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남준을 좋아한다. 그리고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나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예술가가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답으로 나올 대표적인 사람이 백남준이다. 그의 미술사적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액션 페인팅, 액션 뮤직 등의 행위예술로 기존의 오브제를 중심으로 한 작품 개념을 부정하는 새로운 예술을 제시했던 점, 텔레비전 수상기와 그 화면에 송출되는 현련한 영상이 특징인 비디오 아트 분야를 창시한 점이다.
사람들은 백남준이라고 하면 보통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 때문일까? 그의 활동 초기 시절 <머리를 위한 선>과 같은 행위 예술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매우 당황스러워 한다. 나 역시도 무대 위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는 그의 초기 시절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보고 무척이나 놀란 적이 있다. 난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인 전자 매체를 능숙하게 다루는 하이테크 비디오 아티스트와 과격한 퍼포먼스를 하는 행위 예술가의 이미지는 서로 이질적으로 느꼈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백남준의 대표적인 두 예술인 행위 예술과 비디오 아트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비디오 아트는 그의 초기 행위 예술을 계승하는 측면이 강한 걸까? 아니면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전개하며 기존의 행위 예술을 했던 스스로를 자기부정하며 둘 사이에 단절적인 면이 강할까? 늘 두 예술적 업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품으며 백남준의 작품을 감상하였고 전시에서 본 그의 작품과 해설을 통해 질문에 관한 답이 비교적 또렷해졌다.
II. 본론: 전시회에서 읽은 비디오 아트 그리고 교과서로 배운 플럭서스 악파 행위예술
1.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가변하는 소장품과 백남준 <다다익선>
직접 촬영
통념상 미술관이라고 하면 기념비적인 작품을 보존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미술관에 소장, 전시된 작품은 시공간의 변화에 구애 받지 않고 스스로의 모습을 오래토록 간직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갔던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의 <가변하는 소장품>展은 이러한 통념에 의문을 제시하는 여러 작품을 전시하였다.
작품이 전시된 이후 철거, 해체되는 것을 염두하여 그 작업이 용이한 구조로 만든 작품, 향가루를 이용해 조형하고 전시 중 일부를 태워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작품 등 시간이 지나도 형태가 변하지 않게 보존하도록 하는 것과 거리가 먼 여러 작품이 전시하며 소위 ‘불변하는 소장품’과 대비되는 ‘가변하는 소장품’으로서의 예술 작품을 보여줬다.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 서울> 직접촬영
이를 통해 “미술관의 소장시스템이 과연 정말 시간의 흐름에서 변화하지 않게끔 작품을 보존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완벽한 보존이 허상이라면 어떤 대안을 찾아야하는가? 무엇을 보존해야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백남준의 대표적인 비디오 아트 작품인 <다다익선> 역시 ‘가변하는 소장품’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다익선>은 1003대의 비디오 화면이 송출되는 텔레비전 수상기를 탑처럼 쌓은 거대 비디오 작품이며 모니터는 브라운관으로서 그 기술적 특성상 15여년의 수명을 갖는다. 그렇기에 브라운관이 수명을 다한다면 화면 송출을 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작품의 모습이 변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작품을 처음 모습대로 보존하고자 최초의 브라운관 모델로의 교체, 작품의 본질을 영상 콘텐츠로 보아 새로운 최신형 모니터로 갈아끼기, 작품에 일어난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맞다고 보면 고장난 채 화면을 송출하지 않는 모니터를 두는 것 등이다. 작품이 수명을 다한 뒤 어떻게 대응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백남준은 “선택은 후대의 몫”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변화에 대해선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되는 것이고 작가가 모든 것을 다 결정하진 않는다고 하였다. 결국 작가 역시 작품이 갖고 있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변화 가능성을 의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다익선 제작과정
2.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 행위예술과 플럭서스 악파
백남준이 젊은 시절에 소속된 플럭서스 악파는 ‘유동적’이란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진다. 이들은 작품의 결과물이 아닌 그것을 만드는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예술 즉 작가조차도 완성본을 알 수 없는 우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행위예술 해프닝을 주로 하며 그 과정에서 자유로운 관객 참여을 하기도 했다. 이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로 이해되며 이후 음악-미술 등 다양한 매체의 통합 가능성을 통해 미술사에 영향을 주었다.
난 이들이 행위예술을 한 이유가 뭘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 악파가 전개된 시기와 장소인 1960년대 독일을 주목했는데 세계 2차대전 이후 전범국으로서 경제적, 정신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과거 전쟁의 원인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운동을 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3. 소결론: 시간예술이라는 공통분모로 이해하는 백남준의 두 예술
음악은 시간 예술이다. 음악은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물리적 시간을 분절하여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기도 하다. 미술도 시간 예술인가? 20세기 이전의 전통적 회화, 조각 등은 시간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술관에 있는 수많은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그 모습을 유지하도록 보존하고 소장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은 시간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인 미술 작품의 얘기다. 20세기 들어서 예술의 개념을 재정의할 만한 혁신적인 예술이 많이 등장하였고 그 가운데 특별히 백남준 예술은 시간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행위 예술, 비디오 아트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같은 시간 예술이라고 하지만 행위예술과 비디오아트의 시간은 전혀 다르다. 물리적 시간을 기준으로 따져도 행위 예술은 그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시간은 짧게는 초, 분, 시간, 일 단위일 것이다. 비디오 아트도 재생 반복되는 영상 한편을 따질 땐 분 단위이지만 기술적 제약에 따른 수명은 연 단위일 것이다. 또한 퍼포먼스는 물리적 보존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공연하는 순간 속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내는 예술이지만 비디오 아트는 비교적 안정된 오브제에 의해 보존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앞서 얘기하였듯 기술적 제약에 따른 전자매체의 수명이 지나면 변화할 가능성을 염두하였으며 또한 영상이 재생되며 변화하는 화면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점, 행위 예술도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그 모습을 유지하는 전통적인 작품과의 대조 즉 가변성, 시간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은 시간예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예술세계가 강한 연관성과 계승의 측면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III. 나가며: 백남준과 <가변하는 소장품>의 시간성과 가변성은 어떤 의의를 갖는가?
1. 불변하는 소장품: 그렇다면 영원한 보존과 기념은 무의미한 허상인가?
작품을 보존하는 기술상의 제약, 무엇을 보존할지 결정하는 기준은 사회문화적인 상황과 정치적인 요소에 의해서 결정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불변하는 소장품이라는 개념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벽한 보존은 불가능하다고 하서 예술 작품을 보존하고 기념하려고 하는 행위 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완벽한 보존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최대한 원형 그대로 이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 혹은 그것이 안 된다면 대안으로 선대가 남긴 문화유산을 본질만이라도 보존하려는 노력들,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이 본질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것인지 가리려고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도 매우 의미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시간성, 가변성을 극대화한 20세기의 수많은 미술작품을 고려하면 영원성, 불변성을 기준으로 접근하는 전통적인 예술 수용관(觀)을 부정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특정 시대의 혁신적 예술 역시 당대까지 보존되어온 기존 예술에 관한 철저한 이해, 반성 속에서 탄생한 점을 고려하면 '불변하는 소장품' 관점으로 접근하는 예술 보존과 기념 역시 매우 중요하다
2. 내가 음악 전공자로서 생각하는 백남준 예술의 ‘시간성’, ‘가변성’의 의의
음악, 그 중에서도 연주를 전공하는 나는 음악사 교과서를 볼 때 마다 불만이 많다. 음악의 역사=작곡가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공연, 연주문화에 관한 얘기 없이 작곡가와 악보로만 이뤄진 교과서를 볼 때마다 위축되기 때문이다. 같은 작품이어도 어떤 맥락에서 연주하냐, 예컨대 모차르트의 ‘미사곡’을 성당에서 연주할 땐 종교의식으로, 콘서트홀에서 연주할 땐 순수 감상용으로, 음악학교에선 분석과 연구의 대상으로 이해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단위로만 음악사가 서술되어 다양한 연주와 수용의 맥락은 도외시한다.
“음악은 시간예술이다”라는 명제가 정말 참이라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음악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인 연주와 공연을 음악교육이 강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변화의 첫걸음이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시간성’. ‘가변성’의 강조라고 생각한다. 작곡가의 작품과 이를 기보한 악보는 본질적으로 시간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음악을 기록, 재현하기 위해 탄생한 매체인 만큼 ‘영원성’, ‘불변성’에 기반하였기 때문이다.
연주 전공자로서 나는 백남준의 행위예술, 비디오 아트가 강조하는 ‘시간성’, ‘가변성’이 작곡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연주와 수용 그리고 작곡을 동등하게 다루는 음악 연구를 하도록 자극하길 바란다. 물론 20세기 음악 역시 고정된 작품 개념에서 벗어나 우연성, 불확정성 음악이 전개되며 음악 실제 측면에서 ‘가변성’이 강조됐지만 기존의 전통적인 음악사 서술 방식을 재검토하는 수준으로 확장되진 못했다. 앞으로 더욱 시간성과 가변성이 강조된다면 음악 실제 뿐 아니라 연구에서도 연주, 작곡, 수용을 동등하게 다루는 패러다임 변화를 기대한다. 연주 전공자가 본 백남준 예술의 의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