다. 


59

-신화적 주체 

신화는 유동하는 강도적 차이가 지휘하는 존재론적 체제를 제안한다. (...) 변형은 형식에 선행하고, 관계는 항들보다 우월하며, 틈은 존재에 내적이다. 각각의 신화적 주체는 순수한 잠재성이면서, “이전에 이미” “앞으로 될” 어떤 것이었고, 그래서 현재로서는 규정된 바가 아무것도 없다. 


61

-공통조건으로서의 인간성 

인간과 동물에게 부여된 공통 조건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다. 신화적 거대분할이 보여주는 것은 자연과 구별되어가는 문화라기 보다, 문화에서 멀어지는 자연이다. 즉, 신화들은 이간을 통해 계승되고 보존된 특성들을 동물이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들려준다. 인간이 과거에 비인간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이 과거에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원주민의 사유는(...) 동물을 비롯한 우주의 다른 존재자들이 예전에 인간이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이라고 결론 내린다. 


63-64, 70

-관점주의

관점주의는 인간/비인간의 차이를 각 존재자의 내부로 가져오는 강도적 차이를 긍정한다. (...) 관점은 재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점이란 신체에 있는 반면, 재현은 정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 관점주의는 불변의 한 가지 인식론과 가변적인 존재론들을 전제한다. 즉, 재현들은 동일하지만 대상들이 다르고, 의미는 유일하지만 지시 대상은 여럿이다. 


69 

-인간과 재규어의 경우 

인간은 피라고 보지만, 재규어는 맥주라고 보는 어떤 것의 존재 (...) 다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다르게 지각되는 자기동일적 개별체들이 아니라, 피/맥주 유형의 직접적으로 관계적인 다양체들이다. 말하자면, 피와 맥주 사이의 경계만이 존재한다. “인척관계에 있는” 그 두 가지 실체가 그 테두리에 의해 서로 소통하고 분기한다. 결국 어떤 종에게는 피이고, 다른 종에게는 맥주인 X 같은 것은 없다. 처음부터 인간/재규어 다양체의 특징적 정서작용이나 독특성 중 하나인 피/맥주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과 재규어 둘 모두 “맥주”를 마신다고 하면서 그들 사이의 유사성을 긍정하는 것은 단지 인간과 재규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을 더 잘 지각하기 위해 서일 뿐이다. “우리는 이 언어에 있거나 혹은 다른 언어에 있다. 즉, 세계의 뒤편이 없는 것처럼 언어의 뒤편도 없다.” (...) 실제로 우리는 피에 있거나 혹은 맥주에 있다. (...) 다만 모든 맥주 맛은 피 맛의 뒤편이고, 그역도 마찬가지다. (...)

재규어와 인간이 상이한 사물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처럼, 유럽인과 원주민은 어떤 동일한 인간성에 대해 “말했고” 그 다음 이런 자기 서술적 개념이 ‘타자’에게도 적용되는지 자문했다. 그러나 유럽인과 원주민이 개념을 정의하는 기준(의도)이라고 이해했던 것은 급진적으로 달랐다. 


88 ~95

-애매성의 공간에 거주하는 번역 

우리는 여기서 애매성equivocite이라는 일반개념을 제안한다. (...) 원주민의 관점주의는 애매함에 관한 학설이다. 다시 말해 동음이의적 개념 간에 성립하는 참조적 타자성에 관한 학설이다. (...) 번역하기는 애매함의 공간에 자리잡고 거주하는 것이다. 이는 그 공간을 해체하기 위해서가 아닌데, 애매함의 공간을 결코 존재한 적이 있었다고 전제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애매함의 공간을 가치있게 만들고, 그 공간의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서로 접촉하는 “언어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했던 공간, 즉 애매함이 숨겨 둔 바로 그 공간을 열어서 넓히기 위함이다. 애매함은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수립하고 추동하는 것이다. 즉, 관점의 차이다. 번역하기는 애매함이 지금까지 항상 존재했고,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일이고 (...) ‘타자’를 침묵 속에 가두는 대신, 차이에 의해 소통하는 일이다. 


96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성 

애매함은 (결여라는 의미에서) “해석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력 해석의 “과잉”이다. (...)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우주론에서 상이한 종들의 실재적 세계는 그들의 시점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세계 일반”이 그런 상이한 종들로 이루어지며, 그 세계 일반은 그런 시점으로서의 종들이 서로 갈라지는 추상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학은 애매함에 관심을 갖는다. (여기서 “관심을 갖는다”interesser는) 가운데 존재한다 inter esse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즉 가운데 있음, 사이에 존재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97

-분리접속적 무한으로서의 애매함 

와그너(wagner, 1981, 20) 는 뉴기니의 다리비인과 맺었던 초기관계에 대해,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방식은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방식과 같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여기서 핵심은 몰이해라는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양쪽의 몰이해가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초월론적 사실”이다. (...) 애매함은 오류, 오해, 거짓이 아니라 관계의 기초 그 자체인데, 이 관계는 언제나 외부성과의 관계이고, 자신의 기초 자체를 (자기 내에) 함축한다. (...) 애매함은 전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제를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애매함은 변증법적 모순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애매함의 종합은 분리접속적이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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