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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Sep 28. 2016

네덜란드의
별이 빛나는 밤에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 엽서를 써주는 사람

 2011년 겨울, 런던에서 지내고 있던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 유학 중인 네덜란드에 방문한 적이 있다. 학창 시절 우리는 분명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확실히 애늙은이었다. 그녀와 나는 어떤 결핍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슷한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지 우리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꾸준했다. 그 녀석은 심지어 시를 썼고, 나 역시 영화를 사랑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 녀석은 야망가였고, 공부를 잘했고, 리더십이 있었지만 나는 정 반대였다. 비슷하지만 아주 달랐던 우리는 점심 급식을 먹고 나서 매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운동장을 산책하곤 했다. 현재와 미래, 그리고 다소 거창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점심시간은 금방 끝났고, 우리는 각자의 반으로 흩어졌다.  



/



 저가 항공을 타고 아인트호벤으로 비행을 했다. 공항에 내 친구와 당시 그녀의 남자 친구, 그리고 그의 그의 아버지가 나를 마중 나오셨다. 몇 년 만의 재회였던가.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한국말로 떠들어대며, 중간중간 "Sorry for speaking Korean."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더치 부자는 몇 년 만에 만났으니 할 말이 얼마나 많겠냐며 마음껏 대화를 나누라고 했다. 나는 그의 본가에서 아주 아늑하게 이틀을 묵었다. 그들은 과연 대가족이었는데, 친구는 이미 그곳에서 새로운 가족을 꾸리고 있는 듯했다. 타지에 이렇게 아늑한 보금자리가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친구의 남자 친구는 낯을 가리는지 나에게는 조금 무뚝뚝했지만 내 친구에게는 지극 정성이었다. 더욱이 다행이었다. 사랑받고 있었으니, 눈빛마저 달라져 있었으니. 우리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던 서울에서는 예민하고 고민 많던 소녀가 그곳에선 너무나도 평온한 여인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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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틀 후 우리는 그 본가에서 떠나 친구가 살고 있는 도시로 이동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한국말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당시의 나는 아주 아주 외로웠고, 아직까지도 내 삶의 모토가 되고 있는 어떤 한 가지 진리를 새삼 확인하던 시기를 관통하는 중이었다. 그건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너무나도 참인 사실이었다. 당시의 나는 지긋지긋하게 평행선을 긋고 있던 어떤 사랑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 일상을 나누며 어려움마저 극복하며 살아가는, 눈빛마저 달라져버린 내 친구의 일상을 목격하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현재를 살아야겠구나, 내 옆에 있어주지 못할 사랑에 고통받느니 차라리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낫겠구나…. 이 좋은 걸 보고 먹고 누리는 중에도 부재한 사람이 생각나 슬픈 삶이라니, 그 사람이 옆에 없다니. 당시의 내게 그것은 정말이지 까무러치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었다. 



 그녀와 나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산책했다. 발에 하얀 털부츠를 신은 듯한 귀여운 닭과 자유롭게 방목된 소와 말도 보았다. 개울도 건넜다. 개울가에는 비로소 내가 유럽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아름다운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린 초겨울의 평화롭고 드넓은 초원을 걸으며 쉼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내 인생이라는 가방 하나 짊어지는 것도 버거운데 가족, 사회, 편견 등의 온갖 다른 짐까지 바리바리 싸매려니 도저히 무거워 걸음을 내딛을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내 인생 하나 달랑 매고 씩씩하게 걸어나갈 수 있으니 참 좋다고 했다. 제 스스로 인격과 생활의 수준을 꾸준히 성숙하게 만들고 있는 그녀에게도 물론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내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삶은 사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고민과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역시나 구멍 하나쯤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란 없구나. 



 그녀는 애인과 그의 친구들 두 명과 함께 집을 나눠 쓰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남자 3명이 드글대는 집에서 홍일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외국인과도 연애를 해보고,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언젠가는 남자들과 함께 집을 나눠 쓰고 싶다.'라는 소망을 품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을 보니 그 모든 소망이 현실이 된 현재를 살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소망을 이루는 것, 어찌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어느 날 밤, 네덜란드 남성 동무들과 한국인 여자 둘은 함께 차를 몰고 아주 먼 초원으로 별을 보러 나갔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은 시작도 하지 않았음에도 엄청 추운 날이었다. 우리는 바지를 세 개씩 껴입고 목도리도 두 개씩 두르고 나와서는 한참이나 차를 몰았다. 너른 벌판의 언덕 위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충격적이었다. 배낭여행 다니며 별쯤이야 참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 날의 하늘은 과연 어마어마했다. 은하수가 하늘에 쏟아져 흘러내리고 있었고, 너무나도 선명한 북두칠성 국자가 하늘에 떡하니 걸려있었다. 심지어 하늘이 너무 맑아서 집중해서 찾으려 하지 않아도 별똥별은 자꾸만 떨어져 내렸다. 우리는 추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누워 별을 바라보았고, 친구와 나는 그 시간이 너무나 황홀해서 "사실 지금 죽어도 별로 아쉽지 않을 것 같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내뱉었다. 그때의 그 말은 여전히 진심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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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토록 황홀하고도 어쩌면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네덜란드에서의 며칠을 보낸 뒤 다시 런던에 돌아왔다. 당시 유행의 끝물이던 싸이월드 아이디를 지웠다. 더 이상은 은유로 가득해 암호를 해독하는 것 같던 글로 소통하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전화를 했다. 그리고, 길은 극적으로 갈렸다. 오래도록 사랑해왔던 남자는 갑자기 없어진 미니홈피에 마음이 상해 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엽서를 보내면 카드로 답장을 써주던 어떤 남자는 그 뒤로부터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내 옆에서 매일 같이 엽서를 써주었다. 그때 네덜란드에 가지 않았다면, 가장 중요한 건 사랑하는 사람과 바로 옆에서 일상을 나누는 일이란 걸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암호를 해독하느라 바쁜 중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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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다시 런던이고, 우습게도 다시 또 한 번 내 곁에 머물 수 없는 어떤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보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우리에게는 어떤 미래가 있으려나, 지금 이 사람은 내 전화를 받지 않을 사람일까, 앞으로도 엽서를 써줄 사람일까. 네덜란드에 한 번 더 다녀오면 알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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