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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Mar 11. 2022

어린날의 섬, 사량도(6)


 아침부터 부산한 소리에 귀부터 깨어났다. 역시나 이른 새벽부터 다들 일어난 모양. 멍한 정신이 제자리를 잡기도 전, 씩씩거리며 방에 들어온 엄마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일찍 떠나겠다 딸에게 선포한다. 괜한 불똥이 튈까 비겁하게 지켜보던 중, 방문 밖에서 날아드는 이모의 핀잔에 상황 파악 완료. 수려한 말발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엄마가 어찌 입을 꾹 닫고 대꾸 하나 하지 못하니 이것이 자매의 서열인가 싶어 구경꾼은 웃음만 났다. 큰일도 아닌 것이 엄마가 욕실을 쓰고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모는 달궈진 프라이팬에 콩을 볶듯 오랜만에 만난 동생을 달달 볶아대고 있었다. 기운 빠지도록 별일이 아닌 탓에 금방 풀어지나 했는데 웬걸, 엄마는 진실로 뿔이나 얼굴이 붉다. 나이가 들어도 자매는 자매인가. 꼬마들이 다투듯 여전히 툭탁거리는 환갑을 훌쩍 넘긴 두 여성이 참으로 귀엽고 유쾌하다.     


 아픈 딸 덕에 억지로 앉은 아침상을 물리고, 엄마는 밖으로 나갔다. 일찍이 싸놓은 짐가방은 곧 떠날 사람처럼 현관에 던져놓은 채. 아직 기분이 덜 풀린 엄마의 비위를 맞춰보려 평소답지 않게 살랑대며 항구를 따라 걷는다. 무조건 이모 잘못이라 대신 탓했다. 슬슬 마음이 풀린 발길이 닿은 곳은 돈지마을.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외할머니 집이 돈지라는 건 날 적부터 듣고 자라 익숙하다. 낯익은 할머니의 옛터에는 오래전 큰 건물이 들어와 숙박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낡고 수수한 집이라고만 여겼는데 막상 눈앞에서 사라지니 몹시 아쉽다. 번듯하고 커다란 것들을 동경했지만 어느새 그 속에 살다 보니 꾸밈없이 낮은 할머니의 집이 그립더라. 흙이 지천으로 널린 포근한 터. 엄마도 새삼 서글픈지 서둘러 발길을 돌리려 한다. 다신 없을 지나간 날을 추억할 장소가 사라졌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고 자라 마지막까지 부모님이 계시던 곳. 엄마도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겠다 깨닫자 문득 엄마가 딱하다.   

  

 조그맣던 슈퍼 대신 큰 마트가 자리 잡았지만, 섬 구석구석엔 여전히 그대로인 모습도 많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벌써 점심때. 엄마는 화가 가라앉았음에도 언니에게 부릴 자존심은 남아있었던지 급히 배표를 끊어버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준비 없이 온 여행이라지만 이다지 계획 없이 되돌아갈 줄이야. 허탈해도 어쩌겠는가. 중간에서 등이 터지기 전에 곱게 떠나자. 엄마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이모에게 전화를 건다. 막상 홧김에 떠나자 결정하고는 민망함에 먼저 화해를 청하나 보다. 모녀는 항구에서 몇 발 떨어지지 않은 식당에서 멍게 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무뚝뚝한 이모도 자신의 이름을 팔면 잘 대해줄 거라 나름의 상냥함을 펼쳤으니 추천대로 한다. 날것은 피하고 있어 하나는 살짝 데쳐 달라 주문한 뒤, 깔끔하게 차려진 한 상을 맞았다. 화창한 날씨에 나가 먹자며 이미 몸을 일으킨 엄마의 말에 망설임 없이 자리를 옮긴다. 바다가 보이는 노상에서 먹는 신선한 식사. 별다른 것 없어 보이는 한 그릇을 뚝딱 비벼 입으로 넣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엄마와 시선이 마주친다. 맛있다. 정말 맛이 좋다. 눈이 번쩍 뜨이도록 감칠맛이 나는 신선한 멍게. 묻지도 않았건만 연신 호평을 뱉어내며 엄마와 신속히 한 대접을 비웠다. 뱃구레가 허락만 한다면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을 텐데. 대체 어찌 이런 맛을 낼까 진정으로 궁금하다. 갓 잡은 재료가 비법일까. 다시 생각날 거라 확신이 들어, 놓는 숟가락이 아쉽다. 항구 곁에 앉아 속에 생명을 가득 품은 바다를 바라보며 삼킨 한 그릇이 참으로 알찼다.     

                                                                                     

 아쉽지만 그대로 돌아간다. 여러 번 와 본 곳이라 이리도 쉽게 떠날 수 있나 싶다. 공들여 떠난 여행지라면 어느 누가 이렇게 쉬이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각보다 일찍 섬을 나섰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어렵던 중년 자매의 어이없는 다툼은 실로 화를 일으킨 모양이다. 별것 아닌 일에 갑작스레 일정이 당겨지니 황당하면서도 우습다. 어쩌면 이리 돌아가는 게 이번 여행의 마무리로 무엇보다 어울릴 게 없을 것도 같다. 급히 왔으니 또 겨를 없이 떠나는 거지. 이 섬에서 엄마와 이모는 저리 숨김없이 싸우며 자랐을까. 문득 사량도에 덮어둔 엄마의 지난날이 궁금해진다. 무용담처럼 들어왔던 엄마의 옛 시간. 사는 이 모두가 모를 일 없고, 그리 모두가 친구였으며 섬 밖이 궁금해 머리가 크자 곧바로 섬을 벗어났다던 치기 어린 청춘이 자란 땅.      

 몸이 성치 않아 모두가 찾는다는 유명한 산을 올라보지는 못했지만, 찬찬히 섬 아랫길에 머문 하루에도 만족한다. 엄마를 품었던 곳이라 어떤 장소보다 정겹고 온화하다. 어린 날 느꼈던 섬마을의 불편한 따끔거림도 세월에 무뎌진 건지 보드랍고 따스하기만 하다. 뭍은 너무도 변해 뛰놀던 옛터가 구분도 못 하게 변해버렸지만, 사방이 물로 막힌 섬은 아무리 모습이 변했다 해도 바다에 뜬 곳이라 눈에 익어 낯설지 않다. 제자리에 있어 주니 마음이 흐뭇하다. 별다른 준비 없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던 어린 날을 꺼내 보니 지친 마음에 생기가 돈다. 고맙게도 맥없이 쳐져 있던 아픈 이에게 날 것 그대로의 바다와 자연의 생명력은 다시 정신을 차릴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엄마와 딸, 각자의 어린 날이 모두 이 섬에 있다. 두 사람에게 이만큼 의미 있는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멀지 않은 곳에 툭하면 찾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가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괜히 유명해진 섬마을이 서운하기도 하지만 유년 시절이 녹아있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내 것이니 문제없다. 가끔 찾아와 그때처럼 꾸밈없이 지내고 싶다. 돌아오는 뱃머리에서 엄마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약속한다. 돌아가면 좀 더 힘을 내보기로. 다음번엔 좀 더 건강한 모습으로 이곳을 찾기로. 또 어린 날 그때의 우리처럼 꾸밈없이 웃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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