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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뜻 밖의 백수 Oct 12. 2020

01) 서른두 살, 코로나에게 직장을 빼앗기다.

"OO 씨, 시간 될 때 잠깐 저쪽 방에서 이야기 좀 해요."


올 것이 왔다. '저쪽 방'에만 불려 들어가면 한참 후에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오는 그 순간이.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이미 면담을 마친 다른 부서의 주임님에게 슬쩍 물어본 바로는 9월까지 지속되는 정부의 코로나 19 지원 대책인 고용유지 지원금 90% 특례 지원 기간이 끝나고 나면 직원들에게 매 달 월급을 주는 게 어려워질 거란다. 이 무시무시한 코로나의 위력에 회사 문이 닫히는걸 어떻게든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지원금 제도가 연장되지 않고 매출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지금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앞으로 직원들의 고용상태를 유지할 여력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단다.

예상은 했었다. 코로나가 우한폐렴이라는 임시 이름을 달고 중국과 한국, 일본을 덮치고 이후 COVID19라는 정식 명칭을 부여받아 유럽까지 진출해 전 세계로 무섭게 뻗어나가던 지난 3월 중순부터 많은 나라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바이러스라도 막아보겠다며 국경에 빗장을 걸었다. 이제는 몇몇의 나라가 입국을 허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하루에 수만 명 씩 확진자가 나오는 그곳으로 누가 목숨까지 걸어가며 영어공부를 하러 가겠는가. 회사의 전화기는 고장이 났나 싶어 가끔 한 번씩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잠잠해진 지 오래됐고, 업무시간 내내 예약 상담 스케줄이 빡빡했던 캘린더는 몇 개월 째 텅텅 비어있다. 700만 원에 달한다는 사무실 월세를 어떻게 내고 있는 건지 직원인 내가 걱정이 다 될 정도였다. 그래도 진짜 잘린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설마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나겠냐며, 우리 회사가 정말 없어지겠냐며 진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부정했다.

"5월 정도면 사그라들 거야. 기온이 높아지면 바이러스가 금방 죽는대.  그나마 추울 때 마스크 쓰고 다니니 다행이지 여름에 코로나가 터졌어봐. 그 더운 날 마스크를 어떻게 쓰고 다니겠어? 상상도 못 해."

열 명 남짓 되는 직원들끼리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내가 때려치우는 일은 있어도 내쫓기는 일은 없을 거라고 각자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었다.

'저쪽 방'으로 들어가기 전, 작년 4월 출장 때 시애틀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에 들러 구입했던 텀블러에 미지근한 물을 받았다. 캐나다 벤쿠버와 미국 서부 곳곳에 있는 어학원을 탐방하는 약 열흘 간의 출장이었다. 이 회사에서 거의 5년간 근무하는 동안 나는 필리핀, 영국, 캐나다 그리고 미국으로 출장을 다녀왔고 올해는 몰타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코로나가 온 세계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어 나라의 문까지 닫아버리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올해도 2019년처럼, 2018년처럼, 그 전년도처럼 일하고, 상담하고, 돈 버는 서른두 살 유학 상담원으로 살게 될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10년 된 이 회사에서 세 번째로 오래 근무한 직원이니 해고 대상에서 제외시켜주지 않을까.'라는 근거 없는 기대도 품어봤던 면담은 점심시간 직후 시작되어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어서야 끝이 났다. 상담하러 오는 고객도 없고 업무는 이미 오전에 다 마친 상태여서 일찍 퇴근해도 된다는 지시에 대충 정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을 탔다. 원망할 대상이 없었다. 내 잘못으로 직장을 잃는 거라면 나를 자책하면 되고 누군가의 잘못이라면 찾아가서 욕이라도 시원하게 할 텐데 누구 하나 잘못한 사람 없이 회사는 더 이상 직원을 끌고 갈 여력이 안되어 나를 잘라야만 하고 나는 잘려야만 한다. 직장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에서인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힘없이 당하는 내가 불쌍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는 눈물이 계속 났다. 눈물은 눈 밑부터 턱까지 덮고 있는 마스크 안으로 흘러 들어가 아무도 내가 울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고, 난 그 덕에 눈물을 닦을 필요 없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소리 내지 않고 계속 울었다.

스무 살 대학생 시절부터 5평 정도의 원룸에서 월세를 내며 자취를 하다가 올해 초 '중소기업 청년 대출'로 1억을 대출받고 신용대출을 2천만 원 더 받아 그동안 차곡차곡 모은 돈과 함께 1.5룸 반전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비록 빚으로 빌린 남의 집이지만 작은 원룸에서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1.5룸으로의 진출은 내가 조금 더 세련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었다. 그까짓 코로나, 끝나기만 하면 다시 열심히 돈 벌어 쇼파도 사고 커피머신도 살 거라고 했었다. 아기자기했던 내 계획을 코로나가 다 휩쓸어갔다. 나는 한순간에 코로나에게 직장을 빼앗긴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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