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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Nov 10. 2024

채식주의자 (3)

퇴행과 망상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저번에 썼던 내용을 약간 보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번 글에서는 구강기 고착이 중독의 고착점이 아니라 정신병의 고착점이라는 점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여기서 고착점에 대한 오해를 약간 수정합시다. 


우리는 고착에 결핍의 이미지를 덧붙여 놓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뭘 잘 못 먹어서 구강기 고착이 생겨서 커서 뭔가를 끊임없이 먹는다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구강기 고착이 그렇게 생기는 걸까요? 이 부분이 반대로 알려져 있는데 고착은 오히려 그 시기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성적 발달단계에 따라서 정신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때 퇴행이 발생한다고 치면 이전의 만족스러웠던 단계로 퇴행하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퇴행의 메커니즘을 군대가 부대를 보내는 것으로 비유했었습니다. 본진에서 부대가 떨어져 나와서 새로운 진지를 구축해야 하는데, 진지 구축에 실패하면 아군들의 힘이 강한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준비를 하는 것에 비유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거의 반대로 알려져 있죠. 심리성적 발달단계에 대한 무지를 상상력으로 메꾸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품을 보신 분들은 제가 그동안 조현병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분열이라는 말을 쓰는 것에 의아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설명을 좀 드리자면. 정신의학에서 위대한 두 의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크레펠린과 블로이어를 이야기할 겁니다. 둘은 각가 조발성 치매와 정신분열증을 구분해낸 의사들입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크레펠린의 조발성 치매라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편집증이라는 말이 더 좋다고 했고 정신분열 역시도 이상 정신이라는 더 괜찮은 번역어를 제시하지만 정신분열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차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dsm이 등장하면서 이런 진단명의 용법들이 모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dsm-3가 되면서 편집증과 정신분열은 한 덩어리가 되어 묶이기 시작했습니다. 진단항목중에 '편집정신분열증'이라는 형태로 정신증 항목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치료에 저항적이라서 예후가 좋지 않은 '정신분열증'의 의미입니다. 정신증으로 진단이 되면 스키조 이야기가 바로 나와도 되는 수준이 된 겁니다. 그리고 이후에 증상이 조금 심각하면 정신증 진단을 해버리게 되는 그런 문제점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용법의 차이 때문에 제가 굳이 '조현병'이라는 말의 사용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조현병이라는 말 보다 지난 언어가 훨씬 증상을 설명하는데 유리합니다. 근본적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영혜가 형부와 관계를 맺던. 그 장면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관계를 가지기 위해 형부는 몸에 꽃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긴장을 낮추려고 했습니다. 꽃이 있으니 성관계에 성공하게 됩니다. 우리는 불륜이라는 측면에서 이것을 생각합니다. 문제는 영혜의 거부가 없다는 겁니다. 형부를 좋아하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았던 걸까요? 이점은 우리가 잘 보아야 하는데, 영혜는 상황에 대해 해석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몸을 맡깁니다. 구강기를 고착점으로 삼게 되는 두 가지 정신병, 분열증과 편집증의 차이를 생각할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편집증에서는 '해석망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대해서 해석을 하고 그 의도를 짐작하는 그런 언어적 작용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분열에서는 그 해석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어떤 저항도 보이질 않습니다.


영혜와 형부의 성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것은 음란물에서 묘사하는 것과는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그 관계 자체는 식물이 수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으로 따지면 정자가 난자에 수정되는 것과 같은 작용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 결과로 그녀의 정신은 어딘가에 착상되어야 합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꽤 오래전부터 알려진 여신의 이름입니다. 수분 과정을 거쳐 다시 어린잎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땅에 심어져야 합니다. 즉, 구강기 초기로 퇴행해서 다시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거소가 같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영혜에게 '형부'라는 전체 대상이 없는 겁니다. 남근은 지닌 남자가 없습니다. 꽃을 그려놓은 부분 대상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부모의 전체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정신분석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 언어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아도 출현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인식하는 대상은 엄마의 젖꼭지 정돕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부분 대상으로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오토 랑크가 주장했던 '탄생 불안' 그리고 '출생외상'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불안은 자아가 형성된 이후에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로 다시 돌아갑시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적발이 됩니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하게 됩니다. 영혜의 신체에 그려진 꽃은 모두 지워집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합니다. 이제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나무가 되고자 하죠. 몸에 그려진 꽃이 사라지자 현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망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망상이란 자아의 선택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정신병자는 자신의 망상을 자기 몸처럼 사랑합니다. 따라서 영혜의 망상이 자리 잡힌 순간 일반 논리가 도저히 통용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됩니다. 


 구강기 초기로 퇴행할 때, 몸의 에너지만 상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언어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실례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던 르네는 이미지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초록빛이 가득한 공간에서만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혜는 광합성을 하고자 합니다. 영혜와 르네, 각각 식물과 초록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공통적인 내용입니다. 


여기서 잠깐 다른 생각을 해봅시다. 형부의 작업이 성관계가 아니라 사회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어땠을까요? 꽃 그림으로부터 출발해서 성적이지 않은 활동으로 승화가 되었다면? 그리고 영혜의 몸에 그려진 꽃이 계속 유지되었다면? 그것이 어쩌면 현실과 단절되지 않는 길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영혜는 폐쇄병동에 입원을 합니다. 물론 가정에서 케어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전문가에게 맡겨야 합니다. 여기서 의사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요? 약 처방 위주로 접근한다면 도움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약을 먹는 것도 거부할 테니까요. 


정신병에 정신분석이 잘 안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초기 이론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내용으로 정신병에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경우가 많죠. 이 내용의 핵심은 '전이' 문제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경증에서도 전이가 잘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관계되는 정신 기관이 나르시시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도 나중에는 편집증자의 꿈을 분석하면서 전이의 단서를 찾아냅니다. 저 역시도 편집증자의 분석을 맡았을 때, 꿈 분석을 통해서 전이의 단서들이 등장했었습니다. 편집증자의 꿈에 제가 직접 등장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이의 단서는 분석이 가능한 지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정신분석은 이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증명이 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영혜의 채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채식이 궁극적으로 폭력성에 대한 자신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작가의 인터뷰나 작품을 본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거기에 모아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영혜의 채식은 궁극적으로 현실과의 경계를 세우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실과 연결되기 위해서 채식을 하는 겁니다. 즉, 채식은 궁극적으로 폭력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병에서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겁니다. 채식을 통해서 자신과 현실의 경계를 긋는 겁니다. 


모든 신경증이 가장 심각해질 때가 언제일까요? 폭력행위를 할 때일까요? 아니면 자해를 할 때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성적으로 난잡한 행동을 할 때 신경증이 심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심각한 신경증은 얌전하게 생활을 하더라도 현실과 관계가 끊어져있을 때가 돌이키기 어려울 때입니다. 


셰셰이에 박사는 현실과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던 르네를 어떻게 치료했을까요? 박사는 흔히 생각하는 아버지-분석가 이미지를 지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분석가가 되어 르네의 초기 발달단계를 그대로 거치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남편까지 동원하여 르네에게 오이디푸스 단계도 거치게 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하면 엄마 아빠에게 가지게 되는 사랑의 감정 위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만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한다면 오이디푸스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가 대리언 리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세 가지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1. 의미를 새로 세운다

2. 신체 리비도가 활동할 영역을 정한다.

3. 거리를 만들어 아이가 엄마의 유일한 대상이 되지 않도록 엄마에게서 떼어낸다. 


이 세 가지 기본적 기능을 통해서 타자와 관계 맺기가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 과정은 결국 정신분열증자와 현실의 경계를 세워주는 겁니다. 따라서 내향화된 리비도를 외향화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결국은 '질서'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가봅시다. 영혜는 결국 생명이 위험한 상황으로 진행이 됩니다.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현실의 경계도 무너져 있습니다. 강제로 연명할 수는 있습니다. 정말 식물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 흥미로운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식물 증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식물 증상이란 정신적 원인으로 일어난 히스테리 증상이 발달하면서 실제 신체 손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류머티즘과 같은 질환에 히스테리의 의미를 부여하진 않습니다만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에서 히스테리 증상으로서의 류머티즘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과거에 대화를 잠시 나누었던 신경증자는 부분에서 시작된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히스테리 증상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 문제로 인해서 움직임 자체가 어렵기도 했습니다. 


영혜의 정신분열증은 정신에서 출발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과도한 해석일 수 있지만 식물인간이 된다는 것은 영혜의 병리적인 소원성취가 되지 않을까요? 병으로 인해서 실제 신체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품에서 영혜는 현실과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렸습니다. 현실에서 자기 환상을 구현한 겁니다. 일반에서는 환상을 즐기고 현실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신병에서는 환상을 즐기고 다시 환상으로 그것을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의 구분 이전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제대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병원에 실려간 영혜의 나머지 삶은 어떨까요? 현실과의 경계가 무너진 채 이미지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하고 무서운 세계입니다. 조금 어려운 개념이지만 자기 지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체에게 스스로 지각되는 겁니다. 이 지각은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다가와서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합니다. 르네의 비현실 감정이라는 것이 이러한 지각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르네가 이야기한 자기 지각의 내용을 잠시 이야기해 봅시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르네에게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 보이면서 친절하게 웃어줍니다. 그런데 르네에게는 그 가지런한 치아만 보이는데,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가지런한 치아가 교실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겁니다. 그런 경험을 한다면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겁니다. 


그렇게 자기 지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영혜의 삶이 어떨지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그 시점에서 영혜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만약 훌륭한 의사가 영혜를 치료한다고 해봅시다. 그래서 영혜에게서 전이를 이끌어내고 언어를 이끌어낸 후에 영혜의 물활론적 사고를 받아주고 현실과 경계를 다시 지어주는 작업을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의사가 지니고 있다면 회복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기대를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 묘사된 정신분열증은 현실의 분열증과 비교했을 때, 선녀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요? 만약 여러분이 르네의 일기라는 작품을 읽어볼 기회가 된다면 르네의 정신분열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한번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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