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스토리
이 게임의 시나리오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요? 사실 스토리 자체가 난해합니다. 거의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특히 바이킹과 관련된 신화에 우리는 지식이 그렇게 많이 없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단편적으로는 짐작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파고들 수는 없습니다.
편집증자들이 보여주는 망상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망상은 사실 우리가 듣는다고 해서 그것을 그 자리에서 바로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라캉이 지적했듯 정신병자는 무의식을 겉으로 드러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의 말은 아주 교묘한 꿈처럼 위장된 상태로 우리에게 들리게 됩니다.
실제 편집증자의 망상을 직접 접해본다면 거기서 어떤 의미를 발견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수시로 의미가 변하고 또 다른 뜻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상이 쉴 새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죠. 과거에 저와 대화를 잠시 나누었던 편집증자는 방송국 전파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했습니다. 방송국 전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디로 이어졌을까요? 그 전파가 '바다’로 퍼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다는 가수이기도 하죠. 동시에 여자고요. 그리고 그는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듣기에는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 게임의 대사가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게임을 시작하고 세누아가 헬로 진입하면서 그녀는 끔찍한 과거와 마주하게 됩니다. 세누아의 어린 시절, 드루이드였던 아버지는 세누아의 어머니의 정신이 이상해졌음을 알아챕니다. 고대에도 각각의 정신치료 방식들이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종교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어떤 종교적 치료를 한다고 해서 차도가 있진 않습니다. 무병의 경우에는 굿과 같은 무속 의례를 통해서 진정이 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의 질환이 '무병'인지 아닌지 일반에서는 구분이 힘들고 무속인이라고 할지라도 '빙의'라고 해도 별 차도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초반에 살짝 기대감에 괜찮아지는거 같은데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리죠.
견디다 못한 세누아의 아버지는 아내를 어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화형시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세누아가 보고 말죠. 어머니가 산 채로 타죽는 모습을요. 우리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런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정신질환의 원인은 해부학적이진 않습니다. 증상자체에는 우리에게 의식되기 어려운 유익하다고 착각할 수 있는 기능들이 있습니다. 세누아의 경우에는 광기입니다. 그 광기가 없다면 세누아 자체가 견디고 있는 혼란을 감당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세누아도 광기에 조금씩 빠져들어갑니다. 환청도 듣고 환각도 보는 겁니다. 이것이 이차성징 전까지는 '정상’의 범주에서 등장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환상과 현실을 구분 짓는 그 벽이 얇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면서 거기에 좀 더 많은 내용을 덧붙이고 현실과 환상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들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하도록 하죠.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세누아는 환각을 봅니다. 그것도 어둠이라는 환각입니다. 그 어둠이라는 환각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세누아는 소리칩니다.
“당신이 어머니를 괴롭히고, 결국 죽인 거에요! 어둠은 바로 당신이야! 어머니는 신과 맞선 게 아니라 당신과 맞선 거라구요!”
“그 의식, 몇 년에 걸친 고립과 고독함. 아직도 널 괴롭히는 그 고통. 그게 네 안의 저주와 맞서 싸울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둠은 네 안에 있는 거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당신은 나조차 죽이려고 했지만 이젠 나도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어!”
게임상에서 나타나는 대화라고는 하지만 저는 조금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상황으로 따진다면 맞죠. 세누아가 어머니를 불태워 죽인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정당합니다. 이런 올바른 상황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우리의 어린시절에 아버지를 통해서 초자아가 형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누아는 그 초자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편집증’ 상태입니다. 자아가 비대해져 있는 겁니다. 비대해진 자아는 평소보다 훨씬 과격한 표현을 하게 됩니다. 저의 느낌에서는 초자아의 검열을 강하게 부정하는 자아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과거 세누아는 광증 때문에 주변과 잘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주변과 분리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딜리온이라는 픽트족 전사를 만나게 됩니다. 둘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게 점점 자신의 증상을 이겨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내용은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들이 꿈꾸는 내용이기도 하죠. 사랑에 의한 치료라는 겁니다.
플라톤은 사랑을 두고 가장 강력한 정신병이라고도 했습니다. 저도 과거 글에서 사랑이 정신질환의 극복에 유익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정신병자의 자아가 비대해져 있어서 초자아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신병자라고 해도 사랑에 빠지면 다른 소린 다 안 듣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말 만큼은 듣게 된다는 겁니다.
고대의 정신치료 중에서 도덕치료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광인들에게 밥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밥은 먹지 않아도 그 사람이 주는 밥은 먹었다는 거죠. 우리는 그것을 전이문제로 검토할 수 있지만 아마 당시의 사람들은 신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이미지를 더 강하게 가졌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좀 재밌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요.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는 클라리스 스탈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기 좀 거창하다고 생각한다면 '전이’라는 다른 말을 써도 괜찮을 겁니다. 한니발이 다른 사람이 아닌 스탈링에게만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싸이코패스들이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수 있는 이유는 초자아의 검열이 먹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초자아의 검열이 먹히지 않는다는 건 '발기’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조금 재미있는 생각이 나는데요. 한때 어느 청소년들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자기가 사이코패스가 아니냐고 고민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서 그런 착각이 종종 벌어지곤 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자이고 싶진 않죠.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자위행위로 인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정도 임상에서도 관찰이 되기도 했고요.
흔히 알려져 있기로도 싸이코패스들이 발기가 잘 안된다고 하죠. 그래서 섹스에 대해서도 집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범죄 사건들에서도 관찰이 되죠. 그렇다면 자신을 발기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집착을 할 것이고요. 그것이 중대한 법의 위반과 관련이 된다면 거기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을 겁니다. 발기 문제를 제외하고 행동상으로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다른 증상도 있습니다만 여기서 그 구분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게임으로 돌아가 봅시다. 세누아는 딜리온을 사랑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는 죽어가는 자신의 리비도를 다시 뜨게 해준 사람입니다. 그게 어떤 의미가 될까요?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딜리온이 헬라에게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자신에게 유일한 의미였던 딜리온을 포기할 수 없었던 세누아는 헬라를 찾아서 자기 삶의 의미를 되돌려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은폐의 달인인 조직 스토커에게 스토킹을 당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스토커가 없다면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아프고 괴롭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질문에 스토커가 대답이 된다면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토커만 찾아내서 검거하면 자기 문제는 다 해결이 되는 겁니다. 즉,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문제를 일으키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원인을 제거하면 문제가 사라지죠. 그러면 다시 자신의 리비도를 띄울 수가 있고 현실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고 욕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스토커를 잡아내려고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스토킹도 불사합니다. 스토커처럼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관찰하고 의심합니다.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영상으로 촬영하고 그것을 조직 스토킹의 증거라고 들이미는 경우도 그렇죠.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그들의 믿음에 동의하지 않으면 물리력이라도 동원하려 들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 반복하는 굴레에 갇힙니다. 이 게임의 진행 과정도 그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이 망상을 구성하는 내용으로도 여겨질 수 있을테니까요.
기존의 게임은 정신질환을 하나의 핸디캡이나 특성 정도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게임을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묘사가 가장 뛰어난 게임이 바로 이 세누아의 희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게임의 엔딩과 함께 제작 과정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