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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Oct 27. 2024

채식주의자 - (1)

문학에서 그려낸 증상에 대하여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왔습니다. 한 강 작가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대한민국에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강 작가의 작품들도 무척 대단합니다. 그 작품 중에서 채식주의자는 과거 맨부커상도 수상도 했습니다. 제가 과거에도 이 작품을 한번 분석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에 다시 한번 다루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원작을 감독의 눈으로 걸러서 재현한 것이 원작만큼의 섬세함과 감동을 주진 않습니다. 그런데 사건을 바라보는 제3자의 눈으로 기능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영화가 재개봉되기도 했고요. 그렇다는 건 여러분들도 이 채식주의자라는 영화를 보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 어떤 불쾌감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전문적인 견해가 궁금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논문 같은 것을 찾아본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논문도 좀 많이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면 이러한 경우가 우리 보편적인 인식과 좀 동떨어져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문학 분석이라고 해도 임상을 대하듯이 다루게 된다면 그 사람이 공부한 것들의 총정리가 되어서 나오게 됩니다. 임상을 이해하는 그 사람의 방식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잘 보여준 사람은 바로 프로이트  입니다. 프로이트는 쉬운 말로 임상을 설명하고 거기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두고 해석의 기예라는 말도 했었습니다. 


영화 분석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한 가지 염두에 두고 들어갈 내용이 있습니다. 작품을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주인공 영혜는 나중에 정신분열증, 즉 조현병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조현병 상태는 정신병 범죄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 속 주인공 영혜가 보여주는 조현병은 우리 상상과 많이 다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고착점 문제를 반드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진단체계와 관련된 이야기이니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시작해 봅시다.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영화 베이스로 출발해서 세부사항에서는 소설 참고했습니다. 소설이 주는 깊이를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증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제3자의 시선으로 관찰하기에는 소설보다는 영화가 유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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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영혜는 별 탈 없이 살아가던 가정주부였습니다. 어느 날, 영혜는 채식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편이든 가족이든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갈등 상황이 지속되다가 결국은 이혼하게 됩니다. 형부와 부적절한 관계로 이어지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또 음식을 거부하는 특이한 정신분열증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됩니다.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의 전반부는 르네의 일기라는 정신분열증의 임상 사례와 꼭 닮아 있습니다. 물론 연령의 차이는 있죠. 하지만 치료 사례의 전반부를 닮았다는 점은 저에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르네의 일기는 스위스의 정신분석가 A.셰셰이에 박사가 르네라는 여자아이를 치료한 내용입니다. 아마 그 내용을 아시는 분이라면 채식주의자 소설과 대조해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신경증과 정신병에서는 어떤 기능적 차이가 있을까요? 물론 둘 다 현실 기능이 떨어지긴 합니다. 심해질수록 현실과 그 관계가 끊어져 버리죠. 하지만 신경증도 정신병도 각각의 기능적 측면이 있습니다. 신경증은 병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병의 발달을 막기 위한 자가치유적인 행동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일상적인 행동 효율을 떨어뜨려야 합니다. 결국 자아가 괴로운 상황에 처해지지만 그것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죠. 


정신병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정신병에서는 현실을 재구축한다고 합니다. 자아가 이미 현실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실을 바꿔버린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는 현실 좌표의 변경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정신병에서도 고착점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증상의 고착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죠. 


영화 내용을 살펴봅시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아가던 영혜는 어느 날 채식을 시작하게 됩니다. 고기를 혐오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과합니다. 남편 모르게 집안에 있던 모든 고기를 버려버릴 정돕니다. 그리고 가족과의 식사시간에서도 고기를 기피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화를 돋우게 됩니다. 화난 아버지는 영혜를 붙잡고 입에 고기를 쑤셔 넣어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고기를 먹은 영혜는 자기 팔을 자해합니다. 


여기서 임상적인 내용들을 좀 이야기해 봅시다.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자아의 고유 기능 중 하나입니다. 자아가 활동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자아에 손상이 가게 된다면 이 영양섭취 기능에 제한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즉, 밥을 먹는다는 것은 자아기능에서 매우  중요한데 여기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정신병적인 내용들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연의 아픔으로 밥 못 먹는다거나 그런 내용을 이런 상황에 대입하진 말길 바랍니다. 정신병에서 식사를 하기 어려워지는 이유는 망상이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망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아닙니다. 티가 안 나니까 다들 구분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영혜가 채식을 시작하게 된 시점을 생각해 봅시다. 영혜는 꿈을 꿉니다. 그 이후로 채식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영혜가 꾼 꿈은 상당히 모호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꿈의 내용은 영혜의 관심을 끄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꿈 자체는 영혜의 과거 경험을 반영하는 것 같지만 그것 역시 변장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어린아이들의 꿈은 사실 그대로 나올 수는 있지만 성인의 꿈은 사실 그대로 나오는 경우에 훨씬 교묘한 위장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보는 거죠. 



그리고 꿈을 위장하는 그 방식들이 정신병에서 활용되는 기전들을 그대로 활용합니다. 그래서 꿈을 정상 정신병이라는 말로도 부르기도 하죠. 그럼 영혜의 꿈을 들여다보면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기전들을 뜯어본다는 것은 크게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 꿈의 형성 단계를 알고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사람이 죽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숨겨줍니다. 그리고 잠이 깹니다. 다시 꿈을 꿉니다. 


-  꿈속의 꿈입니다. 여기서 꿈속의 꿈이라는 특징에 대해 인지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에서 다시 잠이 들어서 꿈을 꾸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꿈속에서 현실을 꾼다고 말하죠. 그렇다면 영혜는 지금 현실을 꾸는 겁니다. 


영혜는 깨어나서 자신이 죽였는지 아니면 살해당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자신이 죽였다면 누굴 살해했는지. 그 사람이 자신을 죽였을 수도 있을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정체는 '삽'이었습니다. 


영혜는 어린 시절에 개에게 물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삽을 가지고 그 개를 때려죽였습니다. 


            여기서 개를 죽이는 도구로서의 삽과 영혜의 채식은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까요? 다소 억지스러운 연결 작업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꿈에서 활용되는 연상 작업은 언어를 통한 연상 이외에도 체험도 그 연상의 단서로 기능합니다. 우리가 정신분석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활용하는 연상입니다.           


 영혜가 꾼 꿈은 유년 시절에 자기를 물어뜯은 개를 아버지가 처벌하는 꿈입니다. 사람 무는 개의 머리통을 삽으로 쳐서 죽인 겁니다. 잔인하죠. 공격의 도구니까요. 그리고 그 개는 보양식이 됩니다. 어린 영혜는 그 개를 먹었습니다. 


지금 보면 이 장면이 야만적이고 미개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것들이 일상의 하나기도 했었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죠.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친근한 동물의 식용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다른 문학이나 채식주의자라는 작품의 리뷰에서 이 장면을 '트라우마'로 설명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충격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트라우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이라고 할만한 것을 한번 떠올려봅시다. 생각이 안 나거나 생각이 난다고 해도 한 장면의 파편들 정도로 생각이 날 겁니다. 그리고 영혜의 꿈처럼 줄거리로 생각이 나진 않습니다. 한 장면, 하나의 파편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꿈을 꾸고 나서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요? 영혜는 남편과의 성관계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기 냄새를 혐오하게 됩니다. 꿈을 꾸기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대체 왜 이런 행동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이 원인 자체를 영혜의 과거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왜냐면 영혜의 어린 시절 강아지를 죽여서 먹었던 사건이 이미 정신에서 영향력이 있었다면 동물에 대한 어떤 감정적 반응들이 분명히 관찰이 되었을 겁니다. 강한 사랑 뒤에 강한 미움이 숨어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런 단서가 없습니다. 


프로이트는 꿈을 두고 억압된 소망의 왜곡된 성취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꿈 자체는 폭력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영혜의 소망을 반영합니다. 그렇다면 꿈은 개를 먹는 것을 '원한다'는 현실적인 요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혜의 행동은 그와 다릅니다.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영혜의 행동에 꿈과는 다른 반동이 형성이 되어 등장한 것일까요? 거기서부터는 작가의 의도를 따라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꿈으로 인해서 발병했다는 사례는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신분열증 임상인 르네의 발병과 비교해 봅시다. 르네는 어린 시절부터 비현실 감정이라는 것에 시달렸고 그것은 청소년기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5세가 되던 해에 폐결핵으로 1년 정도 요양을 해야 했는데 그 기간에 정신적 증상이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그럼 르네의 5살 때 휴양을 위해 가족과 시골에 놀라갔습니다. 그곳의 학교에서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학교에서 독일 노래를 듣고 그때 비현실 감정을 느낍니다. 르네는 당시의 비현실 감정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학교가 군대 병영처럼 커져 버렸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학교를 알아보지 못했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 모두가 나에게는
노래 부르기를 강요당한 죄수들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학교와 아이들의 노래가
 세상의 나머지 것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듯했습니다.


다섯 살 시기에 이런 것을 느꼈다면 그것을 비정상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정신분석에서는 이렇게 등장한 것 역시 정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면 아직 어린아이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가르는 벽이 얇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즉 이차 성징이 다가오면서 서서히 두터워지는 것이죠. 


 그럼 르네가 발병하기 전까지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요?  르네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많은 비현실 감정을 느꼈었습니다. 그러다가 15살에 폐결핵에 걸립니다. 그때도 가끔 흥분하는 정도였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로부터 인기도 좋았죠. 문제는 폐결핵이 완치된 시점입니다. 정신적으로는 더 나쁜 상태가 되어서 적응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차성징이 시작되었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논리 체계에서 성인의 논리체계로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차 성징이라고 하면 10세 전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도 이차성징의 징후를 일찍 잡을 때는 10살 정도로 잡았었습니다. 하지만 영양 상태나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예전에는 조금 더 늦은 나이에 등장했었죠. 이러한 변화들은 모두 다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영화로 돌아가 봅시다. 영혜는 성인입니다. 영혜의 꿈은 르네의 발병과 비교해 보았을 때, 정신병적 비현실 감정 과정을 단축시키는 압축 작용을 해줍니다. 흥미롭게도 정신에서 이러한 압축 작용이 일어나는 것에는 히스테리 기제가 활용이 됩니다. 그리고 히스테리는 궁극적으로 정신분열증, 즉, 조현병을 방어하기 위해서 등장한 겁니다. 영혜의 꿈과 르네의 발병과정을 함께 검토해 보면 조금은 유의미한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꿈을 통해 분열증에 저항하고 있는 영혜라는 말입니다. 꿈을 통해 발병한 것 같지만 병이 삶을 정복하기 전에 등장하는 자가치유 행위인 것이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경증 역시도 자가치유 행위의 과잉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제가 임상에서 직접 쓰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영혜가 꿈을 꾼 이후에 고기를 버린 행동은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할까요?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설명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만한 여지는 있습니다. 정신병이 발병하면서 정신적 퇴행이 일어났다고 하면 과거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설명이 충분히 가능해집니다. 왜냐면 어린아이들에게 어른의 성적 유혹 자체는 트라우마급의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설명이 타당해지기 위해서는 이후의 장면들에서 비슷한 상황에서의 거부반응들이 나타나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후 장면에서 그런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것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은 어떨까요? 그런데 프로이트는 여성에게는 성적 장벽이 높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성적 행위보다 성적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사랑을 나누는 것에 거리낌이 없지만 사랑을 속삭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연인을 떠올리실 수 있다면 이해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관계가 끝나서 발생하는 성 분비물은 단백질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단백질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은 성관계라는 것과 연상이 맞닿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성적 흥분 요소들이 차단이 되어버리게 된다면. 고기를 곁에 둘 수가 없는 겁니다. 단백질의 연상이 성관계와 이어지면서 동시에 일반 관념에서의 '더럽다'로 연결이 되고 그것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영혜의 반응들이 성립되는 지점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너무 과도한 해석이라는 생각을 하실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 분석 임상에서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예시를 든다면 진달래꽃이라는 시가 꿈에 나왔다면 그 꿈을 분석하면서 시가 쓰였을 당시의 시대상까지 들어가기도 합니다. 꿈에 등장하는 압축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고효율의 압축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경증과 정신병의 발병 과정에 대해서 조금 생각을 해봅시다. 신경증은 촉발 사건 이후로 본격적인 발병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기준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시로 교통사고 같은 것도 촉발 사건이 되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 외의 어떤 충격적인 사건들로 인해서 발병할 수 있고 일상생활의 작은 충격에서도 발병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경증 발병은 의학적으로는 규명이 되진 않았습니다. 신경증이 과학의 영역에 있지 않기 때문에 발병 역시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진정과 치료에 있어서도 비과학적인 방식들을 찾거나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증상이 과학적이지 않은데 의학의 과학적 치료가 효율이 높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경증에 정신분석이 효과적인 이유는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과학의 설명 방식을 빌린 수사학에 좀 더 가깝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정신병의 발병은 어떨까요? 신경증과는 조금 다릅니다. 정신병은 일상생활에 은근히 스며들어서 서서히 발생하게 됩니다. 구체적인 예시를 든다면 이명박 정부 때 집 주소가 지번 주소에서 도로명 주소로 변경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정신병은 이러한 집 주소의 변경으로 인해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질서의 변화가 이러한 정신병 촉발에 영향을 줍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한없이 로맨틱했던 연인이 결혼하고 집착증 환자로 돌변하는 겁니다. 연애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 애인이라면서 하트 뿅뿅한 눈을 하고 있다가 결혼하고 나서 나가서 바람피우고 올려고 한다는 의심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자기 아내를 괴롭히는 그런 경우죠. 폭력적이진 않아도 자기 망상을 들이밀고 불필요한 수준으로 집착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편집증적 내용들이 종종 관찰이 됩니다. 이러한 특징을 훌륭하게 설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융의 스승인 블로일러가 이런 말을 합니다. 


편집증자는 자신이 편집증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 것이다


블로일러는 편집증과 정신분열증을 구분하기 위해 수많은 환자들을 비교 연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에서 나온 말은 무척 가치로운 이야기입니다. 이 말 자체는 정신병의 스며듦 자체가 얼마나 은밀하게 이루어지는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그래서 정신병이 발병해도 그냥 그대로 살아가도 문제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자기 망상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편집증 환자 슈레버는 그것을 법적으로 증명해서 병원에 강제로 입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적 승인까지 받아냈습니다.



영화 장면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영혜의 고기 거부는 가족 모임에서 문제가 됩니다. 육식을 거부하는 모습을 아버지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영혜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입니다. 그리고 이때 영혜는 스스로를 자해합니다. 그 모습에 가족들은 모두 놀랍니다. 영혜가 스스로를 자해한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겁니다. 자해 치료의 난해함을 알거나 경험해 본 사람은 영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을 수 있을 겁니다. 


영혜는 단백질을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더러운 것이니까요. 그런 더러운 것이 다가왔을 때 그것들은 거부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억지로 먹인 고기는 신체에 강제로 주입된 리비도가 됩니다. 그 시점에서 각각의 증상에 따라 반응하는 방식들이 달라집니다. 


 영혜의 몸에 강제로 고기가 들어온 것은 더러운 것이 들어온 겁니다. 그렇게 강제로 리비도가 주입이 되었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워져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토해버릴 겁니다. 그런데 영혜는 토하지 않습니다. 단백질이라는 영양소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리비도라는 이미지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지워져야 합니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서 자기 처벌이라는 방식을 가져와야 합니다. 분열증에서는 리비도는 내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해의 리비도는 외향성을 띠고 있습니다. 신경증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신병에서는 그 리비도가 내부를 향해있습니다. 여기서의 외향-내향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뜻과 달라서 혼동이 되실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렇게 말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흔히 알려진 내향이라는 말은 융이 사회심리학에서 의기소침과 동의어로 사용했던 말로, 프로이트는 논문에서 말을 함부로 썼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히트를 했죠. 그런데 이러한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향이라는 말의 근본적인 특징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영혜의 증상을 설명하는 데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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