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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cElephant Dec 31. 2020

<어그레시브 레츠코> 그녀가 혼자 노래방에 가는 이유

회사를 견디는 당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회사 다닐 때 뭔가를 배우는 게 취미였다. 화실을 다니기도 했고, 드로잉 클래스도 많이 찾아다녔다. 미니어처도 만들어봤다. 거의 1년 걸려 만든 미니어처 부엌은 내 책장 한 구석에 고이 모셔놨다. 당장 어디 쓸데는 없어도 내 만족이 컸던 수업들이었다.

새로운 수업을 등록하는 시기는 회사에서 심적으로 고통받던 시기였다. 화가 나도 화낸 후의 상황이 걱정돼서 그냥 참고 스스로를 탓하는 게 차라리 속 편한 나였다. 할머니 표현에 따르면 내 속 내가 긁는 건데 내 안에 쌓인 긁어 부스럼들이 곪아 터지기 직전이 되면 나도 살 방법이 필요했다. 그게 뭔가를 배우는 거였다. 진탕 술을 마시거나 대나무숲에 욕이라도 하면 편했겠지만, 톱밥 냄새나는 작업실에서 오백 원짜리만 한 의자를 깎는 게 내가 견디는 방법이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어그레시브 레츠코>  (출처: 넷플릭스 화면 캡처)


<어그레시브 레츠코>는 회사원 레츠코의 이야기다. 악질 상사와 속을 뒤집는 동료들을 견디며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회사를 다녀야 하는 월급쟁이의 삶, 레츠코는 퇴근 후 혼자 노래방을 찾는 게 삶의 낙이다. 하루 종일 하고 싶은 말 하나도 못하고 꾹꾹 눌렀던 진심을 토해내는 그녀의 노래는... 기염을 토하게 만드니... 무려 데스메탈이다! 들어는 봤나, 데스메탈? - '폭력이나 악마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템포 빠른 헤비메탈' 국어사전의 설명이다. 그렇다. <어그레시브 레츠코>는 성실한 회사원 같지만 가슴속은 언제나 어그레시브 한(aggressive, 공격적인) 레츠코의 이야기다.

세상 귀여운 캐릭터가 데쓰메탈을 한다는 반전 설정은 이미 재미있다. 근데 이게 너무 내 이야기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일지도...) 미친 듯이 일 시키고 인격모독 발언 일삼는 상사, 여우짓만 하고 일은 다 떠넘기는 동료, 일 조금 가르쳐줬다가 기분 나쁘다고 새벽에 문자 해서 피 말리는 후배... 내가 회사 다니면서 꼭 한 번씩은 봤던 사람들이다. 더 똑같은 건 뭐냐고? 레츠코처럼 나도 그들한테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거다. 노래방에서 혼자 문 닫고 죽어라 노래하는 레츠코나 스트레스로 새까매진 속을 달래느라 닥치는 대로 뭘 배우고 다니던 나나 똑같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상태로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상사가 속을 박박 긁어도 뭐라 못해요  (출처: 넷플릭스 화면 캡처)


큰 소리 칠 수 있는 곳은 노래방뿐  (출처: 넷플릭스 화면 캡처) 


격하게 현실감 '쩌는' 이 애니메이션은 연애 이야기 조차 너무 사실적이라 가슴이 아린다. 시즌3까지 오면서 레츠코가 본격적인 연애를 한 건 한 번 정도인데 시작은 참 로맨틱 코미디 같았다. 우연히 만난 별 볼일 없는 그 녀석, 알고 보니 굉장한 사람이었고 레츠코가 너무너무 좋단다. 평생 함께 있고 싶다는 그의 말에 레츠코는 그렇게도 그리던 결혼을 꿈꾸며 행복의 도가니에 빠졌건만... 평생 함께 있자의 뜻이 꼭 결혼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는 결혼제도를 반대했다. 그의 확신에 찬 생각은 참 멋져서 레츠코도 그래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안정된 행복을 바라는 레츠코는 그와 함께 할 수 없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해봤자 결국 지칠 거다. 나도 옛날 그 어떤 연애에서 했던 속앓이가 생각나서 레츠코를 부여잡고 울었다.


연애는 달달하지만  (출처: 넷플릭스 화면 캡처)


이별은 언제나 먹먹하지 (출처: 넷플릭스 화면 캡처)


시즌1,2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대부분이 인간관계)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다면, 시즌3에서는 레츠코가 갑자기 아이돌이 된다. 뭔 이야기가 뜬금없이 산으로 가나 싶지만, 일본의 아이돌 문화는 우리나라 기획사와 연습생 문화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레츠코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차저차 아이돌이 된 것 까지는 나름 이야기가 된다. 아이돌과 회사원이라는 도저히 양립이 안 될 것 같은 세계는 레츠코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넌 뭘 선택할래? 그녀의 선택이 뭐가 됐든 레츠코는 이제 예전의 그녀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돌이 되어도 데스메탈은 계속된다 (출처: 넷플릭스 화면 캡처)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애니메이션은 귀여운 캐릭터에서 너무나 사람냄새가 남에 있다. 이등신 캐릭터에 단순한 작화인데도 어쩜 저렇게 디테일할까 역시 산리오구나 감탄하게 된다. 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회사 산리오, 바로 그 유명한 헬로키티를 만든 곳이다. 게임회사에 다닐 때 키티 게임을 만들었었는데 자료 조사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다. 키티는 고양이가 아니라 소녀라는 것, 취미도 있고 꿈도 있고 심지어 남자 친구도 있다는 것... 그리고 산리오에는 키티 말고도 캐릭터가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다들 깨알 같은 신상명세서를 갖고 있다는 것. 캐릭터에 인간성을 부여함으로써 단순히 팬시 제품 디자인으로서의 캐릭터가 아니라 정말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연예인 같고 아이돌 같은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산리오가 그간 축적해온 경험치가 폭발한 것이 아닐까 싶은 게 바로 이 <어그레시브 레츠코>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일 뿐인데 어디 가면 진짜 레츠코 만날 수 있을 것 같고, 하이다한테 왠지 진심으로 반할 것 같고.


나름 이 작품의 남주일 지도? 촌스럽고 쩨쩨하지만 비겁하지 않은 하이다 (출처: 넷플릭스 화면 캡처)


만약이라는 말 참 부질없지만, 그래도 내가 만약 다시 회사 다닐 때로 돌아간다면 덜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해야 하는 일 빼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을 안 열심히 하겠다는 말이다. 눈치 보느라 아등바등 열심히 했던 것들- 야근, 철야, 주말출근, 사회적 관계를 위해 별로 안 가고 싶은 회식에도 열심히 참여한 것들 말이다. 지나 보면 참 부질없는 것들, 잠깐 욕 좀 먹고 말면 되는 것들을 열심히 하느라 내가 놓친 게 얼마나 많았나. 한 번은 친구들과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주말출근을 하게 돼서 토요일 저녁에 합류했다가 일요일 아침에 첫차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바보 같은 열정을 보인 적이 있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 중 하나다. 그 회사는 결국 망했고, 나는 추억을 놓쳤지. 



덧붙이는 이야기_

일본의 문화가 우리와 달라서일까. 다소 뜨악하는 내용도 있었다. 직장에서 상사가 레츠코에게 커피 타오라고 한다든가, 레츠코가 결혼하고 직장 그만두는 걸 꿈꾼다든가,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여자의 '계급'이 달라진다고 표현하는 직장 동료라든가. 우리나라의 8,90년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페미니즘과 성평등에 대한 문제 인식과 논의가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훨씬 보수적이고 늦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건지, 아니면 내가 우리나라의 실상을 몰라서 하는 소린지. 약간의 답답함은 감수해야 하는 현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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