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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영 Feb 02. 2022

그만둬도 괜찮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지친 당신에게

작년 11월, 을지대학교병원의 신입 간호사가 사망했다. 사인은 태움으로 인한 자살.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셋이었다.


태움은 간호사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은어로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끔찍한 뜻을 갖는다. 비단 의료계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 일이 빈번히 발생 중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집계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자살 건수만 18건. 그마저도 정식 보도된 건만 계산한 것으로 실제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죽긴 왜 죽어. 힘들면 그만두면 되지."


사람들은 참 쉬운 말을 잔혹하리만치 쉽게 한다. 그만두면 된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버티는 것보다 포기하고 도망가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정녕 모를까.


그만둘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되면 아무리 힘들어도 이 악물고 버티게 되는 법이다. 간절히 원했거나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라도 그렇다. 천국이라고 생각해 전력 질주하여 도착한 곳이 알고 보니 지옥이라니.


과연 이곳을 벗어나면 다를까? 똥차가 가면 벤츠가 온다는데. 현실은 똥차가 가도 그보다 더한 똥차가 올 수도 있는 일이지 않은가.




"출근하다가 차에 치여서 일 좀 쉬고 싶다."


현재 위치에 대한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정적인 피드백만 듣는 환경에 머물다 보면 희망찬 미래를 그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7년 전, 나는 사망한 간호사 분과 엇비슷한 나이의 사회초년생이었다. 일은 너무너무 힘들었다. 야근을 넘어 철야를 감행하는 살인적인 스케줄. 아무리 인턴이라지만 100만 원이 채 안 되는 월급. 공휴일은 공무원이 쉬는 날이라며 연차에서 차감하는 근태 제도. 일일이 나열하면 밤을 새야 할 정도지만, 그중에서 가장 최악은 바로 수직적인 조직 환경이었다.


당시 표현할 단어가 없었지만, 요즘 말로 "가스 라이팅"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의 주요 속성은 정황, 즉 “뉘앙스”다. 뉘앙스는 냄새와도 같아서 처음 맡을 땐 악취를 쉽게 감지할 수 있지만, 반복되다 보면 향기와 구별이 어려워진다. 또 주관적이라, 누군가는 괴롭힘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심지어 가해자 스스로도 말이다. 따라서 처벌은커녕 고발조차도 어처구니없게 무산되기도 한다.


누가 보아도 직장 내 괴롭힘이 맞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게 된다. 내가 예민한 건가? 내가 일을 못하나? 내가 멍청한가?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천천히 우울과 무기력의 늪에 잠식되어간다.


상태가 이쯤 되면 주변에서 아무리 그만두라고 해도 들리지 않는다. 새벽까지 근무하고 돌아와 3~4시간 쪽잠을 자고 다시 출근하는 길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출근하다가 차에 치여서 일 좀 쉬고 싶다고. 그러자 놀란 가족들이 현관으로 뛰어와 지금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나는 참 멋 모르는 소리들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은 여기보다 더 최악이야. 난 더 좋은 곳 못 갈 거야.' 업무 강도가 너무 쎄 이직을 알아볼 시간도 없고 희망찬 미래를 계획하고 싶지도 않았다. 죽는 건 무섭고 사는 건 힘들어서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저 그냥 안 태어났던 걸로 하면 안 될까요?




"저런 사람들 잘 먹고 잘 살아요."

당시 동기에게 가해자의 횡포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런 말을 하더라. 저런 사람들은 독해서 어딜 가도 잘 먹고 잘 산다고. 착한 사람들은 매번 당하면서 사는 거라고. 세상이 그렇다고.


땅콩회항을 고발한 박창진 사무장은 동료들의 따돌림, 인사상 불이익, 정부 조사에 시달렸다.


참다못해 고발이라도 하면 진정한 공포가 시작된다. 회사는 십중팔구 증거를 요구한다. 괴롭힘이 증거가 될만한 메신저, 메일 등으로 행해진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정황”이다. 단순 문자 속에 고통의 냄새를 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피해자가 그나마 극복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면 다시 한번 상황으로 뛰어들어 녹음이나 촬영을 할 것이다. 올바른 조직 문화를 가진 곳이라면 동료들의 응원으로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지친 상태이고 조직조차 관심이 없다면 의지를 갖기란 어렵다.


대체로 괴롭힘은 권력을 무기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행해지는 데 이때 상급자는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회사가 자신을 못 자른다는 것을 아니까 더 설치는 것이다. 회사는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며 상황을 무마시키곤 한다. 태움으로 매년 간호사가 죽어나가는 데에도 근본적인 해결이 되었는가?



"그만둬도 괜찮아."

직장  괴롭힘으로 지친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충분히 열심히 했다고. 충분히  버텼다고. 일하기가 죽을 만큼 싫다면. 직장이 공포스럽고 출근길에 교통사고라도 나서 회사에  가고 싶다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일단 일상을 멈추자.


당신은 매우 아픈 상태다. 마지막 라운드의 격투기 선수처럼 몸과 마음이 피나고 멍들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 앞, 뒤, 양 옆 모두 다 제쳐두고 스스로만 신경 쓰자. 부모, 배우자, 자식, 커리어 등 모조리 신경 쓰지 말아라.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오로지 당신이 괜찮기만을 바랄 뿐이다.


죽지마. 회사는 그만둬도 괜찮아. 무책임하고 쉬운 말로 들리는 것 잘 안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그만두는 게 부당하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걸. 물론 세상은 결국 변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변화하는 중이므로, 당장 해결책이 필요한 당신에게 좋은 타이밍은 아니다.


단연코 바깥세상은 당신 생각만큼 불구덩이가 아니다. 세상은 동화처럼 행복한 일로만 가득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늘 불행만 따르지도 않는다. 그만두지 않아도 괴롭고, 그만둬도 괴롭다면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다.


먼저 퇴사해본 선배로서, 하늘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당장 없어질 수입원은 아르바이트로 충분히 충당할 수 있다. 다달이 내야 할 대출금이 많다면 소비를 축소시켜 방어할 수 있다. 모아둔 돈을 아껴 쓰거나 적금을 깨거나 정 급하다면 차를 팔고 보험 한 두 개를 해지할 수도 있다. 부디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길. 먼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아라.


당신은 지금의 당신을 살려야 한다.


도망가자, 지옥으로부터.




이들을 기억해주세요.

직장 내 괴롭힘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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