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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Feb 25. 2022

어린날의 섬, 사량도(3)


 지나간 어린 날에 남겨진 할머니의 섬을 다시 찾은 건, 더는 때가 되어도 갈 곳이 없던 오월의 봄이었다. 자만했던 젊은 날의 건강은 급속도로 곤두박질쳤고, 큰 수술을 받은 턱에 직장까지 그만둔 채 지친 몸을 돌보는 데만 집중해야 했다. 퇴원 후 매일 방 안에 앉아, 흔한 동네 산책도 하지 않는 낙심한 딸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어느 날 엄마는 자신의 고향으로 하룻밤을 묵는 짧은 여행을 떠나자 권한다. 지친 몸을 따라 마음도 덩달아 지쳐가던 때, 아픔으로 아무런 의욕도 없던 날에 받은 엄마의 제안은 제법 마음을 움직였다. 낯설고 새로운 곳이 아닌 이미 익은 장소로 떠나는 짧은 일정. 모든 게 힘겨워진 자에게도 버겁지 않은 적당한 고됨. 섬에서 쭉 살고 계신 턱에 외할머니를 뵈러 가서야만 겨우 들렀던 엄마의 언니, 이모도 아직 섬에 계셨기에 하루 잠자리를 빌릴 수 있으니 당장 떠날 수 있다. 때가 되어 의무감에 떠나던 길이 아닌 어지간히도 잊고 지냈던 추억의 장소로 다시 향한다니 새삼 설렌다. 살아보니 육지 사람이 섬으로 들어갈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더라.      


 항상 부모님 뒤만 쫓았으나 이제는 경로를 알아볼 만큼 머리가 컸다.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배를 타야지. 외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 무엇보다 강렬하게 남아있던 배의 잔상을 오랜만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다. 몇 년 동안 묵혀만 둔 엄마의 운전면허로는 당장 도로를 달리긴 불안했기에 모녀는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서 통영에 도착한다. 가오치 선착장. 수십 번 와 봤을 테지만 생각 없이 누비던 어린 기억에 가오치란 이름은 없다. 처음 듣는듯한 지명에 몰래 미소가 지어진다. 누가 섬으로 가는 길 아니랄까 봐 물고기 이름 같은 걸 붙여뒀구나. 시간이 한참 남은 덕에 출출함도 달랠 겸 한쪽 작은 식당으로 들어간다. 원체 낯선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물꼬를 트는 엄마는 유독 할머니의 섬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그 능력치가 절정에 달한다. 주인아주머니께 살갑게 말을 붙여 이내 섬 소식을 묻는다. 손바닥만 한 섬도 아닐 텐데 어찌 이리 서로의 안부를 알고 사는 걸까. 뼛속까지 육지 사람인 딸만 주변인이 되어 가만히 흰밥이 돌돌 말린 충무김밥을 입속에 넣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을 찾은 섬 주민 아주머니도 합류하시니 또 한 번 신기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몇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라는 말이 있던데, 섬마을 사람들은 몇 번 건널 일도 없겠다. 엄마는 이미 떠난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섬에 사는 사람처럼 모두와 경계가 없다. 한 사람만 민망한 몇십 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우리는 배에 올랐다.      


 오월의 평일. 늘 북적거렸던 때 찾던 곳이라 텅 빈 선착장이 한편 낯설었지만, 분명 어릴 적 밟았던 곳임은 분명하다. 한없이 넓게만 느껴졌던 장소가 이제야 한눈에 들어온다. 키가 큰 만큼 세월도 많이 흘렀겠지. 반가운 몸뚱이가 큰 녀석의 벌린 입으로 발을 디딘다. 낡고 거칠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보란 듯 곱게 칠해 말쑥해졌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하나둘 잊고 있던 친숙함이 차차 선명해지며, 여행이라 못 박고 떠나는 뱃길이 다시금 새롭다. 다만 여객선 실내에 머무를 수 없는 호기심만은 여전해 곧장 선상 밖으로 향한다. 철부지 어린 딸의 응석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꼭대기 층으로 올랐던 엄마도 이번만은 자진해 바닷바람을 맞기로 한다. 귀를 때리는 엔진 소리에 적응이 될 때쯤엔 이미 배는 뭍에서 멀어지고, 제법 키가 비슷해진 모녀는 가만히 뱃머리에 섰다. 날씨 좋은 봄. 어린 날의 눈길이 바닷속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고개를 들어 좀 더 멀리 내다보는 여유가 생겼다. 짠 내 가득한 시원한 바람을 가슴속 깊이 들이마신다. 습하지만 상쾌한 공기가 그간 병원과 방안에만 머물러 있던 탁한 속을 시원하게 훑어 내려간다. 이리저리 방향을 돌리며 출발하는 배 끝에 서서 다시 만난 풍광을 한 번에 품으니, 몇 번이나 봐왔을 텐데 이리 보니 절경이다.      


 오랜만에 정든 곳으로 돌아가는 엄마는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에도 농담이 잦은 편이지만, 당장 물에 빠지더라도 이곳 바다에서만은 헤엄쳐 살 수 있을 거라 거드름을 피우는 엄마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가엽다. 멀지도 않은 고향 땅을 왜 이제야 함께 오게 됐을까. 여전히 바닷새들이 곁을 맴돌고, 탁 트인 하늘과 바다는 저 멀리 끝이 없다. 엄마는 곁에 바짝 붙어 눈에 들어오는 작은 섬들에 대해 청하지도 않은 일말의 지식을 마구 뱉는다. 크게 관심이 가지 않음에도 가만히 듣고 섰다. 되려 듣기보다 신이 난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리도 좋아하면서 먼저 찾을 여유도 없이 살고 있었다니 괜히 미안한 마음마저 들더라.     


 목적지에 다다라 소식만 전해 들었던 섬 사이에 놓인 다리를 직접 만났다. 그간 큰 강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멋진 다리들을 수도 없이 봐 왔기에 뭐 대수롭냐 싶지만, 섬 사이를 배로만 다녔던 엄마의 어린 시절에는 상상조차 힘든 비약적 발전이라더라. 엄마는 명성을 얻은 자식을 둔 사람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가니 꽤 자랑스럽나 보다. 어린 날에는 사량도가 하나의 섬인 줄 알았는데 많은 섬을 뭉텅이로 지칭한다는 걸 이제야 확실히 안다. 상도와 하도의 구분이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정리된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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