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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Feb 24. 2022

어린날의 섬, 사량도(2)


 섬에 왔으니 바다에 가는 일을 빠뜨릴 수 있나. 수영복 대신 이래저래 헐거워진 평상복을 대충 차려입고 나선다. 바닷가는 응당 고운 황금색 모래가 깔린 줄 알았건만, 어째 섬마을 해변은 제멋대로 생긴 자갈돌이 가득하다. 고운 모래만 밟고 자란 턱에 발을 찌르는 딱딱한 돌덩이로 가득한 바다가 몹시 거칠다. 얕은 물에서만 물장구를 치고는 온몸에 짠 기를 품은 채로 커다란 바위에 옹기종기 모여 붙은 낯선 생물들을 따기 시작한다. 미끄러워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았건만 잔소리하는 엄마보다 키가 큰 바위를 이리저리 오르내리는 재미는 무엇보다 신이 났다. 손으로 떼어지면 뭐든 잡아 플라스틱병에 넣는다. 가끔 바닷가 돌을 들춰내면 운이 좋은 날엔 작은 게도 볼 수 있던 생명 가득한 바다. 사람 흔적 가득한 관광지 해변만 보고 자란 소녀에게 섬에서 만난 한적한 바다는 강한 힘이 넘쳤다. 무엇인지도 모른 체 잔뜩 채운 병을 자랑한다. 엄마는 잡아들인 놈들을 모두 먹을 수 있다 했지만, 도시에서 자란 딸에게는 마뜩잖았으므로 따는 재미만 실컷 누리고는 미련 없이 손을 털었다.      


 바다에서 멀지 않은 산길을 돌아오면 외할머니 집이 보인다. 언젠가 한바탕 수영을 마치고 바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작은 뱀을 본 일이 있는데, 엄마는 그제야 이 섬엔 뱀이 아주 많이 살고 있다는 섬뜩한 고백을 해주었다. 뱀 사(蛇) 자를 써서 사량도라 이름 붙여졌단다. 그때부터 마구 걷던 걸음이 꽤 조심스러워졌지만, 다행히 그 뒤론 한 번도 뱀을 보지는 못했다. 어린 귀에 엄마의 말을 곧이 알아듣지 못하고 얼마만큼 자랄 때까지 할머니의 섬은 사랑이 넘치는 ‘사랑도’인 줄 알았다. 어찌 됐건 둘 다 멋진 이름 아닌가. 물놀이에 지친 육신을 바람이 살랑대는 마당 평상에 뉘고 하늘을 마주 본다. 엄마의 다리를 베고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에는 직접 아궁이에 나무를 집어넣어보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한참을 누워 뒹굴거렸음에도 재빨리 달리지 않는 시곗바늘 대신, 마당에서 빨랫줄을 지지하던 기다란 죽창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밀어대며 긴 하루를 보낸다. 할머니가 저녁 내 차린 투박한 밥상보다 한차례 힘겹게 걸어 손에 넣은 라면 한 봉지가 더 입에 맞았다.     

 섬에 박힌 시골은 뭍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미 오가는 길부터 차와 배를 모두 타야 했으니 번잡스러웠고, 너무도 옛것 그대로인 불편한 화장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벌레, 겨우 몸을 씻을 수 있는 찜찜함, 멀리 펼쳐진 심심한 풍경까지. 소녀에게 설레는 마음으로 얼른 가자 응석 부릴 장소가 아님은 분명했다. 마지못해 따라나서지만, 얼른 돌아올 날만 꼽는 할머니 집. 더욱이 명절에만 찾는 터라 엄마는 밀린 친척 집 방문을 한꺼번에 하기 위해 어린 손을 끌고 이리저리 부지런히도 다니셨으니, 자주 보지 못해 낯선 친척들 앞에 쑥스럽게 고개를 숙이고는 지루한 어른들의 이야기가 어서 끝나기만을 속으로 간절히 빌곤 했다. 깨끗하지 못한 바닥에 앉아 참아내는 시간이 참으로 지루하고 난감하다. 고깝게 깔끔한 체하던 소녀에게 섬마을은 전체가 소금물에 담가진 듯 찐득했고 따가웠다. 휴일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멋진 배를 탔다는 무용담을 털어놓을 때도 똑똑한 선생님조차 사량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으니 이제껏 기세 등등했던 소녀는 매번 풀이 죽어 할머니 집은 꼭꼭 숨어있는 작은 섬에 있다는 걸 자연스레 몸으로 느끼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계시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나마 이어지던 배를 탄 여정은 명맥을 이어가지 못한다. 엄마는 드물게 여전히 섬에 계신 친척 집을 들여다봤지만 가는 길이 수월하지 않아 굳이 어린 자식을 데려가시진 않았다. 몇 년 사이 할머니 집까지 처분해버렸고, 굳이 그 섬을 찾을 일은 없어져 버렸다. 언젠가 엄마로부터 섬에 멋진 다리가 놓였다는 사실과 이제는 제법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크게 담아두진 않았다. 다시 그곳에 갈 일은 없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어느덧 자라 고향을 떠나 살고 있던 덕에 명절이 되면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향하는 게 일이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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