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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묭 Sep 02. 2023

창피하지만, 일단 해봅니다

꽤 달달한 창피함의 대가


'그 일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


이 문장은 그 일을 시작하지 않고도 가능성을 남겨두는 마법의 문장이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또 해낸다’는 자신감은 좋지만 이 문장 뒤에 숨어 지내기만 한다면 그건 마법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울 것이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그 좋은 예다. 지금은 안 써서 그렇지 막상 쓰면 또 잘 쓴다는 저주에 갇혀 글쓰기를 10년 가까이 미뤘다. 잘 쓰인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질투와 초조함만 남았을 뿐 쓰는 사람이 되려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질투심을 유발할 정도로 글을 잘 쓸 자신이 없어서였다. 잘 쓰고 싶다는 열의는 좋지만, 이마저도 써본 적도 누군가에게 읽힌 적도 없는 애송이가 하는 변명에 불과했다. 애초에 결심할 마음조차 없는 가난한 마음이었다.


올해 초부터 글쓰기에 몰입하면서부터 지금은 블로그, 브런치, 메모장 등 어디에든 매일 쓴다. 처음엔 일주일에 1번, 그다음엔 2-3번, 그다음엔 4-5일, 이제는 매일. 쓰는 빈도가 0에서 100으로 늘어나면서, 나는 내 글이 누군가의 질투심을 유발한다고 자신한다. 이 자신감은 내 ‘글’이 아니라 ‘매일 쓰는 행위’에서 나온다.


글 자체만 보면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하고 맥락이 이상하고 재미없는 글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당연히 창피하고, 아직도 창피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런 글일지라도 매일 쓴다면? 매일 쓰는 행위가 쌓이면 자연스레 글도 쌓인다. 직접 행동에 옮겨서 얻어낸 것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자산이 된다. '이런 글이라면 나라도 매일 쓰겠다'싶은 사람은 그럼 이런 글이라도 매일 써보시던가. 오히려 반갑다. 진심으로 응원하겠다. ‘그런 글을 쓸 바에 안 쓰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해줄 말이 없다.


취미로 보컬 레슨을 받은 지 5개월이 다 되어 간다. 나는 내가 레슨을 두 달 정도만 받으면 드라마틱 하게 실력이 늘 줄 알았다. 여기에도 ‘내가 몇 번 수업받으면 또 잘하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음치 박치도 아니니까 전문가의 손길로 조금만 다듬으면 갓반인 근처는 갈 줄 알았다.


보컬 레슨이 3달, 4달로 길어지면서 서서히 저주에서 풀려났다. 이미 노래 좀 한다는 가수들도 연습생 기간을 몇 년씩이나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그 시간을 들여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실력을 얻는다. 나는 고작 한두 달 만에 그것을 뺏으려 했다. 겨우 일주일에 한 시간 수업으로 말이다. 당연히 창피했다. 남들은 모르지만 나만 아는 창피함이다. 이제 글로 썼으니 나만 아는 것도 아니게 됐다.



창피함을 주는 어떤 일을 시도하면 ‘해본 적 없는 사람’에서 ‘해본 적 있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고 맘껏 창피를 당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창피함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성장한다. 



우리는 전문가에 대해 착각하면 안 된다. '프로'란 '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한 영역에서 누구보다 창피를 많이 당해본 사람'이다. 실패를 잔뜩 맛보고, 몇 번이고 창피를 무릅쓰면서 실패를 피하는 능력이 생겨 프로라고 불리게 되었을 뿐이다. 실패를 모르는 프로는 없다.
<창피하지만, 일단 해봅니다> 나카가와 료


나에게 보컬 레슨을 해주는 선생님도, 내가 실컷 질투했던 글을 쓴 작가도 나보다 수백수천수만 번 더 실패하고 창피해 본 사람일 것이다. 요즘은 너무 성공만 비춰서 사람들은 그 뒤에 무슨 실패와 창피가 숨어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나 혼자 느끼는 창피함을 하나씩 마주하는 나도 어제보다 창피에 면역이 생기는 중이다. 그리고 창피해 보니, 별것 아니다. 창피로 값을 치르고 성취를 얻었기 때문에 꽤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오늘도 창피 1스탯, 글 1스탯 적립 완료.


+) 나중에 내 책을 낸다면 내가 겪은 창피 모음집 같은 책도 재미있겠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창피를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는 또 내 창피함을 팔아서 책을 얻으니 일석이조다. 이것도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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