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숨에 거짓을 날숨에 인정을
깎이고 깎여 또 닦이고 닦여 하루를 마감하면서.
아니 내일을 위해 오늘을 강제 종료하면서. 아니다 사실 마감은 강제 종료와 같은 말이니. 오늘 하루를 마감하면서.
누워서 내쉬는 숨에 숨 쉬듯 흘려버리는 말 '쉽지 않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무거워지는 것이 있고 가벼워지는 것이 있는데.
고백은 뱉으면 무거워지고 인정은 뱉으면 가벼워진다. '쉽지 않다'라고 뱉는 순간 가슴속에 무언가 풀리는 느낌이 드는 걸 보아선 숨 쉬듯이 하루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인정과 동시에 마감하는 하루를 산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돌이킬 새도 없이 나는 또다시 책의 줄 글 속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위쪽과 아래쪽 여백 같은 하얀 아무것도 없는 시간을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사실은 쭉 이어진 책의 새로운 페이지를 펼쳤을 뿐인데. 매번 가늠이 되고 감당이 되는 것들의 연속이지만 그 시작은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자꾸만 오지도 않은 다음 페이지를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들춰보고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잠이 든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생 무렵. 다른 아이들처럼 나도 엄마 손에 이끌려 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다만 내가 다니는 학원은 수영, 미술, 피아노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는 곳이었고. 따로 공부를 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진 않았다. 대신 학습지를 사서 집에서 엄마랑 공부를 했다. 고학년 전까지 엄마는 나의 과외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꽤나 열성적인 선생님이었으며 나는 어린 시절 그 선생님을 무서워했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나와 엄마 사이에는 매번 수학 문제집이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우리 모녀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수학'이라고 생각했었다. 엄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게 지금까지도 '수학'이기 때문이다. 즉, 계산적 사고와 숫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풀어나가는 것에 우주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다. 아무튼 그 순간 쳐다보기만 해도 답답한 문제집을 바라보다가 어디까지 풀어야 하나 뒤 페이지로 넘겨 보는 순간. 그 순간마다 나는 혼이 났다.
"주야, 어디까지 풀어야 하는지 들쳐보지 말고. 한 장 한 장 하다 보면 끝이나. 넌 꼭 집중력이 떨어지면 뒷장을 보더라"
그렇게 타박을 받던 나는 똑같이 자라 뒷장을 훔쳐보는 지금의 내가 되었으리라. 그때 나는 엄마 말처럼 집중력이 떨어져서 문제가 풀기 싫은 마음에 오늘 치 분량을 자꾸 확인했다. 그리고 빨리 끝내고 놀고 싶어서 억지로 억지로 안 되는 수학을 열심히 풀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납득이 되는 할 일은 최선을 다하니까. 다만 하기 싫은 건 또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최근의 나는 엄마와 마주 앉아있던 그 어린 시절과는 달리 무서워서 뒷장을 살펴본다. 문제집과 달리 매일은 끝이 없고, 하루는 아무리 빨리 마감해도 놀 수 없다. 문제 같은 하루하루를 풀고 누우면 쉽지 않음을 깨달아 무섭다. 오답인지 정답인지 정해지지 않은 매 순간 납득이 되었는지 설득이 되었는지 모를 하루를 여전히 계산과 재고 따지는 건 어려운 내가 하루를 살아내는 건 쉽지 않다. 가끔은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엄마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치 내비게이션처럼 딴 길로 새지 않고 목적지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알려 줄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은 엄마와 나 사이 우주를 건널 도전이기에 귀찮아서 접어 둔다. 우리 모녀는 그 우주를 건너다 몇 번 길을 잃고 헤맸으니 함부로 발을 딛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렇게 오답인지 정답인지 모르는 매 순간 납득인진 설득인지 모를 선택의 결과로 하루를 산다. 여전히 숫자 계산과 재고 따지는 건 어려운 내가 얼마만큼 잘 살았는지 알 수 없다. 그 수치의 측정값과 기준 역시 오리무중이다. 뒷장을 들쳐보다가 엄습하는 두려움에 수면마저 방해를 받을까, 얼른 생각의 페이지를 덮고 평온한 척 표정을 짓고 숨을 내쉰다. 거짓말 같은 하루를 보내며 ‘쉽지 않다‘라고 내뱉는 순간 유일하게 진실을 말한다. 그 인정의 찰나 살짝은 나를 짓누르는 게 가벼워졌다는 착각을 하고 잠이 든다.
오늘도 역시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