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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아래 바람한줌 Oct 02. 2020

인연

혼자 일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분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여주시(군) 이포리라는 마을에서 살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였습니다. 학교 수업시간 중에 하나인 CA활동에 문예창작부에 들어갔는데, 그때 당시 교장 선생님이 시조 시인이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직접 문예창작부 수업을 진행하셨을 정도로 문학에 대해 애착이 많으셨던 분이었습니다. 교장으로 취임되신 해 5월에 서울 경복궁에서 중앙시조 백일장 대회가 열렸었는데, 저희 학교에서 원하는 사람을 선출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문예 창작부에 들어가게 된 이유가 관심이 아닌 마음에 드는 활동수업이 없어서였기 때문에 딱히 글 쓰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저는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에게 이끌려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일요일이었고 그때만 해도 교통편이 불편한 데다 서울까지 오려면 족히 2~3시간이 걸렸기에 새벽부터 일어나 학생 열댓 명이 모여 선생님들을 따라 경복궁에 갔던 것 같습니다.
그날의 주제가 열매였는데 시조라는 게 형식과 규칙에 맞춰서 써야 하는 까다로운 글이라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감시간에 이르러 간신히 한편을 쓰고 제출했습니다. 어디서나 그렇듯 기대주는 따로 있잖아요? 제가 다닌 학교는 규모가 작아져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있었는데 고등학교 앞에 있던 매점 아주머니 딸이 속히 말하는 팔방미인이어서 선생님들 모두 이 선배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발표시간이 다가오고 동상부터 대상까지 우리가 찾는 이름이 불려지진 않았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 그 언니의 이름이 불려지길 기대했으나 아쉬운 마음으로 짐을 챙겨 궁 밖을 나가고 있는데, 저의 이름이 불려졌습니다. 그런데 전국의 학생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어디 같은 이름이 한 둘일까요? 선생님들을 비롯해 저까지 모두 저의 이름이 불릴 때 같은 이름이네~라며 가던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학교 이름과 함께 저의 이름이 불려지는 게 아니겠어요? 모두 놀라 부랴부랴 시상에 참여했고, 그 날 이후 저는 교장선생님의 시조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주신문에도 크게 실리고, 중앙일보에도 이름이 나왔으니 많이 뿌듯하셨나 봅니다.
저의 아버지는 중국분이셨고, 중 1 때 돌아가신 어머니는 한국분이셨는데 공부를 못하지 않았던 저는 종종 장학금 대상자에 선정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 중국인으로 되어있는 터라(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국적만 중국인이었습니다) 당시 나라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군에서 장학금이 내려왔으나 받지를 못하니 교장선생님이 저에 대해
많이 안타까우셨나 봅니다. 또 시골 작은 마을에서 저의 가정형편이 어떤지는 금방 알 수 있으셨을 테니 더 그러셨겠지요. 어쨌든 이 일을 계기로 교장선생님께서 저에게 특별히 개인 장학사를 소개해 주셨고, 그분이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저의 은사님이십니다. 당시에 한국로터리 클럽의 회장을 역임하시고 여러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셨는데, 저에게는 꾸준한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연락을 주셔서 그랬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은사님과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이제는 가족분들도 알게 될 정도의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삶은 참 순탄치 않았던 터라 고등학교 1학년 때 집안의 경제적인 부분으로 인해 혼자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와 야간학교를 다니며 생활 한지 3개월 만에 아버지마저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셔서 세상 외톨이가 되었고, 결국 은사님께도 연락을 드리지 못하고 끊기게 되었습니다. 일을 하고 있던 터라 경제적인 문제는 점점 해결이 되었지만, 폐결핵에 걸려서 1년을 넘게 병원신세를 져야 했고, 아마도 외로웠던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이란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당시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배우자 명의로 만들어 저 몰래 쓴 카드와 대출, 그리고 보증들로 인해 결혼 몇 년 만에 몇억이라는 빚을 지게 된 저는 결국 이혼을 요구했고, 맨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안정세가 갖춰진 30대 초반쯤, 은사님의 회사와 거처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전화로 수소문을 했습니다. 여주시에서는 유명하신 분이라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고, 마침 은사님께서도 서울에 자주 오가시던 터라 금방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은사님도 시골마을 9형제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혼자 상경하셔서 공부하시고 LG 본사에 근무하시다 여주에 자리를 잡으신 자수성가를 이루신 분이기에, 저를 더 많이 아껴주셨고, 믿어주셨고, 응원과 애정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저희 아이에게 장학금을 주실 정도로 은사님과 사모님 두 분 모두 애정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은사님을 다시 뵙고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에 지금은 곧잘 연락도 드리고 찾아뵙고 있습니다. 현재 은사님은 여든이 넘으신 연세로 강원도 횡성에서 템플스테이 겸 마음수련센터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가끔 찾아뵐 때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나이가 들어가시는 게 보입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딸처럼 생각하시는 제가 두 분께 연락도 드릴 수 있고, 찾아뵐 수도 있고, 매년마다 떨어지지 않게 건강식품도 챙겨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연이란 참 그런 것 같습니다. 만나야 할 인연이라면 시공간을 넘어서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면 서로에게 큰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고, 이혼이라는 선택으로 마음을 의지할 곳은 신밖에 없었지만, 저의 또 다른 부모님이 있으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와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배우고, 누구보다도 행복을 찾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신 분들이니 세상에 이런 감사한 인연이 어디 있겠습니까!!

종종 은사님과 산책을 하게 하면 늘 해주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생각을 낳는다.
생각이 감정을 낳는다.
감정이 행동을 낳는다.
행동이 결과를 낳는다.
늘 마음의 가지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

<지산 윤삼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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