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디자이너의 현실
1편은 한국 디자이너의 냉혹한 현실을 살펴보고, 2편은 더 나은 환경을 위한 방법을 제안한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는 디자인은 2D 기반의 시각 디자인(UX/UI, 웹, 편집 등)이다.
나는 시각디자인과 졸업 후 5년간 디자이너로 근무하다가 작년 초 기획자로 직무 전환을 했다. 5년 중 2년은 잡지사의 편집 디자이너로, 3년은 디자인 스튜디오의 대표로 그래픽과 UX/UI 디자인을 담당했다.
돌연 직무 전환을 한 까닭은 디자이너로서의 미래가 쉽사리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에 내놓으라 하는 기업이면 모두 디자인 경영, 디자인 띵킹 등의 말로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실상은 참 많이 다르다.
디자이너라면 반. 드. 시 공짜 부탁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 명함 좀 만들어줘~." 가운데 명사만 바꾸면 포스터, 로고, 간판, 전단지, 카드 뉴스, 사진 보정 등 무한정으로 주문 가능하다. 학생 땐 포트폴리오 만드는 셈 치고 그런 무례한 부탁도 곧잘 들어줬다. 그런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국민 띵언처럼, 디자인 수정을 10번 이상 요청하더라.
그러다 보니 적당한 핑계로 거절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누가 공짜로 부탁한다고 했냐? 돈 줄게!"라며 만 원짜리 몇 장 건네거나 "아니, 그거 컴퓨터로 몇 번 클릭하면 되는 것 아냐?"라고 악담을 하기도 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대한민국에서 디자이너의 위치는 낮은 편이다. 사람들은 디자인을 "컴퓨터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싼 가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올해 중순 이직을 준비하며 여러 군데 면접을 보았는데, 디자인 경험에 대한 질문이 상당히 많았다. 문제는 그 질문의 뉘앙스가 상당히 부정적이라는 점이다.
"디자이너 출신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획자와 다르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이 질문을 한 기업은 금융권(핀테크)으로, 주로 문과 출신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다. 일반적인 기획자는 학벌 좋고,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문과생. 디자이너는 논리적이지 않고, 감각을 다루며, 덜 똑똑한 미대생. 그러므로 "당신은 기획자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말이다.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겠다. 작년 초반에 한 기업과 연봉 협상을 하고 있었다. 회사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카운트 오퍼 레터를 전달했다. 그러자 모 게임 회사의 PM으로 근무하던 당시의 남자 친구가 어떤 내용으로 썼냐고 물어보더라. 내용을 보여주자, 너무 구구절절하게 썼다고 "디자이너답다."라고 말했다. PM은 할 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고, 디자이너는 할 말을 미사여구를 넣어 길고 장황하게 한다는 말인가?
디자이너와 밀접하게 일하는 IT회사 종사자들이 한 말이라는 게 믿기는가? 종합해보면 디자이너는 논리적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라는 소리다. 실제로 필드에서 일해보면 누군가 생각한 기획안을 그대로 구현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이 디자이너에게 요구하는 건 머리가 아니라 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의 평가를 증명하듯, 디자이너 연봉은 타 직군에 비해 낮은 편이다. 내가 편집 디자이너로 근무할 당시 받은 월급은 170~180만 원 남짓이었다. 그마저도 초반 6개월은 수습이라는 명목 하에 100만 원밖에 못 받았다. 10년 전 방영된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 씨'의 주인공 영애의 월급은 200만 원. 내가 근무할 당시의 팀장 월급도 200만 원을 조금 넘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임금 수준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혹시나 싶어 최근 연봉 수준을 검색해보니 200만 원도 못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실 편집 디자인은 디자인 중에서도 박봉이기로 유명한 업권이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UI/UX 디자인도 평균 초봉 2,700만 원 선이다. 대기업 신입으로 시작한다면 초봉 4,000만 원 선이겠지만 워라밸, 연봉 상승률, 은퇴 나이를 감안하면 그렇게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 없다.
내 사회생활 사상 최악의 경험은 공휴일에 쉬는 것도 연차에서 깎는 것이다. 공휴일은 "공무원이 쉬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회사가 공휴일을 약정 휴일로 정한 경우에만 연차에서 깎이지 않고 쉴 수 있다. 당시 회사의 대표는 법대 출신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직원들을 잘도 괴롭혔다.
근무 환경 또한 처참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시각 디자인은 납기일이 있다 보니 시간에 쫓겨 야근을 하기 일수다. 수학처럼 공식이나 정답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이디어 단계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 초과수당, 택시비, 휴가 지급 등을 상상도 못 하는 곳들이 아직 많다. 이에 대해 문제시 삼아도 디자인 업계는 원래 그렇다며 넘어가기 일수다.
어느 회사의 연봉 수준을 알고 싶다면, 한 가지만 보면 된다. 그 회사의 수입원이 무엇인가. 만약 회사가 앉아서도 돈이 굴러 들어오는 사업을 한다면 연봉은 높을 것이며, 반대로 열심히 발품을 팔아야 유지되는 사업이라면 연봉은 낮을 것이다.
더불어 자신이 하는 일의 희소성을 생각해보아라. 누구라도 조금만 배우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대체가 쉬우므로 값이 낮을 것이고, 사전 지식이 필요하여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대체가 어려워 값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다. 개발, 기획, 회계, 법무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사전 지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림을 다루다 보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디자인 프로그램만 배우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비전공자들이 학원 교육을 통해 디자이너가 되기도 한다. 중고등학생들이 아이돌 덕질로 뚝딱 만든 아트웍을 봐봐라.
게다가 이미 상당수의 디자인이 템플릿화 된 상황이다. 구글은 Material Design을 통해 개발자도 쉽게 코드 몇 줄로 UI 디자인을 입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검색창에 디자인 템플릿을 입력하면 수십 가지의 사이트가 노출되며, 심지어 퀄리티까지 우수하다. 디자인은 대체 가능한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한편, 한국 디자이너의 성공적인 미래는 단 두 가지뿐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