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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ete Mar 22. 2016

무표정으로 마음을 숨기고 있지만

베를린의 첫인상


 Willkommen in Berlin이라는 문구가 나를 반겼다. 창 밖에서는 아이보리빛 햇살이 그 환영 문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드디어 베를린이다! 밑에 영어로 다시 Welcome in Berlin이라고 쓰여 있어서 독일어를 잘 몰라도 무슨 의미인지는 단번에 눈치챘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독일어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진짜 진짜 내가 베를린에 왔구나!' 하고 실감했다. 캐리어를 찾아서 이 공항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독일의 거리가 펼쳐진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상기된 표정으로 와이파이를 잡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잘 도착했다는 카톡을 보냈다. 캐리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초췌한 얼굴로 셀카도 마구마구 찍어댔다. 캐리어는 꽤 늦게 나왔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비록 아직도 공항 안이었지만 이곳저곳을 신이 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여기가 베를린이구나! 하면서.





 숙소로 가는 길, 여행에서 정말 사소하지만 좋아하는 일 중에 하나는 바로 그곳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일이다. 표를 사고 버스를 타는 일은 짜릿하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겠지만 여행자인 나에게는 탈 때마다 새롭고 또 새롭다. 작은 버스 티켓 한 장이 이 도시에 온 걸 환영한다고 악수를 건넸다. 큰 캐리어를 끌고 낑낑대며 버스에 올랐다. 누가 봐도 여행자의 모습.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 캐리어 보이지? 나 여기로 여행 왔어요!'라고 버스 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마음껏 소리치고 재잘대고 싶었다. 혼자였기에 그 고조되는 감정은 그대로 큰 파도가 되어 밀려와 나를 덮쳤다. 오직 나만을 위한 감정. 소란하고 북적이는 버스 안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시끌벅적했다.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베를린의 거리, 버스 안에서 들리는 조곤조곤한 말소리들, 종종 나와 캐리어를 살짝살짝 쳐다보는 낯선 시선들이 나를 들뜨게 했다.


 런던이나 파리하면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런던은 빨간 폰부스와 튜브의 이미지, 파리는 에펠탑과 화려한 거리. 그런데 사실 나에게 베를린은 앞의 두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그런 이미지가 적었다. 그럼에도 내가 서 있는 그곳, 베를린의 거리는 베를린스러웠다. 그냥 그런 풍경이 베를린 답다고 느껴졌고 납득이 갔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분위기. 세련된 도시라기보다는 어쩐지 투박한 느낌. 살 심심한 매력. 확실히 자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런 자연스러움에 오히려 더 마음이 갔다. 평범해 보이는 이 도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관광지보다는 골목골목의 이야기들이 더 궁금해졌다. 골목에 들어서면 생각하지 못한 유쾌하고 재밌는 일들이 펼쳐질 것 같았다. 처음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음을 숨기고 있지만 친해지고 보면 풍부한 표정으로 솔직한 문장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친구처럼. 나를 태운 버스는 들어가 보고 싶 골목 초입을 몇 개쯤 지나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버스에서 내려 가장 마음에 드는 골목으로 쏙 들어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발끝까지 내려온 피곤과 무거운 캐리어만 아니었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에 또 이런 마음이 생기기를. 그때 마음에 드는 근사한 골목을 만날 수 있기를.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부터 짧은 여정이 아쉽게 느껴졌다.




 호스텔은 지하철 역 바로 앞에 있어서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리며 길을 헤매지 않아도 됐다. 호스텔의 직원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매우 친절하게 이것저것을 설명해주었고 잠깐 둘러본 시설 또한 깔끔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이라서 마음에 쏙 들었다. 베를린의 관광명소가 안내되어 있는 지도와 열쇠를 받아 들고 캐리어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불은 꺼져 있었고 3명이 자고 있었다. 클럽으로 어마어마한 관광수익을 만드는 베를린, 유럽의 젊은이들이 오로지 클럽에 가기 위해 베를린에 온다. 낮에는 자고 밤에 일어나서 한껏 멋을 내고 클럽에 간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이들도 그런 친구들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벽에는 가죽재킷이 걸려있었다. 그냥 가죽재킷인데도 불구하고 유럽의 센 언니를 연상케 했다. 그들이 깰 새라 살금살금 짐을 간단히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호스텔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베를린의 풍경


 벌써 어둑어둑해진 베를린의 밤은 가로등이 밝혀주고 있었다. 한껏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망울로 호스텔 주위의 풍경들을 구경했다. 동네 구경을 하면서 겸사겸사 슈퍼마켓을 찾아서 슬리퍼랑 간단한 간식을 사야지. 그러다가 예쁜 식당이 있으면 그냥 아무런 정보도 없이 들어가서 밥을 먹을 거야. 하지만 금방 찾을 거라고 생각한 슈퍼마켓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면 호스텔 직원에게 물어볼 걸 그랬나. 다시 돌아가서 물어볼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테라스가 예쁜 식당을 마주쳤다. 테라스에서는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각각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표정만 봐도 서로를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사랑을 가득 담아 서로를 바라보고 여유롭게 음식을 음미하는 그들을 보며 지금 이 곳에 서있는 나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들과는 다르게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것도 이 낯선 땅에서. 그나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이어 줄 수 있는 핸드폰도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는 그 거리에서는 먹통이었다. 피로가 쌓여 무거워진 발걸음과 구겨진 티셔츠, 부스스해진 머리카락 그리고 고개를 살짝 든 허기와 함께 거리에 서 있었다. 그저 조용히 그 사랑스러운 풍경을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좀 더 걸으며 그 모습을 곱씹어 음미했다. 어쩐지 그곳에서는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자리가 만석 이기도 했지만 만약 자리가 있더라도 그냥 그곳은 그렇게 고스란히 남겨두고 싶었다.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풍경이었기에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본 단 몇 분의 순간, 딱 그 모습 그대로 그렇게만 기억하고 싶었다.


 한참을 걸어도 슈퍼마켓은 나오지 않았고 더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호스텔에 돌아와 1층 카페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카페에 하나 남은 샌드위치와 따뜻한 라테를 주문했다. 맛이 별로 없었지만 피곤이 온 신경을 휘감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반쯤은 감긴 눈으로 딱딱한 빵을 잘근잘근 씹었다. 따뜻한 라테를 마시니 더 몸이 노곤 노곤해졌다. 졸린 눈을 비비며 수첩을 펴고 펜을 들었다. 내일부터 펼쳐질 나만의 풍경을 기대하면서 내일의 일정을 손으로 써 내려갔다. 마음이 떨렸다. 물론 설렘이 가장 컸지만 사소한 불안과 외로움도 분명 존재했다. 그런 감정들은 딱 발목까지만 찰랑찰랑하게 발을 담글 수 있을 정도여서 다행이었다. 혼자 낯선 곳에서 오롯이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감상에 젖었다. 한참을 쓰다가 고개를 들어서 통유리 밖에 펼쳐지는 베를린의 풍경을 감상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표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트램,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리는 가로수... 이런 소소한 것들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소소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행복을 맛 본 그 순간, 나를 감싸고 있던 무거운 공기를 털어내고 다시 금세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고 즐겁게 잘 해내자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분명 멋진 여행을 만들 수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 메뉴는 고작 씹기 힘들 만큼 딱딱한 빵과 뜨거운 라테 한 잔 밖에 없었지만, 베를린의 풍경을 꼭꼭 씹어 음미하며 나름대로의 근사한 첫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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