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치료 중 제풀에 넘어지지 않기
어릴 때, 프린세스메이커라는 게임을 했다. 게임명처럼 공주 육성 시뮬레이션이다. 플레이어가 공주에게 어떤 교육을 받게 하고, 무슨 모험과 훈련을 경험하게 하느냐에 따라, 공주가 왕비 혹은 전사, 식당 종업원 등이 된다. 이 게임은 친구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높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왕비나 여기사로 키울 수 있는지 공략법을 공유하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가끔 옛날에 했던 육성 게임이 생각난다. 아무것도 못 하던 아기가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하더니, 뒤집고 기고 급기야는 일어나 걸음마를 한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가 레벨이 오르면서 스킬이 늘어나듯이, 아이도 성장하면서 활동이 다양해지고 에너지가 많아진다. 비록 내 몸은 점점 고돼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를 보는 만족과 기대는 육아가 주는 큰 선물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아이의 성장만 좇다 보면 자칫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아이의 주관과 의지를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강요해 버리는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쏟는 내 열정과 에너지가 그만 아이에게 독이 되고 만다.
준이는 요즘 언어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생후 15개월을 맞는 아이에게 지금은 언어를 익히는 데 매우 중요한 시기다. 생후 18개월까지 '듣기'와 '말하기'의 기본을 갖추지 않으면, 특정 발음을 소리 내지 못하거나 분별을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 때문일까. 준이와 언어 치료 연습을 하다 보면 '소리'를 강요하는 내 모습을 쉽게 발견한다.
"이건 자동차잖아. '부웅부웅' 해야지."
"이건 돼지야. 꿀꿀. 꿀꿀. 꿀꿀. (…) 꿀꿀!!!"
"왜 자꾸 '음', '웅'이라고 하는 거야. 입술과 혀를 움직여 봐."
흥분하는 아빠를 준이가 좋아할 리 없다. 엄마에게 도망가거나, 그 자리에서 운다. 제풀에 넘어진다고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는 로봇이 아니다. 컴퓨터처럼 명령어를 입력한다고 무조건 그에 따른 결괏값을 내놓지 않는다. 게임 속 캐릭터처럼 교육과 훈련을 반복해서 주입한다고, 꼭 원하는 클래스에 도달하는 건 아니다. 어리고 약하지만 아이도 사람이다.
나는 가끔 인간이 언제 어떻게 소리를 인식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소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소리'를 모르거나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에게, 이것이 "소리"라고 외치거나 똑같은 소리를 따라해 보라고 다그친다고, 소리가 교육되는 걸까.
난청 아동에게 소가 그려진 그림을 보여 주고 눈을 부릅뜨며 "음메"를 수만 번 외친다고, 아이가 소리를 낼 리 없다. 가르칠 수 없고 주입할 수 없는 '소리'의 세계를 아이는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마치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몸을 뒤집고 옹알이를 하고 걷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님이 준이를 기다려줘야 해요. 다 알아들어요. 본인도 어떻게 소리를 낼지 몰라 속으로 답답해할 거예요. 그냥 마치 놀이하듯이 소리를 들려주고 자극을 계속하면 어느 때부터 따라하기 시작할 거예요."
어느 날, 언어치료사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육아는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다.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긴장의 순간이 지나면, 자녀가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존중하는 이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와 준이 사이에는 긴장으로만 가득했던 것 같다. 이 긴장이 아이의 성장을 억누르고 나를 지치게 했던 건 아닐까. 이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