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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밍 Jun 06. 2022

슬렝을 알아요?

- 겹쳐진 인연

작년에 함께 공부했던 겔은 한국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지만 나이는 5학년으로, 함께 했던 시간이 무척이나 즐겁고 재미있었다. 하나하나의 행동과 서툰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찌도 그리 듬직하고 어른스러운지. 이런 겔과 또 하나 통하는 접점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슬렝이었다. 


슬렝은 내가 한국어 강사를 처음 시작하던 재작년에 만난 몽골 친구로 ㅇ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코로나 초기여서 학교 분위기도 매우 어수선했고, 4월까지 계속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다가 5월이 되어서야 하나하나 1:1로 지도했었다. 슬렝은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산만하기로 유명한 아이여서 첫 만남 전에 담임 선생님께서 이런저런 부탁을 하셨던지라, 조금 긴장을 했었다. 


슬렝은 생각보다는 의사소통이 잘 되었다. 말은 매우 잘했으나, 학습으로 들어가 '한글'이 부족한 거였다. 'ㄱ'를 배우고 'ㅓ'를 배웠으나, '거'로 합쳐 읽지 못했다. 학습으로 들어가면 몸을 비비 꼬고 힘들어해서, 자주 주변의 관련된 이야기로 분위기를 전환했는데, 'ㄸ'을 배우는 시간이었나... 예시 단어로 '떡'이 나왔다. 


"슬렝, 떡 알아요? 떡 좋아해요?" 

"네, 우리 할아버지가 떡집해요"

"아, 할아버지가 떡집에서 일해요?" 

"네, 우리 할아버지 유명해요. 한국 TV에도 나왔어요."  


알고 보니, 슬렝의 할아버지는 몽골에서 아주 오래전에 한국으로 와서 지역에 자리를 잡고 떡집을 차렸다. 지역분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역에서 나는 재료들로 떡을 만들기 시작해 떡집까지 열게 되었고, 몽골 사람이 한국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것이 흥미를 끄는 소재였는지 이미 방송 출연도 여러 번 하신 분이었다.


하루는, 겔이 수업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연락도 없고 결국 오지 않은 날이 있었는데, 다음 시간에 물어보니 휴대폰이 고장 났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겔에게 어머니 휴대폰 번호를 물어보았는데, 겔이 불러주는 번호를 내 휴대폰 저장하려고 보니 이미 저장되어있던 '슬렝 어머니'라는 문구가 뜨는 것이었다. 순간, 겔과 슬렝이 남매인가? 겔은 ㅅ초등학교 학생이고, 슬렝은 ㅇ초등학교 학생인데? 혼란스러웠다. 


"겔, 엄마 번호 맞아요?"  

"네. 왜요?

"이상하네요. 작년에 선생님이 가르쳤던 슬렝이라는 친구의 어머니 번호와 같아요."

"아... 선생님, 내가 이야기할게요."


겔의 부모님은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 몽골에서 처음 왔을 때 지역분이 떡집을 하는 같은 몽골 사람인 슬렝의 할아버지를 소개해 주었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겔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거나 연락을 취해야 할 때가 많았는데, 겔의 부모님과는 소통이 전혀 안되어 아예 겔의 어머니 연락처를 슬렝 어머니의 연락처로 알려준다고 한다. 실제로 내 경험으로도 슬렝 어머니는 한국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겔이 자주 들른다고 이야기했던 '떡집'이 있었다. 보통 '떡'의 식감을 싫어하는 외국 친구들도 많은데 겔은 떡을 좋아하나 보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겔도 내가 슬렝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매우 신기해했다. 


그날은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슬렝의 이야기로 한참 동안 웃음꽃을 피웠다.  



리아는 눈웃음이 참 예쁘다. 나는 리아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리아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작년 1년 동안 ㅅ초등학교에서 리아를 만나면서 말소리를 들어본 것은 책을 소리 내어 읽을 때뿐이었다. 한국어 책을 읽고 쓰는 것을 보니 한국어를 못해서 말을 안 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와의 소통은 쓰거나 번역기를 이용하거나 했다. 어떤 이유로 말을 안 하게 되었는지 걱정이 되어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기도 했다. 속에 쌓인 스트레스가 많은 건지 몸이 자주 아파서 결석도 잦았다. 결국 마지막 수업에도 리아는 결석을 했고, 리아를 못 본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에린은 1학년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에게 일단 말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매번 이야기하지만 말보다 행동이 먼저다. 행동도 어찌나 재빠른지 스프링처럼 통통 튀어 제어를 할 수가 없다. 올해 ㅅ학교 수업을 다시 나가게 되면서 새로운 1학년을 만났다. 그중 에린은 또래보다도 더 어리고 천방지축이라 수업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저학년들은 수업 후에 하교지도에도 신경을 써야 해서 그날도 교문에서 에린의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린, 오늘도 아빠가 데리러 와요?"

"아니에요. 오늘은 언니 와요."

엄마는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 바깥출입이 불편하시고, 아빠는 일을 해야 하니 종종 늦게 에린을 데리러 오셨었는데, 오늘은 언니가 오기로 이야기가 되어있는 모양이다. 교문 옆 화단에서 떨어진 꽃잎을 주워 모으고 있는 에린을 살펴보며 한 편으로는 에린의 언니처럼 보이는 사람이 오는지 살폈다. 


"언니!" 

아, 저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웃음은...

리아였다. 

"리아?? 리아 맞아요?" 

나는 놀라기도 하고 너무 반갑기도 해서 리아의 손을 꽉 맞잡았다. 리아도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에린은 선생님이 어떻게 우리 언니를 알지?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리아는 어른스러웠다. 러시아어로 꾸중하듯 말하며 에린의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쳐주는 모습은 마치 엄마 같았다. 앞으로 본인이 에린을 데리러 올 거라고, 학교가 늦게 끝나는 날은 조금 늦을 수 있다고 번역기를 돌려 나에게 알려주었다.  


뜻하지 않은 이런 인연이 참 소중하구나. 알게 모르게 서로 같은 공간에서 연결되어 있었어. 

좋은 인연으로 서로를 기억할 수 있음이 좋다. 


[Photo by Nong V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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