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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ete Apr 22. 2016

전혀 쿨하지 못한 이야기

베를린의 얼굴들 2

 한참을 신이 나서 걷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언제부터, 무슨 말로 시작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 한참을 날 불렀던 것 같다.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낯선 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워 말을 걸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영어 듣기 평가 MP3 파일을 5배속 한 것 같은 속도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지금 빨리 가야 하는데, 네가 너무 마음에 들어. 특히 너의 스타일이 맘에 들어. 같이 커피 한 잔 하고 싶어."같은 말들이었다.

 

 줄줄이 소시지를 뽑아내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말들을 늘어놓던 그 남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말을 이해하냐고 물었다. 아주 조금 이해했다는 의미로 검지 밑에 엄지를 갖다 댄 손을 보여주며 'A little bit'이라고 말하려는데 그는 내 손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0퍼센트? 오 마이 갓!'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다가 베를린에서 좋은 여행하라는 인사와 함께 떠났다. 애초에 그 남자와 커피를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서로가 한 말이나 제스처의 의미를 잘 이해했다면 더 재밌는 인연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아쉬웠다. 잠깐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말 유쾌하고 밝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한 줄 평을 남겨보자면 '쿨하다.'


 그는 너무나도 쿨하게 나에게 다가와 내가 맘에 든다고 표현했고, 나의 거절에 너무나도 쿨하게 미소를 지으며 떠났다. 여기가 베를린이라서, 외국이라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나,  자주 가는 카페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번호를 물어보곤 한다. 요즘은 좋으면 좋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게 쿨하다고 여겨진다.


 그런 면에 있어서 나는 전혀 쿨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속 시원하게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빙빙 돌려서, 마치 붓에 한없이 투명한 물을 묻혀 하얀 종이 위에 글을 쓰고는 물이 채 마르기 전에 얼른 그 사람이 알아채 주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고작 물로 쓴 글씨 정도의 옅은 표현 가지고 혹시나 내 마음을 들킬까 봐 전전 긍긍하기도 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을 늘 부자연스럽게 감추려 노력했다. 그리고는 곧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혀 끝까지 올라온 말들은 억지로 삼켰다. 너를 향했던 뜨거운 말들. 그렇게 애써 삼킨 말들은 늘 나를 아프게 했다. 아픈 마음을 먹기 싫은 알약처럼 꾸역꾸역 삼키고는 밤마다 끙끙 앓았다. 이제 좋아하지 말아야지. 그만 멈춰야지. 수 없이 다짐하고는 늘 또다시 열병을 앓았다. 늘 그렇게 나의 감정을 참는 것에 익숙했다. 평소에는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하는 편인데도, 너에 대한 생각들은 좀처럼 입 밖으로 내뱉지를 못했다. 감정을 덜어내지도 더하지도 않고 정말 있는 그대로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런 얘기들은 마치 속 살을 내 보이듯 너무 부끄러웠다. 내 신경은 온통 너에게 쏠려있었기에 나는 너에 대해서는 늘 예민했고, 매번 눈치채고야 말았다. 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지 못한 마음들은 차곡차곡 모아서 일기장에다 비로소 속 시원히 적을 수 있었다. 마음은 꾹꾹 눌러 담아도 늘 새어나왔다. 그럴 때마다 펜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꾹꾹 눌러 너를 쓰곤 했다. 내 일기장에는 빼곡히 네가 들어찼다. 항상 듣던 노래가 다르게 들렸고, 매일 보던 하늘이 달리 보였다. 네가 가르쳐 준 하늘, 네가 가르쳐 준 세계가 내 마음에 빼곡히 들어찼다.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좀 더 섬세한 표현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너로 인해 나의 언어는 확장되었다.



 너를 만나고 더욱 풍성해진 세상은 설렘과 기쁨이 가득 만발했지만, 꽃들은 얼마 못가 금세 힘없이 툭툭 떨어지곤 했다. 또 금세 피어나고, 다시 빠르게 지고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나는 떨어지는 꽃들을 보면서 종종 슬펐고, 때때로 아팠다.


 나와 너의 사이에는 늘 간극이 존재했다. 나는 너를 향해 걸어가다 늘 그 간극 속에 낙하했다. 깊은 틈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면서 '역시 넌 내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몇 번이고 다시 반복했고 매번 더 깊이 깨달았다. 떨어질 때마다 그렇게 다치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강력한 망각제는 너였다.


 이제 그만 좋아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슬프게도 마음은 좀처럼 쉽게 식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오래오래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내 사랑은 반쪽짜리라서, 혼자서 네 몫까지 더 열렬히 사랑하느라 나는 늘 배로 힘이 들었다. 이 머나먼 곳에서도 역시나 변함없이 습관처럼 너를 떠올렸다. 이 정도 했으면 그만 놓아버릴 때도 됐는데, 손이 다 데고 있는데도 뜨겁게 달구어진 마음을 꼭 쥐고 있는 사람. 정말 답답한 사람. 전혀 쿨하지 못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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