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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cElephant Apr 06. 2019

분노와 혐오

황정은 <디디의 우산>

 나는 위층 아주머니가 불편하다. 


 빌라 하자유지보수금을 1/n로 나누기로 했을 때, 상대적으로 큰 평수인 위층 아주머니는 '손해라면 내가 제일 손해, 다들 이견 달지 말라' 하셨다. 이견이 있는 사람은 돈 문제에서 조금도 손해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꼭 돈 때문에 이견을 내는 게 아닐 수도 있는데, 심지어 정말 손해 보기 싫어서 이견을 내더라도 그게 잘 못 한 건 아닌데, 아주머니는 모든 이견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자신이 양보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그리하라는 태도가 불쾌했다. 가장 작은 평수에 사는 나는 상대적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됐다. 나는 평수대로 나누라고 하고 싶었다. 아주머니의 양보를 받고 싶지도 않고, 그 양보로 이득을 봐서 신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혼자 삐딱선 타고 싶지 않았던 나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때부터였다. 위층의 많은 것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노랫소리, 뛰어다니는 소리, 물건 떨어지는 소리 등 모든 종류의 층간소음, 단톡방에 올라오는 아주머니의 말 하나하나, 모두 나를 분노케 했다.


 그런데 정말일까? 내가 위층 아주머니에게 느낀 감정이 과연 분노일까? 


 분노와 혐오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잘 아는 것에는 분노할 수 있다. 내 가치관과 어긋나는 게 명확하고 내가 근거를 들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면, 분노할 수 있다. 하지만 잘 모르는 것, 막연한 것에 대해서는 분노한 '척'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화낼 이유가 없다. 그냥 싫은 거다. 그게 혐오다. 모르는 것은 공감할 수 없음, 혹은 공감에 대한 거부로도 이어진다. 결국 무지함, 공감력 상실에서 혐오가 온다. 그래서 분노보다 혐오가 쉽다. 


 나는 아주머니를 '무례하고 고압적인' 사람이라고 결론 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상식 밖의 사람이 됐다. 상식이란 절대로 바꾸지 않을 나의 생각, 그게 맞았든 틀렸든 재고해보지 않을 거라는 굳은 결의다. 그런데 과연 내 상식은 맞는 것인가? 사람을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나? 나는 그 아주머니를 잘 알지 못한다. 그녀에 대해 느끼는 나의 감정을 분노에 끼워 맞추려 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나는 아주머니가 그냥 싫은 거다. 거의 혐오에 가깝다. (차마, 진짜 혐오한다고는 못하겠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닐 거라 믿고 싶다)


 무감각한 혐오들을 비난하면서도, 나 역시 혐오의 감정에 취약하다. 모르는 것, 낯선 것을 경계하는 것 까진 그렇다 쳐도, 싫고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해서 선을 긋는 건 위험하다. 알려고 하고, 생각하려고 하는 노력, 귀찮고 괴로울 수도 있지만 그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나의 일상의 모든 게 혐오로 둘러싸일지도 모른다. 



… 젊음도 늙음도 혐오하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노조 활동과 폭로와 노무현인데, 파업은 빨갱이 활동이고 삼성의 수십억 원대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비열한 배신자이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당찮은 자리까지 올라간 범인이다. 막노동에 나보다 많이 버는 것들이 무슨 노조며 파업이냐, 라는 그의 불쾌에는 노동 혐오와 노동자 혐오가 동시에 있고, 그보다 더 근본에는 약함을 혐오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고,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분노나 혐오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말이 '권위도 뭣도 없다'라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노동자, 김용철, 노무현을 향한 그의 혐오는 같은 물줄기가 아닐까,라고 김소리와 나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권위 없음을 혐오한다. 그는 힘없음을 혐오한다. 그는 약함을 혐오한다. 

황정은 <디디의 우산>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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