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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쎈쓰 ssence Jun 28. 2016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눈 녹듯 우리의 마음도 녹아내렸으면

철원에 혼자 사시는 아버지의 정년 퇴임식이라는 명목 아래 오랜만에 모인 가족. 이유는 하나지만, 각자 온 사정은 다르다. 무뚝뚝하고 과묵한 이미지로 전형적인 한국인의 아버지상을 보여준다. 특히 밥을 먹을 때나 무슨 일을 할 때도 혼자서 묵묵히 해내는 성격이다. 이와 반대로, 어머니의 빗발치는 잔소리 그리고 톡톡 쏘는 말들은 모든 이들로 하여금 지치게 만든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늘 외로웠던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식이라고 있는 두 아들들은 자신의 일과 가정에 치여 살기 바쁘다. 이럴 때는 남이지만 살가운 며느리가 나을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부모님의 속사정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실속을 우선시한다. 



데면데면한 가족 사이에 눈은 소통의 역할을 해준다. 갑작스러운 폭설로 운행이 끊긴 버스는 가족들을 한 곳에 반강제적으로 있게끔 만든다. 그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 밖에 없다. 이는 모두에게 숨이 막힐 정도로 갑갑하게 만든다. 특히 아버지의 '이혼하기로 했다.'라는 발언이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채 흐르는 침묵 속에 이루어지는 동침. 이렇게 연출된 상황들은 안타깝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아마 대화보다는 침묵이 더 익숙한 듯 보이는 순간의 연속이 마치 우리나라에서 비치는 가족으로 정의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잠시 눈을 가지고 노는 장면에서 형제는 옛 일을 추억하면서 동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핸드폰만 주야장천 보던 형도 동생의 눈싸움(눈덩이를 나무 위로 던져서 떨어뜨리는)에 내심 기다렸다는 듯이 동참하게 된다. 그렇게 서서히 눈에 익숙해진 가족은 침묵의 시간을 허물고 서로에게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오해가 이해로 바뀌기에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짧기만 하다.



역시나 아들들의 속사정에는 '내 집 장만'과 '가게 마련'이라는 금전적 문제가 뒷받침했다. 부모님이 이혼하신다는 사실에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전화로 압박하고 정면으로 재촉하는 며느리들의 실질적 문제에 대한 언급은 영화를 한껏 더 고조되게 만든다.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빚어지는 인물들 간의 마찰은 마치 눈으로 뒤덮인 철원의 과 비슷하다. 겉으로 봤을 때는 조화롭고 평안해 보이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서로를 대하는 가족의 냉랭함처럼 눈의 본질인 차가움을 각인시켜준다.



영화 속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인물 간의 관계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즉, 부부간의 내적 갈등이 표면으로 올라오기까지의 과정과 그리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한국적인 요소가 짙은 고부관계를 다룬다.



왜 하필 정년퇴임을 한 지금 이 시점에서 아버지는 혹은 남편은 이혼을 택한 것일까? 특별한 이유를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답은 '미안하다' 뿐, 아버지로서의 대답은 그저 미안함 뿐이다. 하지만 남편으로서는 다르다. 여자가 생겼느냐는 둥 온갖 질문을 해도 답하지 않던 남편이 눈을 던지면서 분노를 표출해서야 똑같이 분개한다. 어쩌면 오해는 이해가 부족해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해가 부족하면 채워 나가면 되지만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거라면 이는 갈라서는 것이 맞다는 남편으로서의 결론으로 보인다.



불통의 아이콘으로 부상하는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주기 원하는 인물이다. 시골에 있는 것도 갑갑하지만 이런 곳에 박혀서 나오지 않는 남편을 마주하는 것은 더 답답하고 갑갑하기만 하다. 게다가 갱년기에 놓여 있지만 아무도 그런 상황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에 더 쓸쓸함만 느낀다. 그나마 같은 '여자'로 기댈 수 있는 며느리와 스스럼없이 대하려고는 하지만 그런 시도가 그녀를 '친구 같은 어머니' 보다는 '막대하는 시어머니'의 이미지로 굳혀진다. 그러나 눈은 그렇게 밉게만 느껴지는 시어머니도 서툴고 여린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그녀가 말한 것 같이 그녀도 이해받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철원기행'에서 아버지는 고독하다. 혼자라는 단어가 낯설지는 않지만,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물론 '세일즈맨의 죽음'과는 달리 '철원기행'에서는 아버지가 스스로 고독을 택한다.


고립과 독립 그 중간 즈음에  놓여 있는 철원에서 눈과 감자를 벗 삼아 지내고자 하는 남편과 아버지를 이해는 못하지만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한다. 미묘하지만 처음과 끝에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있다. 그들이 겪은 2박 3일은 결코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단면적으로나마 아버지의 고독을 느껴보고, 그가 생활하는 삶 속에서 의미를 경험해본 것이 아닌가 싶다. 오해는 이해를 하려는 노력에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한다.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마음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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