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3 윤석열 내란 사태 규탄 시민행동을 보며
나는 오래전부터 정치 참여 문화를 ‘정의’나 ‘도덕’에 맡겨두지 말고 ‘정치 서비스 소비문화’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아주 어릴 적에 생각한 ‘공직자’는 ‘사명감’이 있어서 ‘사익을 초월하고 공의를 세우려는 살신성인의 태도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공인(연예인 말고 국회의원이나 정무직 공무원)이라면 소위 청백리 적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일 것이고, 그런 삶을 살 거라 기대했다. 그런 걸 ‘정치인의 진심’이라 얘기하곤 했지.
하지만 10년 이상 시간 정치 사회 전반을 지켜본 바, 그런 사람은 없었다. 세상을 바꾸거나 현상 유지라도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기업 후원을 받든 시민사회 모금을 하든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돈이 모이는 곳에는 사욕을 채우려 하는 사람도 꼬이는 것은 물론, 아니었던 사람도 사욕이 생기기 마련. 장례 치를 돈이 없어 백성들이 십시일반 모아 장례를 치러줬다는 서애 류성룡 가족 같은 이는 21세기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치인의 진심’을 믿지 않는다. 시작은 살신성인의 진심에서였을지언정, 한낱 인간인 이상 자신의 이권이나 욕망(국회의원 같으면 자신의 재선)이 없을 리 없고, 초심보다 욕망이 앞서기 시작하면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변절’이라 얘기하며 그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정치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행위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정치인들의 전략 중 하나는 대중의 이익에 영합하는 것이다. 이명박은 ‘국민 모두를 부자 만들어주겠다.’면서 욕망을 자극했고, 박근혜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대의’를 표방하는 깃발 아래서 스스로를 산화할 수 있는 투사는 기백이 될 수 없지만, ‘욕망’에 충실한 대중은 수천수백만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변절이니 뭐니 따질 것 없이 유권자도 Give and Take 전략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너네 표 필요해? 당선시켜 줘? OK. 대신 너 우리말 안 들으면 모가지 쳐서 반품한다.’ 그럼 깔끔할 것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고사 직전인 진보정당이 망한 이유 중 하나다. ‘도덕적 흠결 결벽증’ 때문에 연대해야 할 이들과 각을 세우고, 집권 정당의 가능성이 있는 거대정당이 될 기회들을 제 발로 뻥뻥 차버렸다. (내가 봤을 때는 거대정당이 되겠단 포부 가질 배포도 없었고, 거기서 한 자리씩 하는 이들은 골목대장이 계속하고 싶었던 거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과 그 일당들의 계엄령을 이용한 내란시도 이후, 내란수괴와 그 일당을 성토하러 여의도에서 열린 집회를 본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빠순이가 세상을 구한다.’고 얘기한다. 그간 시민운동을 해오고 정치 참여 주류층이었던 기성세대들이 2030 젊은이들(주로 여성)이 시위의 분위기와 양상을 바꾸었다고 한다. 아이돌 응원봉이 시위 핫템이 되고 당근마켓 같은 중고장터에서 프리미엄을 붙여서까지 핫템을 구하려고 하는 기성세대들도 생겨났다. 그야말로 이번 2024 내란 선동 사태 규탄 시민운동에서는 기존 세대가 판을 깔고 하드웨어적 세팅을 하면, 2030이 그 판에서 신나게 놀아 재끼는 소프트웨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빠순이로 일컬어지는 2030 젊은 여성들은 시위 특화 인력이 맞다. (그 어디에서도 체계적으로 훈련받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들은 사회 어디에서든 억압받는 비주류였다. 집에서는 빠순이 짓한다고 꼽 받아, 사회에서는 나이 처먹고 철 안 들었다고 꼽 받아, 덕질 오프라인 현장에서는 진행사 스태프에게 속옷 안까지 털려가며 인권 유린당하고, 폭염경보 떨어지는 한여름이나 한파경보 떨어지는 한겨울에도 마음으로 낳아 지갑으로 키우는 내 새끼 보겠다고 그 모든 걸 감수하며 거리의 투사가 된 지 오래다. (심지어 그 모든 걸 제 돈 오조오억 주고 한다) 걸핏하면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며 이전 굿즈 절판하고 가격 올려 새 상품 출시하는 기획사 상술에도 항의해야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내 인권 챙기려고도 화내야 하고, 가끔 아티스트인 내 새끼 케어 똑바로 못 해주는 회사한테도 화내야 하고, K팝 팬이라면서 날조 오지는 글로벌 팬(팬 맞나? 싶음)들이랑도 키배 떠야 한다.
그런 이들이 시위의 주축이 되었다는 것은 (덕후 용어 좀 쓰겠음) ‘대한민국 윤석열 ver. 이 ㅈ구리니까 반품하겠다.’는 거다. ‘(주) 대한민국 대표 상품인 아티스트 윤석열 ㅈ구려요. 정계 은퇴 시켜서 감방 보내세요.’ 이 말이다. 그러니까 김건희 특검법이 부결되었을 때도,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투표 미성립으로 개표조차 못 되었을 때도 그들은 ‘우리 수준이 이 정도구나,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후퇴했나 보다.’가 아니라, ‘포기는 개나 줘.’, ‘우리는 쟁취할 때까지 계속해.’가 되는 거다.
어떻게? 이들이 하는 게 맨날 그런 거니까. 맨날 자신들이 문화 서비스 소비자로서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 세상과 싸우는 이들이고 지치지 않는 이들인데 한번 실패한 게 뭐 그리 큰 일이라고.
정치 참여 문화가 ‘정치 서비스 소비문화’로 바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빠순이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ㄹㅇ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