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lete Mar 15. 2016

비행기 안의 리틀 미스 선샤인

분주하게 꿈꾸고 설레며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봤다. 리틀 미스 선샤인. 위태롭고 불완전해 보이지만 함께 모여서 완전한 하모니를 만드는 가족.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는 사랑스러운 올리브. 어린이 미인대회에 출전하고 싶어 하는 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온 가족이 덜컹거리는 노란 고물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목적지를 향해서 달리고 또 달린다. 끊임없는 사건의 연속. 그들은 그런 사건들을 거치며 한 뼘 더 성장한다. 그래서 더 빛나는 여정. 어떤 일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흔히 그 일에 대한 결과가 어땠는지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다. 하지만 인생은 결과 하나로는 단정 지을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기나긴 여정이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만든다. 나의 인생은 앞으로 어떤 여정이 펼쳐질까.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새하얀 종이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 내가 뭔가를 하려다가 이 종이를 망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가끔은 주저하기도 했다. 나중에 좀 더 잘 그리게 되면 해야지 하고. 아무것도 안 해서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러나 지금 그리지 않으면 나중에 좀 더 잘 하게 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놓인 종이 위에 과감히 선을 긋고 뭐든 지금 생각나는 것을 그려야 한다. 삐뚤빼뚤한 솜씨지만 하나씩 나만의 그림을 채워가는 불완전함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아 새하얀 도화지의 완전함보다 아름답다.


 내가 가진 물감을 꺼내어 이것저것 섞어서 새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과정. 때로는 거무튀튀하고 이상한 색이 나올 때도 있다. 금세 실망하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렇게 조합을 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파스텔 빛의 예쁜 색을 만드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색이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하다는 것도 더 절절히 느끼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나는 더 많은 색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설프게 섞인 색에도 실망하지 말 것. 어설픈 게 당연한 거고 그런 어설픔 조차 풋풋함으로 커버할 수 있는 나이. 지금 당장 예쁜 색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내가 모르는 많은 색이 존재한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나이. 더 많이 고민하고 섞어보고 버려보자. 때론 이상한 색이 나왔다고 실망하고 구겨서 버린 종이를 다시 펴 보기도 하자. 색을 고르고 섞는 것을 주저하지 말 것. 과감하게 섞고 또 섞을 것. 이상하고 맘에 들지 않는 색을 마주하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설레는 맘으로 붓을 들어보자. 온몸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물감이 잔뜩 묻어도 괜찮다. 분주한 손이 아름답다. 소중한 지금, 나만의 색을 만드는 이 순간.




 어떤 전파도 잡지 못해 먹통이 된 핸드폰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능 중의 하나인 메모장을 켰다. 지나 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엄지 손가락 두개를 차분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회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는 후회는 절대 하지 말고 반성을 하자고 늘 생각하지만 순간 나도 모르게 살짝 후회를 할 뻔했다. 최근의 일들에 아쉬움이 많이 일었다. 분주히 움직였던 나날들, 슬프게도 모든 것은 불발이었다. 더 분발해야 한다. 나에게 좀 더 욕심이 나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좀 더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만 좀 더 예전의 일들을 생각해보니 힘든 시간들을 잘 견뎌왔던 것에 스스로 대견했다. 꽤나 어둡고 긴 터널이 있었지만 나 자신이 대견하리만큼 잘 지나왔다. 수고했다는 말을 육성으로 내뱉고 싶어 입술이 간지러웠다. 그즈음에는 늘 나에 대해 채찍질만 많이 했었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내 모습이 속상할 때가 종종 있었다. 때론 나 자신에게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거냐고 다그칠 때도 많이 있었다.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고 예쁜 말을 해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인데, 그걸 잊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욕심을 내고 더 먼 곳의 깃발을 알려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열심히 걸어와서 지치고 피곤한 나에게 난로 바로 앞의 의자를 내어주고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주는 것임을. 잃어버렸던 마음을 되찾았다. 어느새 따뜻한 문장으로 스스로를 안아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겪은 시행착오들과 실수는 버려지는 시간들이 아니었다. 그 시간들을 발판으로 더 성장하고 발전하자. 인생을 더 풍부하게 즐겁게 살자. 그런 다짐들을 적어 내려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꿈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져 갔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아직은 작지만 언젠가는 더 큰 것들을 품고 싶다. 하나씩 차근차근 이뤄내자. 특히,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항상 꿈꾸고 가슴 벅차오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어떤 나이에도 항상 철없이 꿈꾸고 설레자. 이 두 문장은 괜히 엄지 손가락 끝에 좀 더 힘을 실어 메모장에 적었다. 절대로 이 마음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앞날을 분주히 꿈꾸고 설레는 지금, 비행기 안에서 누구의 평가와 심사도 필요 없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빛나는 리틀 미스 선샤인이 탄생했다.




 한국을 떠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비록 경유를 위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이지만, 열한 시간 삼십 분 만에 드디어 외국 땅을 밟았다. 피곤해서 정신은 몽롱하지만 금세 여권을 손에 꼭 쥐고 입국 심사대에 선다. 살짝의 긴장감과 함께 심사원과 눈을 마주치며 자연스러운 인사를 했다. 심사원은 굉장히 훈훈하게 생긴 남성분이었다. 루프트한자의 남 승무원들도 잘 생겼다고 생각했었기에, 순간 독일 남자들은 다 잘생겼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나에게 입국 심사에서 하는 흔한 질문들을 던진 뒤에 갑자기 자신을 따라 해보라고 했다.


"따라 해 보세요. MUNCHEN."
"뮌헨?"
"MUNCHEN"
"뮌켄?"
"MUNCHEN"
"뮌셴?"


 그때 내가 무슨 발음을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만큼 어렵고 생소한 발음이었다. 하지만 이 곳을 통과해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저 열심히 발음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3번은 넘게 듣고 따라 했다. 내 발음이 그에게 어느 정도 흡족하게 들렸는지 그는 다시 한 번 더 뮌헨의 발음을 강조하며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뮌헨에 온 걸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 갑자기 발음을 들려주고 따라 하라고 할 땐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고 당황스러웠는데 그와 인사를 마치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면서 내 입꼬리는 이미 올라가 있었다. 짧지만 유쾌했던 이 시간이 여행을 시작하는 첫 에피소드라고 생각하니 꽤 괜찮은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에 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긴장이 풀렸는지 나도 모르게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내가 꽤 많이 잤다는 걸 알았다. 기내식이 나왔다가 치워진 줄도 모르고, 그 소란한 틈에도 깊게 잤던 것이다. 몇몇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거의 기내식이 치워진 지 오래인 듯했다. 결국 기내식을 먹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창문을 열었다. 베를린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게 생긴 집과 길의 형태가 나를 자극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이 내가 서울을 떠나 멀리 왔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제 드디어 베를린에 도착할 것이라고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