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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Sep 10. 2019

비가 와도 제법 괜찮은 라이딩

완도 출발, 순천 찍고 진주서 밥 먹고 의령 거쳐 경주까지

부산스러운 아침이다.


일어나서 화장 따위 하지 않는다. 어차피 헬멧 안에 버프에 가려질 것, 대충 선크림을 쓱쓱 문지른다. 언제나 그렇듯, 투어의 짐을 싸는 것부터 시작이다. 짐은 되도록 버릴 것들로 가져온다. 샘플을 가지고 와서 숙소에서 하나씩 버리고 간다. 가장 좋은 건 매일의 짐을 하나씩 싸서 매일 사이드 박스에서 그것만 꺼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못된다. 이것저것 고민하다 결국 고민하던 모든 짐을 잔뜩 챙겨 와 첫 숙소에서 망연자실하곤 한다.  이를 어쩌나. 버려야 하나.


그래도 이번 여행은 짧다. 고작 일주일이지 않은가. 서울 이틀, 친정에서 이틀을 빼니 몇일 되지 않는다. 바이크에서 짐을 빼고 보니 그냥 보자기 하나 수준이긴 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첫 숙소에서는 항상 다 풀어놓고 보니 이걸 왜 가지고 왔을까 후회된다. 어제의 비는 오늘로 이어졌고 비가 오면 짐을 빼는 것도 다 귀찮으니 간단하게 분리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서울 도착하기 전 이틀을 버틸 짐을 빼고 사이드 박스에 들어갈 보자기 한 덩이를 만든다.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복장을 갖추어야 한다. 나는 중견 라이더라 스스로 자부한다. 면허 따고 3개월 만에 유라시아 횡단한 사람 있음 나와보라 그래.( 자랑이다. 내 평생 다시는 안할 여행이기에 .) 무모함과 무지함으로 도전하고 행운으로 마무리한 그 경험 덕에 남들 몇 년 만에 달릴 거리를 한 달 만에 주파했다. 지금 나의 마일리지는 대략 3만 5천 킬로미터. 제주도로 이사하고 나니 마일리지가 쑥쑥 늘지 않는다. 별로 신경쓰지도 않는다. 적당히 조금씩 타며 새로운 길을 찾는 재미도 나름 즐거우니까. 그러나 아무리 짧은 라이딩이라도 나는 세 가지는 꼭 착용한다.  풀 페이스 헬멧, 무릎보호대, 라이더용 부츠. (복장은 갖추고 타자. 적어도 헬멧은 인증받은 걸로, 턱 나가지 않는 풀페이스로. 소두 헬맷이라는 깡통좀 버리자) 나라고 예쁘장한 반모 헬맷과 딱 붙은  청바지나 편한 추리링이 얼마나 스타일리쉬한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마일리지가 늘어날수록, 수많은 라이더들을 만날수록, 방만한 마음가짐으로 이번 한 번인걸 뭐, 하는 순간 골로 가게 되는 우연 같은 불행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더 잘 알게 된다.


멋 따위 안전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 여행은 비가 함께하는 데다가 장거리 투어 아닌가. 투어링 기어를 장착한다. 위아래 풀세트로 입으면 많이 무겁다. 숨구멍을 모두 열어도 달리지 않으면 덥다. (달리면 안 덥다.)  숨을 헐떡이며 옷을 다 입고 나면 장갑을 챙기고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버프를 차고 헬멧을 손목에 끼운다. 핸드폰은 헬멧 속으로 집어넣어 빠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하고 가방을 바리바리 들고 숙소를 나온다.  어쩌면 오늘의 라이딩 중 가장 힘든 순간일지도. 땀이 속옷을 타고 흐른다. 덥다. 빨리 달리고 싶어지지만 짐을 넣고 모든 것을 체크하고 나서야 출발이다.


오늘은 완도에서 순천에 들러 커피 한잔을 마시고 진주에 들러 진주냉면을 먹고 경주까지 가는 것이다. 대략 400km를 조금 넘긴다. 훗, 이까짓 꺼.라고 남편에겐 큰소리 쳤지만 (나 유라시아 횡단한 여자야!! 이러면서 ) 만만치 않다.  우선 우리나라의 지방도로는 매우 열악하다. (러시아보다는 좋지만 가끔 깜짝 놀란다.)  바닥도 조심해야 하고 신호도 잘 봐야 하고 시골길은 어르신들과 툭 튀어나오는 트럭도 조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매번 예상시간보다 넉넉하게 출발하는 게 마음이 편안하다.  


출발부터 비가 내린다.  헬멧을 쓰고 남편과 통신을 연결하고 빗길로 미끄러진다. 토톡토톡 비가 노크를 한다. 저 멀리 완도와 연결되는 다리가 보이고 그 너머의 섬들이 보이고 그 너머의 산맥의 허리가 보인다. 비 덕분에 이 모든 것이 수묵화가 되었다. 부옇게 번지는 풍경 속에 바이크 두대가 튀어나간다. 아름답다. 우리는 참 아름다운 나라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왜 바이크를 위험하다고 단정 지을까. 위험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에 걸맞은 경험이 따라온다. 차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 속에 내가 바이크인지 바이크가 나인지 모르겠다. 그저 나는 달리고 있다. 어깨의 뻐근함을 인지하지 못한다. 손바닥은 아주 예민한 지시를 받아 스로틀을 당기고 놓는다. 손가락은 클러치를 당겼다 놓는다. 양쪽 발은 기어를 바꾸고 미끄러지지 않게 속도를 줄이느라 바쁘다. 이 모든 게 자동반사이다. 치매를 방지 할 것 같다. 이렇게 두 손과 두 다리를 정교하게 움직이는게 평소에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스쿠터 빼고!)


바이크를 타면서 예민해진 몸의 감각을 느낀다.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힌다. 비가 오는 오늘은 더욱더 그렇다.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런 풍경 속에 죽는 것도 나쁘진 않아라는 어이없는 상상이 오가는 사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완도의 풍경이 휘몰아친다. 세 개의 다리를 건너고 나서 드디어 내륙으로 들어선다.


이제 쭉 뻗은 국도를 달린다. 고속도로가 닥치는 대로 베어내고 효율성을 극대화한 도로라면 국도는 어느 정도 지세를 반영한다. 평탄한 길은 그대로 쭉, 산을 넘어가려면 사이드로 굽이굽이, 갑자기 산허리가 잘린 길보다는 멀리 돌아 새로운 풍경을 보게 만든다. 완도, 남해, 통영, 거제. 남도의 거의 대부분 지역은 그런 아름다운 국도를 가지고 있다. 지난번에 남도는 쭉 훑었기에 이번엔 남도의 중간 즈음을 선택했다. 내륙의 국도의 매력은 낮은 산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그림이다. 그리고 그 경사를 오롯이 받아들인 도로 덕에 높은 곳의 풍경부터 낮은 곳의 풍경까지 다양하게 볼 수 있다.


두 시간을 달려 순천에 도착하자 비가 그치고 축축한 엉덩이를 커피를 마시고 말리는 사이 해가 난다.

진주는 가까웠다.  순식간에 열두시가 되었다. 밥을 먹고 나니 경주까지 가는 경로가 고민이다.


내비게이션은 자꾸만 돌아서 가는 평이한 길을 추천한다. 자동차 전용 제외를 선택해야 한다. 항상 길이 애매하다.


남편과 나는 항상 경로를 같이 고민한다. 처음 바이크를 배울 땐 전적으로 남편을 따라갔지만 건축가라 그런지 지도를 보는 것도 어렵지 않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니 어떤 길을 선택하냐가 라이딩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선택한 루트를 별로라고 평하기보다 같이 얘기하고 정하는 것이 좋다. 진주에서 경주까지 가는 길에는 작은 소도시들이 있다. 이 중 의령군을 찍어본다. 지도를 한껏 줌아웃을 하면 대각선으로 최단경로인 선으로 보이고 줌인을 하니 오호라. 엄청난 구불구불한 라인들의 연속이다.  재미있겠군.  우리는 의령을 거쳐 경주로 가기로 한다.


우리의 선택은 훌륭했다. 의령을 거치고 창녕을 거치는 사이 버티재 삼거리를 지났다.  도와 도 사이의 경계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산들이 딱 버티고 있다. 그 산을 감아드는 길은 오르막길이고 약한 헤어핀 구간이다. 나는 한라산 1100 고지에 익숙한 라이더다. 어렵지 않은 각도와 넓은 도로, 그리고 산들이 겹겹히 겹쳐 보이는 모습까지 너무 좋다. 아장아장 초보 라이더 시절엔 숨도 못 쉬고 라이딩하곤 했다. 한 번도 사고가 난 적은 없지만 온 몸이 긴장감에 굳어버렸다. 그런 라이딩을 한 날이면 다음날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좋아한다. 묘하게 핸들을 밀어내고 엉덩이에 무게중심을 바꾸고 미끄러지듯 달린다. 재미도 재미이지만 저 높은 곳에 올라사서 만날 풍경에 더 설렌다. 이렇게 오늘은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길을 만나서 행복하다.


운암호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이름조차 몰랐던 저수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산의 중간 즈음을 연결하여 저수지의 바깥쪽으로 난 길을 달린다. 제주도에는 탁 트인 풍광이 가슴을 뻥 뚷어준다면 육지의 겹겹의 산들은 닿지 못하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소리를 몇 번이나 질렀을까. 좋다는 말을, 행복하다는 혼잣말을 하루 종일 조잘거린다. (다 남편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이렇게 바이크 가르쳐주고 같이 라이딩해줘서 감사하다는 일종의 편지랄까.)


이 모든 것을 남편과 함께 하는 나는 참 운이 좋다.


경주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반. 오늘은 꼬박 7~8시간 정도 달렸다. 분명 내일은 어깨가 뻐근하고 눈이 떠지지 않을 것이다. 더 좋은 건 내일도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달리기만 하면 지겹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세상에는 가보지 않은 길이 더 많다. 가본 길도 계절에 따라 다르고 날씨에 따라, 때론 내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 만나는 길은 언제나 옳다.

오랜만에 스크램블러 두대가 유라시아 횡단 모습 그대로 여행을 한다. 함께 추억할 것이 많다.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저 바이크에 유라시아의 모든 나라의 박테리아와 세균이 있을 거라고 말하곤 한다.  사실 이번 여행은 저 두대의 바이크 점검을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 추석이 시작되기 전 두카티 분당에 들러 점검을 받아야 한다. 제주도에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다. 덕분에 귀찮고 힘든 육지투어까지 해야하니 정말이지 피곤하다. 그럼에도 계속 이렇게 살 것 같다. 귀찮음을 뒤로 하고 내 엉덩이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드는 일은 한편으론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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