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서 구현되는 조현병
이번주는 세미나를 건너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현병 캐릭터가 등장하는 게임인 HELL BLADE에 대한 소감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사실 게이머들에게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지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내에 장치된 것들이나 증상을 구현한 것에 대해서는 플레이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현재 2가 나와 있는 상태지만 게임플레이를 보니까 보여주는 증상 장체는 1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글이 길어져서 여러편으로 나누어질 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해보도록 하죠.
정신질환을 게임으로 옮긴다면 어떨까요? 정신질환을 겪는 설정을 지닌 게임캐릭터는 많습니다. 그런데 캐릭터가 정신질환을 앓는다고 해서 우리가 캐릭터의 경험을 느낄 수는 없죠. 우리가 게임 캐릭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경험은 힘이나 속도와 같은 스탯 정도의 손맛을 느끼는 것이 고작입니다. 어떤 게임에서는 ADHD 속성이 부여된 캐릭터는 민첩이 올라가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그동안 게임상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정신질환의 속성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다릅니다. 게임 캐릭터에게 수치적으로 부여될 수 있는 스탯 이외의 경험을 우리가 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정신질환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해볼 수 있을까요? 사실 다양한 게임에서 이미 정신질환적인 요소들을 보인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요소들은 증상이 아닌 개성적 요소로 이해됩니다. 예를 든다면 유명한 쯔꾸르 게임 투더문에서는 약물에 의한 기억상실을 다룹니다. 그 후속작에서는 일종의 상상친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둘다 훌륭한 게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정신질환은 증상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훌륭한 시나리오 요소로 기능했습니다.
게임을 통한 간접 경험이란 실로 다양할 겁니다. 기술력은 VR게임까지 발달해 있기도 하고요. 이러한 기술이 발달되기 전에는 신비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에 루시드 드림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꿈을 꿀 수 있는 훈련법등을 연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루시드 드림 자체는 원래 꿈의 속성입니다. 분석현장에서는 그런 훈련을 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실제로 신경증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루시드 드림을 활용하여 현실에서 부족한 것들을 꿈에서 채운다는 고백을 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훈련법을 통해서 루시드 드림을 꾼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암시를 통한 검열의 우회를 꾀하는 것이긴 합니다. 이것은 때론 병리적 특성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일단 게임에서 등장하는 정신병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정신병자라고 부르던 사람들도 원래는 우리와 같은 일반적인 정신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죠. 태어나면서부터 그 존재가 지정되어서 나타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온라인에서 정신질환의 원인을 찾기위해서 토론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유전이고 사회환경이고 여러 가지 내용들을 지목합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이 되었다"는 내용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는 그렇게 따지진 않습니다. 다른 심리치료 이론들과는 다르게 정신분석에서 증상은 주체에 의해 ‘선택’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 선택이론’이라는 것 역시도 있습니다. 의학의 병인론과 따지고 들어가는 것이 많이 다릅니다. 프로이트는 의사였지만 병인론 차원에서 기존 의학의 노선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게임에 등장하는 세누아 역시도 스스로 자신이 정신병을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정신분석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게임에서 세누아라는 이름이 어떻게 결정되었고 여기서 등장하는 퍼즐이 어떤 방식으로 결정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런 부분은 좀 이 게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결정된 것으로 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게임의 내용은 자신의 연인을 헬라라는 여신에게서 되찾기 위해서 연인의 머리통을 들고 다니면서 역경을 헤쳐 나가는 세누아라는 여전사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죽은 연인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머리통을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페르세우스가 메두사 머리통 잘라서 들고다니긴 했지만 죽은 연인의 머리통을 들고 다닌다? 사실 말도 안되는 내용이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누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식을 무시하고 머리통을 들고 다닙니다. 헬라에게 제물로 바쳐진 연인 딜리온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그럴만한 배경이 있습니다. 세누아의 부족이 바이킹에 의해서 몰살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만큼 끔찍한 살육이 벌어진 겁니다. 모두 죽이고 불태워버립니다. 이런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죠. 그런 사실들이 있는데 인간이 어떻게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 정신은 자아 스스로의 붕괴를 막기위해서 여러 가지 방어기제를 동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경증은 그렇게 해서 발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증상이라 부르는 것들이 알고 보면 자가치유를 위한 작동입니다. 그런데 그 자가치유 작용이 너무 과하다보니까 병으로 보인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매커니즘이 굉장히 교묘합니다. 대부분은 흔히 ‘뇌’문제로 설명을 하려고 시도를 합니다. 이 게임 역시도 그런 시도를 했을 겁니다. 뇌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에 환청이나 환각과 같은 감각이상이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유튜브만 봐도 어떤 이상행동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뇌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알콜 중독자의 뇌, 게임 중독의 뇌, 코인 중독의 뇌...등등등....그런데 그렇게 뇌를 강조하는 방식이 어떤 특정 세계관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신분석은 그렇게 따지지는 않습니다. 프로이트는 뇌란 ‘덩어리’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뇌 문제로 신경증이 발병하지 않았다는 것을 임상을 통해서 경험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다양한 여러 가지 개념들을 만들고 연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정신분석을 통해서 증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마치 의학자가 병을 연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증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생각해야할까요? 그것은 병에 대한 기초개념을 가지고 자세히 탐구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프로이트의 기초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거창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증상자체를 탐구할 수 있는 기초적인 소양을 품고 있다는 말이 되겠죠. 이 것은 ‘과학적’ 탐구를 전제로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종의 세계관으로 정신분석을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프로이트는 직접 정신분석을 세계관이나 철학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습니다.
일종의 세계관으로 정신분석을 채택한다면 적당히 말만 만들어내면 병을 어떻게든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대신 이때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 되죠. 중심이론이 없는 겁니다. 적당히 말만 좀 맞추고 전문적인 용어들을 자의적으로 써버리게 됩니다. - 이 반대현상도 있는데 종종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어를 가지고 와서 자신의 문제에 끼워맞춥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문제는 진짜 핵심을 감추고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 반작용이 일어나서 오히려 체면을 더 깎아버리는 상황도 발생하죠.
이것의 좋은 예는 자녀가 부모를 살해한 사건에 외디프스 콤플렉스를 들이밀어서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외디프스 콤플렉스는 형성된 이후에 극복이 되면서 전혀 다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나 아빠를 향한 질투의 감정을 품는 것은 아니죠. 프로이트가 그런 식으로 설명한 사람도 아니었고요. 이러한 오해는 꽤 자주 이야기되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내용입니다. 유아성과 성인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구분이 없고 외디프스 컴플렉스가 '질서'와 관계지어지는 내용들도 탐구할 기초개념이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끼워맞춰서 억지로 설명을 합니다. 이런 내용은 전문 영역에서도 꽤 일어나는 일입니다. 대중이 잘 모르니까 그냥 넘어가긴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