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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ete Apr 09. 2016

소녀의 눈망울

베를린의 얼굴들 1


 날씨는 화창했고 빛을 받은 건물들은 마치 갤러리의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독일어가 보인다. 낯선 언어는 나의 감각을 자극한다.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이 더듬더듬 읽어보다가 배시시 웃고는 그만두었다. 이 도시에서 나는 완벽하게 까막눈이 된다.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는 이 답답함이 짜릿하다. 어제저녁과는 또 다른 아침의 모습들. 이미 숙소는 하룻밤 사이에 '우리 집'이 되었고 나는 우리 집 앞의 풍경에 벌써 매료되어 있었다.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내 눈빛은 햇빛을 받아 더욱 또렷하게 빛났다.



 지하철 표는 따로 창구가 없었고 티켓 머신에서만 구입할 수 있었다. 티켓 머신 옆에는 집시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힘없이 종이컵을 들고 서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여름임에도 치렁치렁하게 긴치마를 입고 있어 보기만 해도 너무 더워 보였다는 것. 까무잡잡한 피부 위에 그녀의 치마만큼이나 치렁치렁하게 긴 머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크고 까만 눈망울로 사람들을 애처로이 바라보며 겨우 들릴랑 말랑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돈을 달라는 말을 했다.


 여행을 준비할 때, 악명 높은 집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한 파리에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집시들은 그 무성한 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도 남을 만큼 정말 무서웠었다. 도움을 주고 돈을 달라고 하거나, 떼로 다니면서 사람을 넘어트리고 그 혼란한 틈을 타서 돈을 가져간다고 했다. 절대로 돈을 주면 안 된다고 했다. 한 번 돈을 주면 더 달라고 계속 달라붙는다고. 그런 말들이 생각이 나서 가방을 좀 더 움켜쥐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빨리 티켓을 사고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급히 티켓 머신을 조작했다.


 그런데 뭔가 잘 되지 않았다. 지폐나 카드는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아직 동전은 없고, 옆에는 무서운 집시 소녀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고, 정말 어떡하지 싶었다. 한참을 당황스러워 허둥지둥 대고 있었다. 어깨에는 잔뜩 긴장이 들어갔다. 그런 나에게 소녀는 힘없이 팔을 뻗어 피자가게를 손으로 가리키며 잔돈을 바꿔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어? 이게 아닌데?


 일단, 경계 태세를 등 뒤로 감추고 얼른 피자가게로 뛰어가서 잔돈을 바꿔왔다. 그새 소녀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다시 티켓 머신 앞에 서서 티켓을 끊었다. 소녀는 다시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종이컵을 내밀며 돈을 달라고 했다. 그 순간 유럽 여행을 할 때 절대로 구걸을 하는 사람에게 돈을 한 푼도 주지 말자는 나의 철칙은 깨지고 말았다.


 사실은 돈을 주는 그 순간도, 아니 지하철을 탈 때까지도 마음속에는 무서움이 가득했지만 그런 감정들은 최대한 감춘 채 소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며, 땡큐 땡큐!라고 말했다. 동시에, 가지고 있던 동전 몇 개를 소녀의 종이컵에 넣어주었다. 나에겐 너무나도 낯선 화폐단위라 그 소녀에게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될지 가늠이 안 되었지만 내 고마움은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동전을 주고 지하철을 탈 때까지 사실 속으로 별 생각을 다 했다. 많은 생각들이 엄청난 속도로 무성하게 자라났지만 하나로 요약해보자면 '혹시나 왜 이거밖에 안 주냐면서 따라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들이었다. 무서움을 안고 급히 지하철을 탔다. 그제야 안도를 하고 긴장한 어깨를 바로 펼 수 있었다. 씁쓸했다. 이 도시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믿을 것은 내 몸 하나뿐이기에 무섭고 낯선 상황에서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긴장을 하고 경계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소녀의 시선을 스쳐 지나오니 그런 긴장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 소녀야 말로 이 세상이 진짜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매일 그곳에 서 있는 동안 소녀는 수많은 세상의 무서움과 마주할 것이다. 연민 혹은 경계의 눈초리나, 오늘 수입이나 끼니에 대한 걱정 같은 것. 아니면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충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눈망울에는 세상에 대한 겁이 가득 들어차 있을지 모른다.


 그녀와 마주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소녀의 마지막 눈빛은 선명히 각인되었다. 소녀가 어떤 연유로 그곳에서 구걸을 하게 되었는지, 글은 읽을 수 있는지, 직업교육을 받을 수는 없는 건지, 꿈은 뭔지. 갑자기 그 소녀에 대한 많은 것들이 궁금해졌다.


 초점이 없던 소녀의 눈동자, 그 어두운 빛이 내 마음 한 편에도 스며들어 머물렀다. 그 눈동자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텅 비어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이 빼곡하게 들어 차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 눈빛은 무슨 의미일까? 공허, 슬픔, 해탈, 무념무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을 떠올렸다. 이런 단어들도 어쩌면 철저히 나의 기준으로 하는 생각일 수 있다.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고 냉정히 말해본다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연기일 수도 있다. 그게 진실이라고 해도 마음이 쓰였다. '지금, 소녀는 행복할까?'라는 물음표가 마음 안에 가득 들어찼다.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소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나의 행복의 기준과 그녀의 기준이 어쩌면 아주 많이 다를 수 있다. 그녀는 어떤 것에 행복을 느낄 지도 잘 모르겠다. 내겐 상상조차 되지 않는 그녀의 삶.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곳에 매일 서 있을까. 자신의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불평불만을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지. 아무리 생각을 하고 상상을 해 봐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나는 그 마음을 단 1%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이렇게 소녀의 행복을 바라는 것뿐이다. 나는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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