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은 외국인 싫어해요
교실에서 수업을 준비하며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나딘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이렇게 소리를 치면서 들어왔다.
"선생님! 저는 바보예요?!"
순간 나딘의 끝 억양이 물음인지, 아니면 자신이 바보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상 명랑한 나딘이었기에 학급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다. 책상에 엎드려있는 나딘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마스크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보였다. 들어보니 A라는 남학생 이야기였다.
A는 나딘이 1학년 때에도 종종 나에게 소식이 전해지는 학생이었는데, 학급에서 나딘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놀리고 툭툭 때린다고 했었다. 2학년에 올라와 다른 반이 되었지만, 복도나 급식실에서 마주칠 때 여전히 이유 없이 툭툭 치면서 밀거나 바보라고 놀린다고 했다. 오늘은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급기야는 "바보! 외국인 싫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딘의 이야기만 들었으니, 그것도 한국어로 소통이 100% 정확하지 않으니 정말 사실만을 이야기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단, 나딘이 울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정원이 들어왔는데, 정원도 그 남학생을 알고 있는 듯 나딘을 많이 괴롭힌다고 전해주었다.
담임선생님께 이야기했는지 물었다. 1학년 때에도 이야기했고, 지금도 이야기했고, A는 선생님께 혼이 났다, 그렇지만 계속 나를 놀리고 괴롭힌다. 정말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나딘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말이 막혔다. 나딘을 살짝 안아주었을 때, 정원이 나딘을 위로했다.
"나딘, 울지 마. 한국인은 외국인 안 싫어해. 한국어 선생님 우리 사랑해.
태권도 선생님 우리 사랑해. 그리고 2학년 5반 친구들 나 사랑해."
오전에는 ㅁ초등학교에 중국어, 중국문화 수업을 나가고 있다. 대상은 고학년 한국 학생들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면서 다양함을 이해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동아시아 시민을 양성함이 목표인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반중 감정이 심해지고 있고, 특히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올해는 수업하기가 더 버거워졌다.
각자의 이름이 중국어로는 어떻게 발음되는지를 배우고, 자신의 이름 글자나 좋은 뜻의 한자를 이용해 휴대폰 그립톡을 만들어보는 시간이었다. 그립톡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학교 예산을 이용하여 적당한 가격의 것을 구입했는데, 품질이 좋지 않았는지 만드는 과정에서 쉽게 부서지는 것들이 몇 개 있었다.
믿고 싶지 않다. 수업시간에 학생에게서 저 단어를 듣다니. 중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인을 비하하는 단어를 내게 직접 내뱉던 중국인의 눈빛을 기억하는 내게 저 단어는 특히 민감한 말이다. 만들기를 멈추고 나의 일장연설 끝에 그 반 학생인 호수가 말한다.
"맞아. 너 그렇게 말하는 거 나한테는 패드립(가족을 모욕하는 말)이야.
우리 엄마 중국사람이잖아."
다문화가정(외국인 가정 포함)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매년 느낀다. ㅅ초등학교의 다문화가정 자녀는 총 50여 명이라고 교감선생님께 전해 들었다. 내가 수업하는 저학년 반에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랍, 이집트, 필리핀, 러시아 등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있고, 부모의 귀화로 인하여 모습만 다를 뿐 국적이 한국인 학생들도 있다. ㅁ초등학교 호수의 어머니가 중국인이라는 것은 수업시간에 호수가 몇 번 언급했으므로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몰랐을 리 없다.
공교육에서도 다문화 감수성을 기르는 많은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지만 내가 겪은 일련의 사실들은 아직 아이들의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니, 사실 아이들은 교육받고 있지만, 그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치는 어른들의 편견이 아이들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외국인인 나딘이, 혹은 엄마가 중국인인 호수가 앞으로 얼마나 더 어려움을 느낄지, 또 행복을 느낄지 알 수 없다. 다만, 가끔 나도 만나게 되는 맹목적인 외국인 혐오와 비하 발언은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차별을 당하고 싶지는 않은데, 차별하기는 쉽습니다. ‘내가 차별을 했을 때 책임을 지라고 하면 받아들여야 하나?’라는 물음이 들죠. 그런데 스스로 차별을 하지 않기로 하고 차별이 없는 사회를 열망하고 있다면 책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폭력 없는 사회를 위해서 폭력을 안 하기로 하고 그에 대해서 교육을 받고,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지우는 것처럼 말이에요.”
- 김지혜 교수, <선량한 차별주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