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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Feb 23. 2019

나는 아직도 좋은 직장을 꿈꾼다.

여전히 좋은 직장인이 되고 싶다.

"면접 보시러 오시겠어요?"


난데없는 전화였다. 답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회신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 이력서 지원을 이어오던 지난해 늦가을이었다.  일주일에 한 곳, 한 달에 네 곳이다. 매번 연봉 높은 곳에 기계적으로 이력서를 보냈다.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이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백수에게 한 번의 이벤트는 나쁠 것이 없다. 가끔 콧바람도 필요하다. 


"네, 다음 주 지나고 뵙죠."


총 직원수가 예전 직장에서 일하던 팀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회사이다. 대학교 도서관보다 전공서적이 많았던 예전 직장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 제목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닙니다.' 대충 이런 거였는데, 불현듯 지난 시절 작은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같은 업계라도 첫 직장을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낮은 곳부터 천천히 올라가는 작은 사무실, 높은 곳에서 갑자기 추락할 수밖에 없는 대기업. 나름 입학 성적이 높았던 좋은 대학 출신이라는 것이 지방 출신의 보잘것없는 나를 설명하는 유일한 포장지였고, 우리나라에선 그게 제일 강력했다.(그땐 그렇게 믿었다.) 만약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다채로운 세상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적당히 높았던 콧대와 자신감, 그리고 보잘것없는 우월감은 젊은 나를 대기업으로 이끌었다. 

거기에 대학시설 수많은 인턴의 경험, 특히 작은 회사에서의 경험은 그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작은 연봉과 좁은 사무실, 익숙하다 못해 닮아버린 사람들, 한 달 만에 물들어버린 가족 같은 분위기.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좋은 직장은 아니었다. 높은 연봉, 쾌적한 사무실, 더 넓은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큰 프로젝트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좋은 사람들이라 참을 만한 그런 직장이 아니고 좋은 직장이라 거지 같은 사람을 참을 만한 곳을 원했다. 


대학교 졸업반, 교수님 사무실에서 마지막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제 막 사무실을 시작한 교수님은 내게 명예로운 첫 번째 고용인이라는 타이틀을 선물했다. 기분 좋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다른 회사를 취직한 내게 그분은 여전히 좋은 은사님이다. 제자인 나는 스승과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다른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도 매년 그분 사무실을 찾았다. 그 사이 여러 명이 두 번째, 세 번째 고용인이 되어 거쳐갔다. 내 가장 오래된 대학 친구가 한동안 머물렀다.  오랜 시간 그분의 사무실이 성장하고 달라지는 역사를 보며 내가 가보지 못한 작은 회사에 대한 미련마저도 사라졌다. 여전히 그분은 내가 좋아하는 교수님이자, 나름 성공한 건축가이다. 그러나 좋은 사장은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일을 함께 하는 것은 위험하다. 누군가의 추천과 소개로 일을 시작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작은 회사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섞였지만 그래도 뭐 어떠냐. 나라에서 소개해준 것이니, 적어도 누군가에게 빚진 느낌은 아니다. 


도무지 지원을 했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규모와 연봉을 살펴보니 연봉 순으로 세 번째이다. 그럼에도 연봉이 너무 낮다. 마음을 비우고 면접을 준비한다. 적어도 선택을 내가 하리라. 그러려면 고용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구 년의 경력을 열 장으로 압축한다. 딱, 십 분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다.


깨끗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아이패드에 간단한 포트폴리오를 넣었다. 

짤막한 인사, 대충 채워 넣던 워크넷의 이력서를 출력한 대표와 마주 앉았다. 새로운 이력서를 내밀었다. 자소서는 재취업자에게 더 어렵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하면 더 어렵다. 뻔뻔하게 내 능력을 뽐내는 글이라니. 


그리고 담담하게 '나 이런 것도 할 줄 알아'를 이야기한다.  숨 막히는 나의 자랑시간이 끝나고 탐색전이 이어진다. 열심히와 최선이라는 말을 빼고 대답했다. 


가장 중요한 자랑이 남았다.

"저는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

"저는 못하는 일은 못합니다."

"저는 해야 하는 일만 합니다."

정확하게 힘주어서 '이런데도 뽑을 테야'를 말했다. 

그러나 너무 쉽게 대답이 나왔다.


"같이 일해볼래요?"


"한 달 안에 답을 드리겠습니다."


인생의 실타래가 어느 순간 스르륵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때론 가장 치열하고 어두운 시간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예상치 못했던 평범한 일상 속 한 순간이다. 정확하게 콕 집어 얘기할 수 없는 묘한 느낌, 이렇게 내 인생이 흘러가는구나.라는 깨달음이 스친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고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 작은 회사에 대한 오만가지 추억과 나 역시도 이 작은 회사와 너무 쉽게 대답을 한 사장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좋은 회사를 만나서 좋은 직장인이 되는 걸까. 

좋은 직장인이 있으면 회사가 좋아지는 걸까. 


문득, 더 이상 나라로부터 받을 지원금, 프로그램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원하는 대로 선택은 내가 한다. 한 달의 백수가 될 것인지, 기약 없는 백수가 될 것인지 아주 가벼운 선택이다. 


좋은 직장을 꿈꾼다. 이십 대의 내가 생각했던 좋은 직장과 다른 의미이다. 슬프게도 나는 더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경험했다. 그렇기에 더 까다롭고 어렵다. 그만하면 적당하잖아, 웬만하면 다니지 그래, 이런 식으로 선택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좋은 직장인이니까.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렇죠 언니? 저 좋은 직장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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