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뒤쪽으로는 상업지구이고 앞쪽으로는 주거 밀집지역이다. 주거지가 밀집된 곳에는 어김없이 시장이 있다. 한국에서는 마트가 흔하다면 이곳에서는 시장이 흔하다. 집 근처에 미라바드라는 시장이 있는데 이곳은 외국인들 특히 한국인이 많이 오는 시장이기에 콩나물, 숙주나물, 버섯, 두부 등을 쉽게 살 수 있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냉장고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날마다 장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소꿉놀이 하는 기분으로 자주 간다.
주거지와 상업지구가 혼재되어 있는 우리 동네
어김없이 늘 다니는 길로 시장을 가고 있었는데 꽤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노랫가락이 무척이나 슬프게 들렸다. 신나게 시장으로 향하던 가벼운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무겁게 느려졌고 신나게 수다 떨며 걷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이 없어졌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지나쳐야만 할 것 같은 음악소리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여러 명의 연주자들이 트럼펫을 비롯해 여러 개의 관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돌아가신 걸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만큼 관악기 연주소리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너무 구슬펐다.
그러고 보니 연주자들 옆으로 검은색의 대형버스가 있고 그 뒤로 시신을 운구할 차량이 있었다. 뒤이어 연세가 꽤 들어 보이는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계단을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고 동네주민들이 나와서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모습도 보였다.
누군지 모르는 분이지만 동네주민으로서 명복을 빌어드리고 조용히 우리는 목적지로 이동했다. 집으로 돌아와 문득 그 슬픈 가락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요즘 우리나라는 병원에서 대부분 임종을 맞이하기 때문에 집에서 돌아가시는 일이 흔치 않지만 우즈베키스탄은 대부분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모님이 아프시더라도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 노인을 공경하는 문화도 강해서 어느 유명한 식당은 노인 한 분이 식사를 하러 오시면 음식 값을 받지 않는 곳도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우즈베키스탄 대학생에게 부모님이 아프시면 요양원이나 병원으로 모시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학생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펄쩍 뛰었다. 우리나라도 한때는 그랬던 것 같다. 내 부모님을 요양원에 보내는 일은 해서 안 될 일인 듯 여겼고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이기에 이제는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여러 면에서 우즈베크는 우리나라의 80~90년대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님은 분명한 일이었다. 관악기가 그토록 애처로운 소리로 들렸다는 것이 신기했는데 어찌 보면 호흡으로 소리와 음을 표현하는 악기인 만큼 연주자의 감정을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우즈베크는 한국과 참 비슷한 점이 많다. 고대도시를 가면 대문이나문지방, 문틀, 우물, 펌프 등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물들에서 한국과 닮았다고 생각되는 것도 그렇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도 유사하다고 생각될 때가 종종 있다.
그러고 보니 동네주민들이 장지에 따라가는 것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상여가 나가고 이별을 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따라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됐다. 이렇게 생각하니 구슬픈 관악기 소리는 상여소리와 비슷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랏차~어호우"
나이가 들어가면서 종종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행자로서가 아닌 타국에서의 삶은 더더욱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한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고 하듯이 타국에서 아프거나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해 본다. 그래서 외식보다는 조금이라도 건강한 밥상을 차리려고 애쓰기도 한다.
혹자는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삶에 대한 집착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삶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고 죽음의 순간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죽음을 대하며 알지 않는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이 안타깝지 않기 위해 오늘도 하루를 잘 보내리라고 새삼스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