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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Feb 08. 2023

운명에 대한 생각

 <어쩌다 발견한 하루>와 《오이디푸스왕》

<어쩌다 발견한 하루>라는 드라마가 있다. 학원 로맨스물인데 형식도 내용도 새로워서 심심할 때 꺼내먹는 과자처럼 한 편씩 본다. 드라마 여주인공 ‘단오’는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액자식 구성처럼 드라마 속에는 로맨스 만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가 또 있는데, 단오는 이 로맨스물 만화의 주연이 아닌 조연인 것. 이 로맨스 만화의 상황을 ‘스테이지’라고 한다. 


드라마 1, 2회를 볼 때 어리둥절했다. 같은 에피소드가 반복되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가 어렵다. 스테이지라는 개념이 서야 드라마 전개를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스테이지 안에 있을 때의 등장인물들에게는 자아가 없다. 철저히 작가가 그려놓은 설정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한편 단오를 비롯한 드라마의 주요 인물들은 스테이지 안과 밖을 구별하는 각성한 자들이다(그걸 모르는 등장인물들도 많은데 하나둘씩 점차 각성해 가면서 스토리가 풍성해진다) . 단오는 스테이지 안의 설정값, 즉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을 바꾸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비록 그 시도들이 계속 좌절되긴 하지만 운명을 다루는 유쾌하고 발랄한 방식이 신선해 마음에 들었다.    


운명이란 말은 좀 거창하지만, 각자 환경이든 유전적 요인이든 가지고 태어난 특성이 있다. 이에 따라 기질과 성격, 혹은 적성 같은 게 달리 발현된다. 이렇게 규정된 것들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는 않다. 요즘엔 2030 세대도 사주를 많이 본다. 과거 중장년층이 유명한 사주쟁이를 찾아다니던 풍경과 달리, 이들은 앱으로 혹은 다양한 SNS 채널을 이용해서 사주를 본다. 유쾌하고 가벼운 느낌이 든다. 대유행중인 MBTI도 넓은 의미에서는 운명과 비슷한 게 아닐까. 



오이디푸스와 단오     


오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무서운 운명이여,

일찍이 이 눈으로 본 것 중에 가장 무서운 운명이여! (…)

대체 어떤 신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약으로써

그대의 불운한 인생을 덮쳤나이까?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몇 해 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오이디푸스의 행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모습은 더없이 인간적이었고, 전혀 수동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운명이란 무엇이고,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신탁은 누구도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참혹한 것이었다. 아버지(라이오스 왕)를 살해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어머니(이오카스테)와 몸을 섞고, 형제이며 자식일 자식을 낳게 될 운명이라니.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는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고자 아이가 태어나자 버린다. 과연 이들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신은 숙명에 맞서는 인간을 손 안에 두고 조롱한다. 이 일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그리고 보란 듯이 일어난다. 오이디푸스 왕이 도시 테베의 불운을 막기 위해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을 찾아나서는 순간, 감춰져 있던 운명의 비밀들이 드러난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운명을 벗어날 길이 없단 말인가.  


《오이디푸스 왕》은 연극의 황금기인 기원전 5세기경 소포클레스가 무대에 올린 수많은 작품 중 하나로 추정된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2019년 드라마이다. 두 작품은 어마어마한 시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동질성을 가졌다. 두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주어진 운명에 온 힘을 다해 맞선다. 오이디푸스 왕 2대는 파멸에 이르렀고, (드라마 중반까지도) 단오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운명은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일까!  

그러니 운명에 순응하란 얘길 하려는 건 아니다. 운명의 반대쪽에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란 무얼까? 예언자 테이리시아는 오이디푸스에게 라오스 왕의 살해자를 찾지 말라 경고한다. 그대가 바로 범인이라고. 오이디푸스는 진실에 다가갈수록 파멸의 숙명이 오리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진리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단오 역시 스테이지 안의 자기 운명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명리학을 찾고 MBTI를 궁금해하고 별자리 운세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들이 있고, 그 힘이 꽤 결정적이라는 걸 살면서 체득해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두 작품에서 느낀 것은 운명의 무서움이 아니다. 그보다는 운명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운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미련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경이로움이었다. 


우리는 모두 두렵고 지치고 그리하여 꺾이는 순간도 있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는 끈기 또한  있다. 오이디푸스의 장엄한, 비극적 서사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시한부라는 숙명까지 얹어져 도저히 운명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데도 그 운명과 ‘맞짱 뜬’ 단오의 발랄한 끈기가 어떤 결말에 이를지,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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