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진우 Nov 03. 2024

채식주의자 (2)

증상의 고착점, 성충동과 승화


지난 글에서 자해문제를 언급했었습니다. 정신질환 중에서 자해와 관련된 임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물론 자해할때 나타나는 방어기제들을 고려해본다면 모든 신경증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큼직한 구분을 해봅시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경우에 자해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분석한 케이스에서도 강박신경증의 영향으로 인해서 자해를 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이때는 공격성 문제를 자기자신에게 되돌리기 때문에 자해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공격성의 선회는 방어기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 정신분석 한다는 사람들도 이것을 방어기제로 설명하는 경우가 좀 드뭅니다. 따라서 자해행위가 있다고 해도 설명이 제대로 안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멜랑콜리에서는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이 떠안습니다. 자학적이기도 하죠. 멜랑콜리의 경우 자해 뿐 아니라 자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신의학에서도 자살 가능성이 높은 우울증으로 멜랑콜리형 우울증을 이야기합니다. 멜랑콜리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단순한 우울 정도로 생각이 될겁니다. 실제 멜랑콜리를 우울증으로 보고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때의 멜랑콜리는 조울증에서 '울증'입니다.


 이 울증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흔히 우울증으로 불리는 것들 중에서는 신체적 요소가 관여되는 침울이 상당히 많은 경우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등장한 침울을 정신적 문제로 판단하고 약물로만 다루려 고 한다면 치료효율은 매우 떨어지게 되죠. 


 그렇다면 조울증에서 등장하는 이 우울은 프로이트의 설명을 따른다면 컴플렉스를 극복하게 되면 조증으로 뜨고 컴플렉스에 압도당하게 된다면 울증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컴플렉스라는 것은 우리 정신에서 형성되어 있는 복합체라고 설명을 하는게 좋겠네요. 컴플렉스라는 말을 좀 더 잘 설명해주는 이미지가 정신적으로 뭔가가 형성이 된 것이라기 보다는 군대와 산업이 합쳐진 군산복합체를 컴플렉스의 이미지로 잡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생각해보면 멜랑콜리 환자들이 우울에 압도당한 상태라면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안전에는 별 다른 문제가 없는겁니다. 문제는 조증 상태가 왔을 땝니다. 이 시기는 사람이 괜찮아보입니다. 기분도 좋아보이고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살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반정신의학 운동 기관 같은 곳에서는 이런 임상적 내용들을 검토해서 차라리 우울함에 빠져있으면 마음을 좀 놓고 있는데 그 사람이 기분이 괜찮아지기 시작하면 평소보다 훨씬 긴장을 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임상을 대하는 방식이랑은 좀 차이가 있습니다. 


분열에서는 리비도 자체가 내향화됩니다. 자기 내면에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죠. 조금 더 정신분석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신경증은 자아와 초자아간의 갈등에서 부터 시작되지만 정신병은 자아와 현실과의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이 말을 다르게 보면 신경증은 대상 리비도 처리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다고 볼 수 있는데 정신병은 자아 리비도 처리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리비도가 외향화 되어 있는 신경증에서는 일반 논리를 통해서 설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리비도가 내향화 되어 있다면 그 처리 위치가 엉뚱하기 때문에 일반 논리로 설득이 되지 않는 것이죠. 거기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망상이고요. 


영화로 돌아가 봅시다. 남편은 영혜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겁니다. 이혼을 하는 겁니다. 이 사건은 전체적으로 큰 사건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다룰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이혼을 통해서 영혜에게 부여된 상징적인 질서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글에서 정신병은 상징적 질서와 관계가 된다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실제 정신병의 발병 사례도 함께 이야기를 했었죠. 그리고 남편을 두고 비난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유튜브나 여러 매체를 통해 그런 비난들을 접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그것을 계속적으로 케어하고 지내는 것도 좀 힘듭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혼한 뒤 영혜는 언니의 집에 얹혀서 살게 됩니다. 이때 언니의 남편, 즉 형부가 처제를 보면서 야한 상상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케치합니다. 물론 이런 내용이 상식적이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작업을 하는 직업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것은 영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그런 예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를 추종했던 예술가로 살바도르 달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달리는 꿈을 꾸고 그것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의 기행 중 하나는 그림 작업을 하기 위해서 모델들을 벌거벗겨 놓고 회초리로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렸습니다. 그리고 살짝 감각이 온다 싶으면 곧장 잠을 자러갔었습니다. 그래도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은 달리가 발기부전이라서 그랬겠죠? 예술가는 발기부전이 되어야 혼이 담긴 예술을 할 수 있다고 까지 말했던 사람이니까요. 이렇게 뜨는 리비도의 압력은 정말 굉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승화하여 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대중 앞에 선보이는 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형부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형부는 예술적 영감을 얻을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오스카 와일드는 미학이 윤리보다 앞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름다움의 유혹은 충동 작용을 이끌어낼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부는 영혜에게 모델을 부탁합니다. 옆에서 보면 그저 처제의 몸을 탐하고 싶어서 세운 계획 정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형부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겁니다. 거기에 리비도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여자 몸을 탐하고 싶어서 그렇다고 오해도 생깁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긴합니다. 연인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마치 섹스만 탐닉하고 싶어하는 그런 것으로 오해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이 이야기에 동감이 가기도 할겁니다. 


영혜는 형부의 모델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영혜의 나체에 꽃이 그려집니다. 영혜는 만족스러워합니다. 남자 파트너와 촬영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파트너와 서로 몸에 꽃 그림을 그린 채로 남녀가 성관계 하는 듯한 연출을 시도하게 됩니다. 모델을 하던 후배 작가는 그런 작업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문제가 생깁니다. 영혜에게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성적 반응이 나타난 겁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성적으로 자극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형부는 참지 못하고 영혜에게 달려들게 됩니다. 그런데 영혜는 거부합니다. 자기에게는 꽃이 있는데 형부에게는 꽃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잠이 이 작품을 끊고 다른 작품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라이벌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을 아실겁니다.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죠. 이 작품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자 주인공 나오코는 연인의 죽음 이후에 성적으로 흥분을 하지 못하는 몸이 됩니다. 그런데 연인의 친구였던 와타나베에 의해 딱 한번만 성적 흥분을 느낍니다. 그 이후에 성적 흥분을 도무지 느낄 수 없었고 자살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오코 역시 채식주의자의 영혜처럼 성적 흥분을 느낄 수 없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삶에서 즐거움이 없어졌다고 봐도 될 겁니다. 생명력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은거죠. 쾌감은 인간에게 그 정도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꽃이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개를 죽이는 아버지의 꿈을 꾼 이후로 성적인 것에 대해서 모든 관심을 철회했던 영혜가 왜 꽃 그림으로 흥분하게 된 걸까요? 여기서 정신병에 대한 중요한 가설을 세워보아야합니다. 정신병 발병을 위한 최소조건은 이차성징이 지나서 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리비도 퇴행이 일어나야합니다. 이때 퇴행지점은 각각의 발달단계에서의 고착점으로 퇴행을 합니다. 따라서 영혜의 리비도가 어느 고착점으로 퇴행하게 된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정신분석은 정신병의 고착점을 구강기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독자 여러분들 중에서 구강기 고착을 배울 때 '중독'의 고착점으로 배운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정신분석이 그렇게 곡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내용은 임상에서는 활용할 수 없는 내용이죠. 정신분석이 비 실용적이라는 누명도 거기에 있습니다. 


구강기 고착을 이야기했으니 조금 더 세분화해서 살펴봅시다.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정신병. 정신분열증(조현병)과 편집증은 각각 구강기 초기와 후기(이유기)로 그 그분이 나뉩니다. 이런 내용들은 프로이트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분석을 가르친 사람들에게서는 들어볼 수 없는 내용일겁니다. 


이 두 고착점의 특징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로 '언어'와 관련이 깊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치아가 발달하면서 언어의 분절이 가능해지고 발음을 할 수 있으며 영양섭취 역시도 훨씬 능동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지능이나 신체 능력의 저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 영혜가 이혼을 경험하면서 편집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면 꽃 그림에 흥분할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의심에 가득차서 공격성을 내비쳤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러한 고착점에 대한 내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영혜의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작품으로 되돌아가봅시다. 형부는 운전하면서 억울하다는 듯이 웁니다. 질질 짜는 거죠. 섹스에 실패한 것 때문일까요? 왠만해서는 짜증을 낼 겁니다. 그런데 억울하다는 듯이 울고 있는 것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단순히 섹스라고 한다면 짜증내고 말아버려도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 인간의 정신장치는 쾌락원리에 의해서 작동합니다. 쾌락원리라는 것을 성적 만족으로 생각하는 실수는 하지 않길 바랍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은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긴장이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긴장이 높은 상태를 지양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럼 형부는 현재 상당한 긴장에 시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긴장이 계속 유지가 된다면 어떨까요? 몸 전체나 혹은 부분적으로 통증이 발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때 발생하는 통증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게다가 통증의 발생 자체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즉, 의사를 만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형부는 결국 몸에 꽃을 그리게 됩니다. 영혜로 부터 발생한 성충동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형부도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의 긴장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당해야할 책임들이 발생하겠지만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을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관계를 가지는데 그것이 강간이 아닙니다. 작품 속의 형부를 비난하는 우리는 모두 윤리적인 관점으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먼저 선행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 될 겁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요.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예술계에서 인정하는 신경증적인 내용들 에 대한 형부의 욕심일 수도 있을 겁니다. 병이 승화되는 그런 내용들에 대해서 예술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될겁니다. 


-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바닐라 스카이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