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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묭 Oct 04. 2023

노트북은 박살났어도 멘탈은 멀쩡합니다

어제 카페에서 노트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거의 곤두박질을 쳤다. 놀랐을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 손님에게 사과를 하고 노트북을 주워들었는데 액정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원하게 금이 갔다. 화면도 켜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숨을 헙 멈추고 이게 실화인지, 꿈은 아닌지 현실을 부정했다.



커플 손님은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옆통수에서는 땀 한 줄기가 삐질하고 흘러내렸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네이버에 '맥북 액정 수리 비용'을 검색하니 'ㅠㅠ'와 '하..'로 가득찬 글들이 보였다. 얼굴은 모르지만 분명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동지애를 느끼며 카페글과 지식인 글을 둘러보았다. 공식 애플 수리를 받으면 80-100만원의 비용이 들었고, 사설 수리업체는 그의 1/3 금액 정도라고 한다. 검색 페이지 상단에 뜬 수리업체에 박살난 노트북 화면 사진과 함께 수리 가능여부를 물었다. 공휴일이라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문의를 남긴채 생각에 잠겼다.



8월 10일에 당근으로 110만원을 주고 구입한 내 맥북. 전에 쓰던 노트북이 곧 작별할 것 같아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큰 맘 먹고 구매한 건데, 2달도 안되어 사고가 터졌다. 7월 말에 핸드폰을 초기화시켰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멘붕이 올 때 하지 말자고 마음 먹은 자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난 왜 이럴까. 사실 핸드폰이 초기화되고, 노트북이 고장나는 것보다 자책하는 일이 더 큰일이다. 노트북은 돈을 내고 수리하면 멀쩡하게 복구되지만, 자책감과 같은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생각이든 반복할수록 강화된다. 자책감도 우울감도 똑같다.



지금껏 만났던 멘붕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그 때보다는 대처 방식이 더 나아져야 한다. 여러번 연습했으니 실전에 적용할 차례다. 우선 자책을 멈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았다. 수리업체는 찾았고 문의를 해두었다. 비용도 대충 알아보았다. 수리할 비용이 있고, 수리하기 전까지 내가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유튜브에 올릴 영상을 편집해야 하지만, 한 주 정도는 미뤄도 괜찮다. 대신에 그동안 열심히 영상을 찍어두기로 했다. 수리가 끝나고 다시 편집할 수 있을 때 망설이지 않도록.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책이나 읽자 싶어서 가져온 책을 폈다. 이 이상으로 내가 걱정해야할 필요는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남동생이 사용하던 노트북이 생각났다. 내 노트북이 수리가 끝날 때까지 잠시 빌리기로 했다. 급한 불은 껐다. 가족에게 노트북 액정이 깨져서 속상하다고 말했다. 이제 진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걱정과 스트레스에 나를 너무 오래 노출하지 않았다. 동생 노트북으로 평소처럼 유튜브를 보고, 글을 쓰고 있다. 내 루틴은 깨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점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어서 수십권의 심리학, 뇌과학, 자기계발서를 읽었더니 진짜 도움이 된다. 원래 같았으면 깨진 노트북을 붙잡고 할일도 못한 채로 슬퍼하고 화만 냈을 것이다. 전보다 나아진 나의 모습을 실제로 마주하니 기특하다.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자. 걱정 하나 더 보탠다고 속만 문드러질 뿐 아무것도 좋게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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